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유형들 (김사리 시집)

유형, 유형들 (김사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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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살다 보면 마른 물 자국 짙은 칼을 바라볼 때처럼 무언가로부터 마음을 베이는 순간이 있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이 세상 움직임의 전부라고 느낄 만큼 모든 것이 멈춰버린 몽환 같은,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는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어느 깊이에 빠져버리면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에 닿을 것만 같은 경험은 흔하지 않다. 말라 자국이 되기까지 물과 칼이 함께 벼린 시간을 거꾸로 더듬는 일은 유추와 상상의 영역이겠지만, 김사리 시집 「유형, 유형들」은 시간이 남긴 자국을 침묵으로 읽어도 비장함으로 읽어도 상관없다. 불안과 결핍을 부여잡으려는 지독한 몸짓으로 가득한 그의 시집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파동으로 채워진 까닭이다. 그러니 물의 흔적을 따라갈 누군가나, 또 칼의 차가움에 기댈 누군가나 모두 김사리의 시를 마주하는 방식으로 넉넉하다.
이런 독법은 얼음이 물로 변하는 0℃(녹는점)와 물이 얼어버리는 0℃(어는점)처럼 하나의 지점이지만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과 비슷한데, 녹는점과 어는점이 동일한 지점에 상상과 현실을 버무린 목소리를 뿌려놓는다는 점이 시집 「유형, 유형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삶의 여러 갈등에 접근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는 시편들을 마주하며 상상에 무게를 두고 살필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집중할 것인지는 선택의 영역일 뿐이다. 다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김사리 시인이 보여주려는 세계의 층층이 어떤 방향성을 지니는지 현상 너머의 이미지가 향하는 곳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저자

김사리

저자:김사리
경남밀양에서출생했다.2014년「헐거운햇빛의내력」외4편을발표하면서『시와사상』으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파이데이』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공생

거미씨의생존법10
검은입천장11
데스리뷰14
아프리카의휴일16
자신을소모품이라생각하는사람이버스를타고간다18
COPY20
긴호흡22
토끼와바나나26
뱅갈고무나무죽이기28
동물원에사는마음30
데크레셴도32
오늘의화법34
바다미술관36
우리들39

제2부우리들의관계

주검의자세42
요리의품격45
불편한요일의상점48
중동이라쓰고충돌이라읽는충동가능성50
궁지에몰린생쥐54
웬문이이리도많은지56
갈대와억새의차이60
쿠키는구름맛62
테이블야자65
캐릭터68
모자의화풍70
유형,유형들74
알비노를위한변명76
두꺼운책78
오토바이보다더높이날아오른전사81

제3부반성적자아

유리병에빠진꿀벌86
뼈의재구성88
투명기법90
수상한웃음91
찢어진우산94
식빵과스티로폼사이96
블랙99
주크박스102
크레용,크레용104
카스트라토106
맨발의오월이108
길위의장례식110

제4부꿈꾸는자의몸부림

세잔112
복선114
불면역116
렌즈속으로118
당신의선택권120
이글루에는정육각형눈의결정이자라고122
덜아픈사람125
슬픔의무게128
내일을연주해주세요130
사랑에대한예의132
한사람이온다134
자작나무숲136
우는사람137
엔딩크레딧138

김사리의시세계|최은묵140

출판사 서평

한줄기빛이있다면
그것이당신의이마에닿기를

2025년겨울
김사리


[책속에서]

구멍속을들여다본다
열쇠구멍은들여다보기좋은구조
모든비밀은구멍밖으로새어나온다네

구멍은진실일까거짓일까

구멍속으로숨을불어넣다가
구멍이먹먹해진사람이절뚝거리며걷고있다

구멍이아프기시작하면
구멍속에살던모든질병이
또다른구멍속을파고든다는데,

구멍은질주하고
구멍이너무많아지팡이든노인은
노을속으로천천히걸어가고있는데,

구멍을오래맴돌던사람은
자주심호흡을한다는데,

구멍속에는열쇠가없다
그렇다면입속에는비밀이없는걸까

구멍은왜터널처럼
발걸음소리를텅텅울리는걸까

그러므로구멍은
참을수없는말의무덤

실어증에걸린구멍이
도무지소통안되는구멍으로손을휘저어
잃어버린열쇠를찾고있다

밖으로새어나올때비밀은제일신나지
구멍을빠져나오는것이한평생이라한다면,
지금은한여름밤을꾸고있는지도몰라

가장극적인슬픔조차
지루하고긴여름밤의한장면에불과하다면,
평생은한달음에지나고말
순간들

구멍속으로들여다본것도
그토록집착했던일들도
모두구멍속의일
결국평생은긴호흡이었던거야

덜컹거리는기차를타고
너의꽃잎을지나가고
사랑이별처럼커졌다가사그라들고
기차는시끄러운소리를내며
구멍속으로소리마저걷어가버리고말겠지

무릎을꿇고구멍속을들여다보면
별이빛나는밤
누군가열쇠구멍모양으로웅크리고앉아
숨그네를타고있다

제구멍속에꾸욱눌러놓고
끝까지중력을잃지않았던구멍들이
그네를밀고당기고있다

수위조절에실패한별들이
강물위로덧없이떠내려가는밤

저물녘,온몸이구멍인사람이
구멍을잠글열쇠를찾아헤매고있다
-「긴호흡」중에서


다섯가지중에서고르라고요?

가능성은오류가아닌가정입니다.열가지가능성이다섯방향으로제한됩니다.
오류형인간을양성하는오지선다형,

다섯가지중에서고르라고요?

검정사인펜이길을나설때,맨먼저마주친당신에게

?검정색은동행자가필요한가요?
?젓가락도없는당신은무엇이식기인지알고있나요?
?저기허리꼿꼿한소나무는누구의자식인가요?
?상점들이거느린입은몇개인가요?
?혼밥중인사람은하루몇번의저녁을맞이하나요?

눈앞에는아이돌,누구나다아는뉴스
뻔한,뻔뻔한

교실문을닫고
시험지밖세상을꺼내보면
꿈결인듯잡히지않는먹장구름속

손으로더듬어서묻습니다
당신성씨는요?

?김
?이
?박
?최
?정

문틈에끼인인간이비로소당신입니까?
-「유형,유형들」중에서


여기서기거하기로하네
당분간이글루

두개의기후를끌어안고사는
몸밖의내가몸속의나에게말을거네

사막과빙하를걸어온나는
하나이면서둘
둘이면서하나

이토록작은돔에서도살아지는게신기하네

나는나와많은이야기를나누네
할일에대해
한일에대해

뼛속을파고드는추위는
풀릴수있는한기여서
간단히이글루

이글루속에나를가두면
내안의봄을꺼내고
여름을꺼내고

무성해진풀을베거나
축축하게젖은별을사탕처럼녹여먹기도하네
가끔은순록이끄는마차를타고눈밭을달리고

그런날이면
이누이트족처럼그린란드해안의외딴섬에서
깃발을꽂아놓고산타를기다리네

어깨가무거워지던내가눈의결정이되어반짝이면
마침내흉터마저마른자국으로만남게되네

밤의능선에는
두툼한장갑을낀길위의사람들이
하늘을올려다보네

별을보는사람들의눈동자속에는
눈의결정이반짝이고있네

순정한세계는
아무것도걸치지않을때찾아온다는걸
바람은차가울수록
표정이따뜻한손을흔들고있단걸

마침내이글루
여기서묵기로하네

폭설은아직멈추지않는데
설원을지키는별똥별이되어
-「이글루에는정육각형눈의결정이자라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