유대인과세계를학살한기회주의자
“전쟁이시작되면정의보다는승리가우선이다”
“대중이생각을안하니통치자들은얼마나운이좋은가?”
히틀러는희대의악당인가,살인마인가?히틀러는유대인들의축재를독일대중이겪는가난의원인이라고규정하고유대인과집시들을대량추방하거나학살했다.또제1차세계대전패전에따른과도한배상으로인한엄청난인플레이션과1930년대전후의대공황으로침몰하는독일바이마르공화국의경제를정치적기반으로삼았다.그는노동조합해산과파업등을통해기업인들에게더많은재량을주고아우토반,병원과학교,올림픽경기장건설등을통해일자리를만들었으며재무장을위한군비확장정책을실시해군수산업을팽창시켰다.
히틀러는대공황때긴축으로일관한바이마르공화국정부의정책으로가장큰피해를본농민,퇴역군인,중하류층등을향해정치적메시지를던졌다.그리고1933년총리에오른뒤‘오타키(폐쇄적자립경제)’정책과일자리우선의완전고용정책을펼치고국제연맹탈퇴,수입품에대한관세인상등수입통제로국내산업보호정책을펼쳤다.그결과집권당시30퍼센트대였던실업률은1939년에사실상완전고용상태로바뀌는경제적호황을누렸다.하지만히틀러는어떤정견이나이념이나원칙이나주의같은것을갖고있지않았다.그는기회주의적반공군사독재자외에다른아무것도아니다.그는정치를시작할때부터기회주의자였다.
독일에서는일찍부터유대인에대한적대감이극에달했는데,제1차세계대전의패배로반유대주의는더욱극심해졌고,그풍토속에히틀러가등장했다.히틀러는탁월한연설과천부적인선전선동에능했는데,그는자신을‘영웅을위한선동가’라고생각했고,자신이독일을구할영웅이라고믿었다.라디오연설에서도국민상호간의대립을극복하고마르크스주의의박멸을선언했다.그러면서유대인의공민권을박탈하고유대인과비유대인사이의성교와혼인을금지하는법을만들면서까지철저하게유대인들을탄압했다.
나치와25개조강령
1920년2월24일,2,000여명의청중이모인맥줏집에서나치당의‘25개조강령’이발표되었다.그것은히틀러가아니라경제학자고트프리트페더가작성한것이었다.히틀러는『나의투쟁』을집필할때전술적문제에중점을두고그것을고쳐책에수록하기도했다.1920년의강령에는당시혁명의열기가남아있었던탓에사회주의적인색채가가미되어있었으나,1927년이후의강령에는그것이상당히제거되었다.
25개조강령의첫3개조는베르사유조약이새로정한독일국경을수정하고국경밖독일인을포함하는대독일국가를실현한다는것이었다.4~10조에서는독일국민의권리의무를규정하면서독일인의피를갖지않은유대인의공민권을박탈한다고선언했다.11~18조는‘공익’에관해불로소득금지,이자노예제타파,전시이득의완전몰수,트러스트기업의국유화,대기업이익배당에참여,양로제도확충,건전한중간층의창설과유지,대백화점의전시공유화,소기업보호,공익목적의토지무상몰수,지대폐지,토지투기의방지등이었다.19~25조는유물주의적인로마법폐기,빈곤아동교육의국가부담,모자보호,소년노동금지,청소년체육장려,국민보건향상,국민군창설,언론계의유대인배제,반유대적인적극적기독교,강력한중앙집권제창설등이었다.
25개조강령의내용은5가지로분류할수있다.첫째,인종주의다.무엇보다도강령은독일민족의혈통을지닌자에대해서만독일시민으로인정했다.둘째,대외정책이다.베르사유조약의즉각파기와민족자결권의보장에의한타국과의동등규정,‘대독일통일’규정이다.셋째,경제·사회정책이다.무엇보다도노동을국민의의무로규정했다.넷째,법과교육등의개혁이다.법개혁은로마법,즉나폴레옹민법전을폐지하고유물론적색채가적은게르만법을채택해야한다고규정했다.교육에서도스포츠교육의강화와실생활에적합한교육과공민교육을포함시켰다.다섯째,국가의형태다.독일이강력한중앙집권체제로가야한다고규정했다.
히틀러와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는본래영어권에서화재나참사를뜻하는보통명사였으나,나치독일에의한유대인학살을뜻하는말로사용되기시작했다.그러나이말은구약성서의‘신에게바치는제물’이라는함의가있어이스라엘에서는그대신파국이나파멸을뜻하는‘쇼어’라는말이사용된다.홀로코스트의저변에는3개의사상이있었다.인종주의,우생사상,반유대주의인데이것은서로관련된다.인종주의는인간을생물학적특성이나유전학적특성에의해몇가지인종으로나누고인종사이에생래적인우열의차가있다고보는편견에근거한사고방식,관념,담론,행동,정책등을뜻한다.
