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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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는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인 《인문학의 거짓말》에 이어지는 중세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인문학의 거짓말》에서 고대 인문에 대해 쓰면서 부처나 예수도 아나키스트라고 명명했다. 반면 서양의 주류 사상인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과 대립한 사상가로 디오게네스를 내세웠다. 디오게네스는 예수로 이어졌으나, 예수의 아나키즘은 바울과 콘스탄티누스 등에 의해 배신당해 서양 중세 1,000년의 세월 동안 왜곡되었다. 서양이 자신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를 아나키스트 예수의 믿음으로 되돌려야 그 제국주의를 끝낼 수 있다.
저자

박홍규

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시립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 법대ㆍ영국 노팅엄대학 법대ㆍ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학ㆍ고베대학·리쓰메이칸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ㆍ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다.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2015년 『독서독인』으로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저항하는 지성, 고야』, 『놈 촘스키』,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공저), 『아돌프 히틀러』, 『누가 헤밍웨이를 죽였나』, 『불편한 인권』,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복지국가의 탄생』,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제우스는 죽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조지 오웰』, 『니체는 틀렸다』, 『인문학의 거짓말』, 『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 『내 친구 톨스토이』, 『함석헌과 간디』, 『자유란 무엇인가』, 『마키아벨리, 시민정치의 오래된 미래』,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독서독인』, 『마르틴 부버』, 『이반 일리히』, 『세상을 바꾼 자본』,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예술, 법을 만나다』, 『플라톤 다시 보기』,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윌리엄 모리스 평전』, 『내 친구 빈센트』,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자유인 루쉰』 등을 집필했다.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는 『예술은 무엇인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유한계급론』, 『산업민주주의』, 『간디가 말하는 자치의 정신』,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간디, 비폭력 저항운동』, 『유토피아』, 『인간의 전환』, 『예술과 기술』, 『절제의 사회』, 『유토피아 이야기』, 『이반 일리히의 유언』, 『학교 없는 사회』, 『자유론』, 『간디 자서전』, 『오리엔탈리즘』, 『사상의 자유의 역사』 등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 ㆍ 5

제1장 중세 이야기 ㆍ 11
제2장 인도는 지금도 중세인가? ㆍ 27
제3장 인도 중세의 사상 ㆍ 43
제4장 인도 중세의 문학 ㆍ 58
제5장 인도 중세의 예술 ㆍ 74
제6장 이슬람 중세 이야기 ㆍ 90
제7장 이슬람 중세의 사상 ㆍ 106
제8장 이슬람 중세의 문학 ㆍ 122
제9장 이슬람 중세의 예술 ㆍ 138
제10장 서양 중세의 제국주의 ㆍ 154
제11장 서양 중세의 사상 ㆍ 170
제12장 서양 중세의 문학 ㆍ 186
제13장 서양 중세의 예술 ㆍ 202
제14장 중국 중세 이야기 ㆍ 219
제15장 중국 중세의 사상 ㆍ 235
제16장 중국 중세의 문학 ㆍ 251
제17장 중국 중세의 예술 ㆍ 267
제18장 한반도 중세 이야기 ㆍ 283
제19장 한반도 중세의 사상 ㆍ 298
제20장 한반도 중세의 문학 ㆍ 313
제21장 한반도 중세의 예술 ㆍ 332

참고문헌 ㆍ 346

출판사 서평

탐욕과 배신의 인문학
“인간을 구속하는 종교나 사상은 백해무익하다”

