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내가일어난다.
이름없이,더럽혀지지않은채로.”
퓰리처상수상시인실비아플라스의국내초역작품집
『실비아플라스시전집』과장편소설『벨자』등을선보이며국내독자에게실비아플라스의작품세계를알려온마음산책에서『낭비없는밤들』이출간됐다.이번책은국내초역되는단편과산문(에세이)을묶은작품집으로,실비아플라스의다채로운글쓰기와작가적재능을두루만나볼수있다.
『낭비없는밤들』은실비아플라스가남긴단편과산문,일기를전남편인영국의계관시인테드휴스가엮어출간한『조니패닉과꿈의성경JohnnyPanicandtheBibleofDreams』2판(1979년)을저본으로한다.2판은1977년초판출간후,인디애나대학교의릴리도서관에서발견된초기원고들을추가한것이다.‘1부더성공적인단편및산문’‘2부다른이야기들’같은테드휴스의구성은,자칫1부에실리지않은작품들을미흡한것으로인식하도록선입견을심어줄우려가있었다.국내판에서는그의분류를해체하고산문과단편으로구분하여역연대순으로작품을배치했다.독자는실비아플라스가죽기직전인1963년의산문에서출발해십대후반에쓴1949년의단편에도착하게된다.이러한흐름은시간을거슬러올라가며작가로서발전해온실비아플라스를되짚어보는데유용할것이다.
소설가이자시인인마거릿애트우드는1979년<뉴욕타임스>에실은이책의리뷰에서“천재가꽃처럼피어난다는낭만적인생각은영원히묻어두어야한다.그토록오랫동안열심히일하면서눈에띄는성과가거의없던주요작가는드물었으니까.그돌파구는몇번이고힘들게얻어낸것이었다”라고썼다.실비아플라스가세계적인명성과신화적인이미지를얻은것은사후의일로,그는살아생전글쓰기로먹고살겠다는야심을이루지못했다.그럼에도불구하고실비아플라스는첫시를발표한여덟살때부터평생동안글쓰기를돌파구로삼아쓰는일에투신했다.『낭비없는밤들』은그꺾이지않는열정과의지가고스란히담긴책이다.
글을쓰며아이를기르며말그대로온밤들을할애하여만들어졌을플라스의이이야기들이좀더많은독자와만나기를바란다.재치와유머가곳곳에스민기민한시선을즐겨보았으면한다.독자개개인의마음속에서각자의플라스를만날수있기를._「옮긴이의말」에서
십대후반부터죽기직전까지쓴열일곱편의단편
실비아플라스는1956년에쓴일기에자신이“가장두려워하는것은상상력의죽음”이며,“꿈이없는삶의빈곤은상상만해도끔찍”하다고적었다.시인으로이름난그지만,1952년<마드모아젤>소설공모전에입상하면서단편창작에도열을올리기시작했다.『낭비없는밤들』에는당시수상작인「민턴가家의일요일」을포함한열일곱편의단편이수록되어있다.실비아플라스는풍경은물론사소한사물,인물들간의대화와감정까지세심하게묘사하며,뛰어난상상력을바탕으로독창성넘치는단편을다수남겼다.그의작품과생애를익히아는독자라면얼마나많은이야기가실제경험을모티프로만들어졌는지눈치챌만큼고백적인측면이강한작품들이다.
단편가운데눈에띄는것은삶과죽음의경계에존재하는인물을그린작품들이다.주인공들은벽난로앞에둘러앉아‘죽은자들’에관해이야기를나누고(「모든죽은소중한이들에게」),죽음으로써오히려가족에게평온을가져온심술궂었던노인의장례식장에가고(「프레스콧씨가죽던날」),강인했던아버지가초라하고무력하게죽어가는모습을지켜본다(「땅벌사이에서」).모두노골적으로‘죽음’을전면에내세우지만예상을비틀고기발한유머와재치를구사하며재미를선사하는것이특징이다.
