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고조선단군학회 봄 학술대회(2022년 4월 1일)는 「'금기'의 영역 한사군 大解剖」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학술대회 주제에 ‘금기’라는 단어를 넣었듯이 한사군은 중ㆍ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한사군에 대한 거론 자체가 없었다. 비록 한사군의 역사는 설치 주체인 중국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한국사의 한 부분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고대국가 성립과 발전 과정에서 맞닥뜨릴 뿐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한사군이었다. 漢 武帝가 설치한 四郡 즉 한사군 이전의 중국 郡이 滄海郡이었다. 그러나 창해군의 소재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설치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견해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창해군은 전통시대 한국인들의 역사 인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창해군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치더라도 秦始皇을 저격했다는 滄海力士의 출신지를 강릉과 결부 짓는 등 가깝게 받아들여 왔었다.
본서에서는 한사군의 前身 格인 창해군과 가장 나중에 설치된 대방군을 포함했다. 그러므로 한사군이 아니라 ‘漢郡縣’으로 표기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204년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방군은, 漢이나 魏의 통치권 밖인 ‘絶域’에 소재하였다. 게다가 대방군의 설치 주체는 요동의 공손강이었다. 따라서 대방군은 ‘漢郡縣’에 속하지 않았다. 반면 대방군은 낙랑군의 속현인 대방현에서 출발했다. 넓게 보아 낙랑군에 연원을 둔 대방군도 한사군에 포함된 것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신라 말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四郡’으로 일컬었다. 이 ‘四郡’은 漢四郡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四郡’ 안에는 대방군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본서의 제목을 ‘한사군 연구’로 정했음을 밝혀둔다. 한사군은 실체적 존재감뿐 아니라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도 의미가 지대하였다. 삼국의 역대 왕이나 고려 왕에 이르기까지 한사군 이름에서 封爵 받은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조선조에서도 封號로서 ‘낙랑’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한사군은 실체와 인식론, 양면에서 모두 의미가 지대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학회 차원에서 집성해 보았다.
한국의 고대국가 성립과 발전 과정에서 맞닥뜨릴 뿐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한사군이었다. 漢 武帝가 설치한 四郡 즉 한사군 이전의 중국 郡이 滄海郡이었다. 그러나 창해군의 소재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설치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견해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창해군은 전통시대 한국인들의 역사 인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창해군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치더라도 秦始皇을 저격했다는 滄海力士의 출신지를 강릉과 결부 짓는 등 가깝게 받아들여 왔었다.
본서에서는 한사군의 前身 格인 창해군과 가장 나중에 설치된 대방군을 포함했다. 그러므로 한사군이 아니라 ‘漢郡縣’으로 표기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204년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방군은, 漢이나 魏의 통치권 밖인 ‘絶域’에 소재하였다. 게다가 대방군의 설치 주체는 요동의 공손강이었다. 따라서 대방군은 ‘漢郡縣’에 속하지 않았다. 반면 대방군은 낙랑군의 속현인 대방현에서 출발했다. 넓게 보아 낙랑군에 연원을 둔 대방군도 한사군에 포함된 것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신라 말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四郡’으로 일컬었다. 이 ‘四郡’은 漢四郡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四郡’ 안에는 대방군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본서의 제목을 ‘한사군 연구’로 정했음을 밝혀둔다. 한사군은 실체적 존재감뿐 아니라 인식론적인 차원에서도 의미가 지대하였다. 삼국의 역대 왕이나 고려 왕에 이르기까지 한사군 이름에서 封爵 받은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조선조에서도 封號로서 ‘낙랑’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한사군은 실체와 인식론, 양면에서 모두 의미가 지대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학회 차원에서 집성해 보았다.
한사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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