우리는 인문학의 빈곤 시대에 살고 있다. 인문학은 타락했고, 탐욕과 배신과 욕망에 물들었다. 반인간적인 물질주의가 판을 치고 있음에도 물질과 반대인 정신이나 인간을 중시한다는 인문 혹은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으니 더욱더 기이하다. 가짜 인문학이 성업 중인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특히 동서양의 지배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 없이 무조건 찬양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지향하는 민주적 연대 의식과 사회적 연대 의식이 이렇게까지 빈곤한 시대가 또 있었던가? 그렇다면 타락한 인문학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인문학을 읽을 것인가?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는 인문의 출발과 고대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인 『인문학의 거짓말』에 이어지는 중세의 인문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인문학의 거짓말』에서 고대 인문에 대해 쓰면서 부처나 예수도 아나키스트라고 명명했다. 반면 서양의 주류 사상인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과 대립한 사상가로 디오게네스를 내세웠다. 디오게네스는 예수로 이어졌으나, 예수의 아나키즘은 바울과 콘스탄티누스 등에 의해 배신당해 서양 중세 1,000년의 세월 동안 왜곡되었다. 서양이 자신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를 아나키스트 예수의 믿음으로 되돌려야 그 제국주의를 끝낼 수 있다.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는 인도, 이슬람, 중국, 한반도의 중세 인문을 서양 중세 인문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즉, 서양 중세는 이 중세 이야기 중 4분의 1 정도다. 특히 암흑시대라고 알려진 서양 중세와 달리 비(非)서양 중세는 개명시대였음을 새롭게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하는 6~16세기에 서양은 그 앞뒤의 시대에 비해 낙후된 반면, 비서양은 그 어떤 시대보다 앞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저자는 그동안 거의 다루지 않은 『코란』과 이슬람 사상과 예술,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동에서는 이슬람 문명이 탄생했고, 중국에서는 수·당·송의 불교문화 등이 다양하게 꽃을 피웠으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그 못지않은 찬란한 문명이 개화되었다. 그야말로 개방과 관용의 문화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찬란한 문화가 나타났다. 조선시대보다 그 이전 중세에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관용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창조되었다. 비서양 근대는 서양 근대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암흑시대로 전락했다. 그런 서양 근대의 암흑에 비하면 서양 중세조차 개명으로 볼 여지가 있다. 세계사 속의 중세란 오직 서양의 중세였다. 비서양의 중세가 있어도 그것은 서양이 바라본 중세였다. 이러한 역사관은 서양 근대 중심 세계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흔히 말하는 ‘지리상의 발견’이 아니라 ‘지리상의 침략’으로 시작되는 서양 중심의 근대는 마침내 2019년의 ‘코로나19’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것은 1980년대 이후의 소위 글로벌리제이션이 초래한 미증유의 팬데믹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금 더 길게 보면 16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침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 그것을 약자인 피해자의 마조히즘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웃으며 아예 역사에서 제거하려는 가해자적 심성의 서양주의 인문학과 그 추종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21세기 초에 닥친 재난의 일상화는 그런 비웃음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코로나19에 대한 미국이나 유럽의 대응은 서양이 세계의 으뜸이거나 희망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도 중세 이야기

2018년 1월 힌두 왕비와 이슬람 왕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 〈파드마바트〉가 개봉되자 인도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감독과 배우를 죽이면 수십억 원을 주겠다는 협박도 있었다. 인도의 주류인 힌두교도는 이슬람교도를 비롯한 달리트와 토착민 등 인도 내 소수자들을 차별해왔다. 이런 차별은 현재 인도 수상인 나렌드라 모디의 집권 이후 심해졌다. 모디는 힌두교주의를 내세우고, 이슬람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며 집권했다. 배타적인 중세적 세계가 된 것이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과 힌두교 개혁, 이슬람의 공존이 이어졌던 인도의 중세는 서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으며 관용과 조화가 가득했다. 델리의 쿠트브미나르는 힌두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섞여 있다. 중세 인도가 로맨틱한 공존의 세계였다면, 현재 인도는 그보다 어둡고 야만적인 배타의 세계다.
인도의 바라나시는 죄를 씻고, 죽은 이들을 화장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인도인도 우리처럼 제사를 지내고, 조상을 모실 아들을 낳는 것을 중시하며, 허례허식을 일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소박한 관혼상제를 치른다. 인도인들은 윤회사상 때문에 다음 생에는 지금보다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바라나시 등에는 종교적이고 중세적인 분위기가 있다. 인도는 고대·중세·근대·현대 등의 시대를 구분하기가 힘들다. 인도에는 고대와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인도인은 삶을 학생기·가장기·은둔기·방랑기로 나눈다. 학생기는 스승 밑에서 『베다』를 배우는 기간이며, 가장기는 삶의 3대 목적인 법·이익·애욕을 추구하는 시기다. 은둔기는 황야나 숲속에서 명상에 잠기는 기간, 방랑기는 정처 없이 방랑하며 자유롭게 죽음을 맞는 시기다.
인도 문학의 핵심은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다. 흔히 인도의 특징을 다양성이라고 하지만, 그 바탕에는 어김없이 절대자에 대한 찬양이 있다. 인도 문학은 고대 연극에서 시작해 현대 영화로 이어졌다. 인도 중세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불리는 칼리다사의 『샤쿤딸라』가 왕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인도 영화도 왕이나 부자들의 사랑을 다루며 이들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인도에도 반대자의 전통이 있었다. 불교 철학자 다르마키르티는 모든 경전을 거부하고 이성과 논리적 사고를 숭상했다. 남부 인도 타밀어 문학에서는 여성과 하위 카스트 시인들이 정통 교의와 가부장주의에 강력히 반대했다. 15세기에는 신과 개인의 직접적 관계를 강조한 카비르가 등장했다.
우리가 ‘음악’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서양에서 들어온 음악을 생각하듯, 인도에서는 ‘음악’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전통음악을 생각한다. 인도의 모든 음악은 전통음악이라서 굳이 ‘전통’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인도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중세적이고,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인도 음악은 신을 찬양하고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도구로, 특정한 상태에서만 맞볼 수 있는 라사라는 감정을 이끌어낸다. 인도 미술은 세계 미술사에서 외면되어왔지만 5,000여 년 전 모헨조다로 시대부터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영국인들은 간다라미술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인도 고유의 마투라 조각과 결합해 발전시킨 것이다.