히틀러가정권을잡은뒤정한최초의반유대법은유대인의공직추방을의도한1933년의‘직업관리재건법’이었다.유대인이공직에서추방되면반유대적인법이나정책을전개시키기쉽고,그법은민간분야에도파급될수있었다.1935년‘뉘른베르크인종법’이라고불리는‘독일공민법’과‘독일인의피와명예를지키는법’이제정되었다.그결과유대인의법적지위는해방이전으로돌아갔다.히틀러의반유대주의는알베르트아인슈타인을비롯한저명한유대인들의망명으로이어졌다.그가1933년3월미국으로망명한직후인5월10일,국민계몽선전부장관요제프괴벨스는아인슈타인을포함한유대인들의저작과공산주의·사회주의서적들을불살랐다.
1938년,히틀러의유대인억압은더욱강해졌다.‘제국수정의밤’을비롯한끔찍한사건이계속터져수백명의유대인이살해되고3만명이상의유대인남성이수용소에감금되었다.그러나오스트리아를합방한히틀러의외교적성공은유대인박해에도국내외사람들이히틀러를무조건추앙하게만들었다.인구의1퍼센트도안되는유대인문제는대다수독일인에게는관심의대상도되지못했다.1939년에는유대인을국외로추방하는정책이더욱적극적으로전개되어그해에만약7만5,000명이독일을떠났다.
히틀러는기회주의자다
1919년4월,히틀러는병사평의회의대의원으로선출되었다.당시에는부대마다병사평의회가설치되었고,장병들도혁명파에서반혁명파까지다양했다.히틀러도혁명파는아니었다.당시뮌헨에서는공산주의자들이바이마르공화국을부정하며소련식볼셰비즘정권을수립했다.히틀러는볼셰비즘정권을타도하는데힘을쓰기는커녕그휘하대대의대의원으로활동하면서기회주의적이고시류에영합하는모습을보여주기는했어도혁명좌파에반감을품었다.히틀러는정치적이념에의해서볼셰비즘군사활동에참여했다기보다는,단지제대하지않고가능한한군대에오래남고싶다는이유로기회주의적인입장을취했다.히틀러는재군비와징병제도입을주장하는한편국회연설에서는평화를주장하는등전쟁주의자와평화주의자라는모순된두얼굴의외교정책을실시했다.
라파엘젤리히만은『집단애국의탄생:히틀러』에서히틀러를“지난천년을통틀어가장폭력적이었던한정치가”라고규정했다.그러나가장많은사람을죽인독재자로서히틀러는1,700만명을죽여2,300만명을죽인이오시프스탈린이나7,800만명을죽인마오쩌둥보다못하다는주장도있다.그런데히틀러가‘최근1,000년의최대악당’이라는소리는맞는말인가?히틀러식의군사정복과독재,말살과학살,계엄령과특별법정,노예와강제노동,집단수용소와대양을넘어가는이주등은영국이나프랑스등모든제국주의의전형적인수법이기도한것이아닌가?히틀러는그것을흉내낸것에불과했고,굳이차이가있다고한다면제국주의자들보다는짧은시간에집약적으로폭력을행사한정도의차이가있었던것에불과했다.
문제는히틀러개인탓이아니라는것이다.오로지히틀러개인탓이라고몰아가는것은결국독일인이자기책임을벗기위한술책에불과하다.마찬가지로히틀러의독재를용인한유럽정치인들과유럽인들의책임을벗기위한수작에불과하다.당대의독일인들과마찬가지로유럽인들에게도히틀러가독재를하도록용인한책임이있다.일찍이해나아렌트가지적했듯이전체주의대두의토양은대중사회내부에도사리고있었다.즉,제국주의와식민지지배와민족주의가발달하면서새롭게형성된의식,강제와의도적인노력을통해인간을개조하고변형시킬수있다는의식,국가나사회전체를위해개인을희생시킬때비로소삶의의미와의의가확보된다는의식이자리잡았다.
마찬가지로허버트마르쿠제가주장했듯이파시즘의책임논의에서더욱근본적인책임소재는자본주의자체,산업문명자체,권력구조자체에서찾아야한다.전쟁국가,소비주의,생태계위기,폭력과냉소주의,문화와행정의대중적진부함과공허함으로가득차있는현대산업문명에그책임이있다.나아가생명을파괴하고오용하고퇴화시키는권력구조자체에책임이있다.나치즘은독점자본주의의종양이돌출한것으로한계에이른자본주의가배양한야만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