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철학의 전문가가 쓴 근현대 프랑스철학 탐험 안내서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질베르 시몽동, 알랭 바디우, 루이 알튀세르, 장-뤽 낭시 등 현대 프랑스철학의 거장들은 이제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이들이 제공하는 개념무기들은 때로는 충격과 또 한편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철학은 물론이고 미학, 예술, 정치철학, 과학철학, 문화이론, 미디어이론, 기술사회학, 건축,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이 어떤 지적 전통에서 성장해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철학은 어떤 기반과 바탕 위에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일까? 들뢰즈가 ‘차이’를 말할 때, 시몽동이 ‘집단적 개체화’를 말할 때, 그것은 과거의 어떤 사유들에 접속하며 그것들을 갱신하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철학자 황수영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을 연구하였고,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프랑스 생명철학 전통(꽁디약, 멘 드 비랑, 라베쏭, 베르그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자는 프랑스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창조적 진화』를 번역하였으며, 조르주 깡길렘, 질베르 시몽동, 질 들뢰즈를 연구하여 이들을 생성철학 흐름 속에서 조망하는 독창적인 저서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와의 대화』를 집필하였다. 또한 기술철학자로서 근래에 철학뿐 아니라 예술, 건축, 미디어이론, 기술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질베르 시몽동의 주저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를 번역하였다.
이번에 출판되는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은 2005년 철학과 현실사에서 출판되었던 책을 15년 만에 수정과 보완을 거쳐 재출판하는 것으로서, 근대 초기의 데까르뜨에서 현대 초기의 베르그손까지 3세기의 프랑스철학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에서부터 들뢰즈와 시몽동 같은 현대 프랑스철학 사상가들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 철학 전문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들이 프랑스철학을 탐험하는 데 꼭 필요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서양 근대철학사를 프랑스철학사를 통해 조명한다는 것
철학사는 각 사상가들이 고유한 개념의 열쇠를 창안하여 세계의 자물쇠를 여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각 시대는 자신의 독특한 사연을 개방하기를 원한다. 서양 근대철학은 어마어마한 사유의 보고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지금까지 철학사는 종종 박제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져 왔다.
서양 근대철학사에 대해서는 칸트 이후의 정형화된 이해방식이 존재한다. 현대 프랑스철학의 근원을 찾을 때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칸트, 헤겔 같은 독일의 거장들을 이정표로 삼곤 한다(5쪽). 이 책에 따르면 칸트라는 18세기 거장이 그려놓은 커다란 윤곽에 도전하는 “근대철학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그리고 그것들의 비판과 종합이라는 칸트의 도식은 도전을 불허하는 듯”(13쪽) 보인다.
이러한 통상의 근대철학사 이해에서 프랑스철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애매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이유는 프랑스철학이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이라는 틀에 부합하지 않는 독특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까르뜨의 시대에 스스로를 반데까르뜨주의자로 규정한 빠스깔(B. Pascal), 계몽철학자들의 과학주의에 반발한 루쏘, 이들의 계승자인 멘 드 비랑(P.G. de Maine de Biran) 등의 철학적 입장은 비합리주의라고 명명되고 철학사에서 소외되어 왔다.(13쪽)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의 철학사에 대한 전복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프랑스철학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 흐름이 합리주의와 공약 불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합리론자들, 경험론자들뿐 아니라 칸트의 철학과도 지속적인 대화의 장을 열어놓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과제는 프랑스철학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부분이 독자에게 드러날 수 있도록 밝게 조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방대한 문헌연구와 힘 있는 문체로 묵직한 지적 자극을 주며 근현대 프랑스철학사의 역동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유심론적 실재론’ 흐름을 정의한 철학자 라베쏭과 ‘프랑스철학의 개혁자’ 멘 드 비랑
이 책의 저자가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주요 인물로서 한 장씩 할애해 설명하는 라베쏭(F?lix Ravaisson, 1813~1900)과 멘 드 비랑(Marie Fran?ois Pierre Gontier Maine de Biran, 1766~1824)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이들은 반드시 조명될 필요가 있다. 19세기를 살았던 철학자 라베쏭은 ‘유심론적(spiritualiste) 실재론’ 혹은 ‘유심론적(spiritualiste) 실증주의’라는 흐름을 정의한 인물이다. 이 흐름에서는 ‘정신’이 플라톤이나 헤겔식의 관념적 의미를 갖지 않으며, 신체와의 관련 속에서 고려되는 심리적 특징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마음 ‘심(心)’을 중간 글자로 하는 ‘유심론’이라는 번역어가 spiritualisme의 번역어로 적절하다고 평가한다.