이슬람 중세 이야기

서구의 중세 1,000년에 해당하는 시대에 이슬람은 서구보다는 훨씬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달한 진보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중세 이슬람이 예술과 과학의 꽃을 피워 인류의 사상적 유산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유럽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중세 기독교의 눈으로 잘못 본 이슬람의 모습이 아닐까? 특히 이슬람을 적대시한 아퀴나스 시대에 지식과 문화는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유럽은 이성이라는 개념과 이성을 사용해 추론하는 방법도 이슬람에서 배웠다. 그리스철학·경험적 방법론·수학·대학·도서관·병원도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건너갔다. 심지어 근대 유럽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도 이슬람에서 왔다.
현재 아랍 세계는 독재가 만연하고 관용이 없는 비극적인 세계다.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중세가 끝났다. 유럽의 중세는 관용이 없는 맹신의 시대였던 반면, 이슬람의 중세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달한 진보적인 시대였다. 하지만 이슬람은 중세가 끝나며 암흑에 빠졌고, 그때부터 시작된 이슬람과 서구의 갈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서구가 이슬람과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면서 오리엔탈리즘도 퍼져나갔다. 서양은 동양을 신비로운 마법과 범죄, 매춘부와 동성애의 천국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역시 서구가 왜곡한 오리엔탈리즘에 갇혀 이슬람 문명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2018년 6월 예멘 난민 500여 명이 제주도에 들어오자,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바탕에는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편견이 있다. 우리나라는 학교에서부터 이슬람을 거의 다루지 않고,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등 이슬람을 폄훼하는 잘못된 사실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코란』을 읽어보면,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평화와 사랑의 종교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기독교 세계는 오랫동안 이슬람교를 비롯한 타종교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이슬람 세계에는 기독교와 유대교 공동체가 존재해왔다. 또한 『코란』을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는 무타질리파가 성행하던 8~13세기, 이슬람은 최첨단 문명으로 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문제는 이슬람교가 아니라 종교를 정치화하는 이슬람의 정교일치다.
한국에서는 이슬람 문학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유명한 아랍 문학은 『아라비안나이트』인데, 정작 『아라비안나이트』는 유럽에서 제국주의가 시작되면서 소개된 책으로, 아랍의 이야기라고 하기 힘들다. 우리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알아도, 내용의 질과 양 모두 훨씬 뛰어나다는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잘 모른다. 십자군전쟁에 관해서도 서양 측 자료와 작품 일색이다. 십자군전쟁 시대 중세 아랍 시를 국내에 소개한 김능우 교수는 이븐 할둔의 『무알라까트』도 소개했다. 할둔의 핵심 개념인 ‘아사비야’는 정의와 공감과 균형에 기초한 민주적 연대 의식으로, 지금 사회에 꼭 필요한 개념이다.
이슬람 중세 예술은 무엇보다도 책과 글자와 세밀화의 예술이다. 이슬람 중세는 책의 시대였다. 중세 초부터 수천 개의 도서관이 세워졌고 다양한 주제의 책이 엄청나게 출판되고 판매되었다. 그리고 책은 세밀화와 다양한 색과 모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