곧이어프레스콧부인이내쪽으로돌아서서볼에입맞춰주었다.나는다시슬픈표정을지으려고했지만그표정이도무지나오질않아서“프레스콧씨소식을듣고저희가얼마나놀랐는지몰라요”라고말했다.사실우리는전혀놀라지않았었다.왜냐하면그노인은단한번의심장마비로최후를맞을수있었기때문이다.하지만그렇게말해야옳았다._259쪽,「프레스콧씨가죽던날」에서
한편으로어린시절을능숙하게재현하는작품도여럿있다.친구여동생과옥신각신하다친구다리를물어뜯어동네의천덕꾸러기로전락하거나(「더섀도」),친구를넘어뜨려새방한복을못쓰게만들었다는누명을쓰고(「슈퍼맨그리고폴라브라운의새로운방한복」),여학생클럽에가입하기위해‘빅시스터’의혹독한시험대에오르기도한다(「입회」).실비아플라스는이와같은작품들에서아이(청소년)들의미묘한신경전과천진한악마성을기민하게그려낸다.
이웃들의압력에도불구하고,나는리로이와그의동생모린이사과하지않는한사과할수없었다.이모든일은그들이시작했기때문이다.아빠도내가사과하길전혀기대하지않았는데,엄마는이일로아빠를맹비난했다._154쪽,「더섀도」에서
무엇보다흥미로운것은『낭비없는밤들』에실린단편곳곳에서실비아플라스의유일한장편소설『벨자』의흔적들을발견할수있다는점이다.『벨자』의주인공에스더는「돌의혀」에등장하는병약한소녀의투영이고,위선적이고오만한남자친구버디는「산속에서」의오스틴을그대로차용한캐릭터다.그뿐만아니라소설후반부에등장하는정신병원관련서술은「블로섬가街의딸들」「조니패닉과꿈의성경」등과유사한부분이많아이책을읽는즐거움을배가하고,실비아플라스가오래도록몰입했던문학적주제들을생각해보게한다.
시적인문장과뚜렷한주제의식이살아있는시인의산문
『낭비없는밤들』에실린산문은1962년부터1963년사이에쓴다섯편을선별한것이다.산문은단편이나일기에비해그수가많지않지만,각글마다드러나는시적인문장과분명한주제의식은실비아플라스산문의‘맛’을음미하기에충분하다.
생전마지막산문중하나로알려진「폭설」은기상관측상가장추웠던영국의‘빅프리즈’시기(1962년12월에서1963년2월사이)에쓰인것으로,폭설로배수관이막히고정전사태가일어나고아이들이독감에걸리는등엄혹한상황에처한현실을생생하게써내고있다.「아메리카!아메리카!」에서는어린시절미국에서교육을받은실비아플라스가개인의재능을제대로육성하지못하는미국의교육시스템에관한견해를밝힌다.풍부한묘사가돋보이는「Ocean1212-W」는그자체로실비아플라스라는시인의탄생과성장과정을그린한편이다.제목인‘Ocean1212-W’는어린시절할머니집전화번호로,그는자신이나고자란대서양해변을중심으로바다에대한갖가지기억,가족에대한회상을풍경화처럼담아낸다.나아가소설과시의차이점을간결하게짚어낸「비교」,시와시인에대한성찰을강조한「‘맥락’」또한이작품집의백미다.
별에서보듯나는모든것의분리를냉정하고이성적으로보았다.나는내피부의벽을느꼈다.나는나다.저돌은돌이다.이세상의사물들과나의아름다운결합은끝났다._41쪽,「Ocean1212-W」에서
실비아플라스의작품은자전적인성향이짙은만큼그의삶과완전히분리해서보기어렵다.그런점에서『낭비없는밤들』은한인간이자작가로서실비아플라스를총체적으로이해하는데중요한단초가된다.독자는이책을통해늘인정받기를갈망하며왕성한창작욕을불태웠던실비아플라스의다양한작가적면모를확인하게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