라베쏭은 멘 드 비랑을 일컬어 “프랑스철학의 개혁자”라고 평가하였다. 멘 드 비랑은 칸트처럼 데까르뜨식의 합리론과 감각주의적인 경험론을 종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멘 드 비랑의 해결 방식은 칸트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이 책은 말한다. 멘 드 비랑은 “내적 신체의 의식을 내포하는 ‘의지적 운동의 노력’에서 공허한 사유실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경험”(16쪽)을 보았다. 결국 멘 드 비랑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중간길’을 택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20세기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의 이미지 존재론의 기본 태도와 가깝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베르그손은 멘 드 비랑의 내적 의식의 직관이 경험을 ‘현상의 위로’ 올라가게 하는 동시에 형이상학적 실재를 경험적 인식으로 ‘내려오게’ 했다는 점에서 철학이 출발해야 할 지점을 올바로 제시했다고 평가한다.”(16쪽)
의지, 생명, 지속이라는 개념들을 토대로 ‘지성주의’를 비판한 프랑스 유심론
근대 서양철학은 데까르뜨 이래로 플라톤에 기원을 갖는 지성주의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이 흐름은 영국과 독일 양쪽에서 경험론과 관념론의 형태로 비판적으로 계승되어 그 맥을 이어 왔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데까르뜨 이후의 철학은 백과전서파, 유심론, 생기론, 실증주의 등 다양한 사조들이 각축을 벌이는 사고실험의 장이었다. 이는 프랑스 철학이 현실의 구체적 문제들과 씨름하면서도 외국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고 사고의 깊이와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이 모든 자양분을 기꺼이 흡수해 온 데 기인한다.
이 책 내용의 주요한 줄기를 이루는 프랑스 유심론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차례로 의지, 생명, 지속이라는 개념들을 토대로 ‘지성주의’를 비판하고 보완하는 새로운 철학적 사조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이 사조는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이 니체, 맑스, 프로이트라는 외래사상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유방식을 창안하면서 한때 거부되고 무시되고 망각된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프랑스철학의 보이지 않는 뿌리로 남아 그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데까르뜨, 로크, 버클리, 디드로, 꽁디약, 멘 드 비랑, 라베쏭, 베르그손 등의 사상가들이 씨름한 핵심 질문들이 무엇이고, 그들의 지적 노력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시대적 배경과 어떻게 호흡하였는지를 입체적으로 서술한다. 만일 이 책의 진단처럼 프랑스 유심론의 지적 전통이 근현대 철학사에서 소외되어 왔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정석으로 알아온 철학사란 반쪽짜리이거나 적어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관점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이 설명하는 근현대 프랑스철학은 그 구체성과 개방성 그리고 창조적 특징에 의해 우리가 가진 서양철학에 대한 도식적 이해를 극복하게 할 것이다.
[저자인터뷰 내용]
Q.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프랑스만이 아니라 어떤 문명의 어떤 철학사이건 그것을 박물관에 박제된 형태로 배운다면 누구에게든 동일한 의미가 되겠지요. 그런 것이 존재했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철학사의 생생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전달자와 전달받는 사람의 노력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그런 전제를 가지고 근현대 프랑스철학을 본다면 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철학사의 도식적 이해를 무력화할 겁니다. 근현대의 프랑스철학자들에게 철학이란 삶과의 투쟁에 가깝습니다. 그들에게 철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들이 토론과 논쟁을 하고 서신 교환하고 실험하는 학자적 활동만이 아니라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지어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가운데서도 사색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을 볼 때 철학은 곧 삶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이 강단에 들어오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치열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가 철학의 본래 정신에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습관’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철학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습관은 철학적 개념이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이고 이 경우는 어떤 새로운 것도 없는 단순 반복을 의미합니다. 철학에서 습관을 사유하는 것은, 들뢰즈도 잘 지적한 바 있듯이 ‘반복’이라는 현상이 생성철학의 근본 동력이기 때문이지요. 한 마리의 종달새가 봄을 불러오지는 않듯이 현상은 반복될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현상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동일한 반복이 각각의 사물에서, 생명체들에서, 개인들과 사회들에서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근현대의 프랑스철학이 습관에 주목한 것은 신체의 여러 운동들에서부터 정신의 고차적인 활동에 이르기까지 반복이 야기하는 독특한 효과가 생물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철학적 차원에서 인간성의 총체적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