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함의 정신사, 숭고함의 서사들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정치적 무의식)

취약함의 정신사, 숭고함의 서사들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정치적 무의식)

$36.00
Description
문예비평가 전성욱의 다섯 번째 비평집. 『취약함의 정신사, 숭고함의 서사들』은 아시아라는 상상의 지리를 매개로 한국의 현대 지성사를 탐구한 작업이다. 이어령, 김용운, 김윤식, 조동일, 김지하, 최원식, 백영서 등 한국의 포스트식민 남성 엘리트들은, 그 식민주의의 트라우마가 남긴 정신사적 결여를 메우기 위하여 막대한 담론의 서사를 구축해야만 했다. 그들은 근대화의 역사적 시간을 통과하며 ‘민족’에 기대어 ‘세계’로 비약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동아시아’는 서구적 근대라는 거대한 역사적 관념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자 방법이었다. 특히 그들은 서구의 변증법적인 사고체계와 비대칭성의 문명을 넘어서기 위해 통합적이고 소통적인 대칭성의 사고형식을 창안하려고 했다. 요컨대 동아시아는 극단의 치우침을 아우를 수 있는 중도의 사상이자 문명 전환의 기획으로서 제기되었다. 바로 그 거대한 아우름의 사상을 서사화한 담론이 곧 그들의 공허한 정신사적 결핍을 채우는 환상, 즉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부장적 근대화가 남긴 상처는, 그들이 소망하고 추구했던 탈식민의 서사화를 가로막는 깊고도 어두운 심연이었다. 따라서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시선을 통해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한국 현대 지성사의 성취와 문제성은 더 또렷이 드러나게 된다. 곧 이 책은 한국 현대 지성사가 무엇을 욕망했고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정신사적 지도이기도 하다.
저자

전성욱

문예비평가, 동아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변명과 희망을 비롯해 인간의 모든 것이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소설을 중심으로 세상 제각각의 이야기들에 담긴 인간의 욕망, 그 삶을 향한 생명의 의욕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그 공부가 나를 구하고, 또 함께 더불어 살 수 있게 하는 ‘기쁨의 서사학’으로 일구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펴낸 책으로 『소설의 핵심 - 김가경의 소설과 소설의 이론』(2022), 『문학의 역사(들) - 소설의 윤리와 변신 가능한 인간의 길』(2017), 『남은 자들의 말 - 오월 광주의 순수한 현시, 그 무릅씀에 대하여』(2017), 『현재는 이상한 짐승이다』(2014), 『바로 그 시간』(2010)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 - 새를 날려 보내다 7
서장 - 상징적 해결과 책임의 윤리 14

1. 근원과 보충 73
랑가주의 자장 안에서 - 이어령의 일본문화론 74
중립의 민족론과 보편의 원형이라는 상상 - 김용운의 한일 비교문화론 115
융합의 열정에서 종합의 의욕으로 - 함재봉의 유교 정치학 145
보론 :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오독 -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에 대하여 183

2. 총체와 해체 201
비교를 통한 비약, 막대한 아우름의 세계 - 조동일의 학문이 다다른 곳에 대하여 202
해체의 신화학과 텍스트로서의 동양 - 정재서의 동양학 담론 244
“특수보다 보통이 좋다” - 최원식의 동아시아론 278
해체의 논리, 실체에의 충동 - 백영서의 중국과 그 학술 담론 315

3. 교양과 변신 353
외로움의 집념과 그 변형 - 김윤식의 일본 354
맹점이 아니라 스타일이 드러나는 장소 - 김영민의 일본론 396
『녹색평론』 혹은 이시무레 미치코 - 김종철의 일본 430
여행의 서사, 문명의 자의식 -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 3부작 457

4. 분열과 생성 509
중국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 복거일과 증상으로서의 반중 510
우리들의 ‘중국몽’ - 이종민의 『흩어진 모래』를 읽다 533
틈새와 어긋남에서 구하다 - 김항의 『제국일본의 사상』을 읽다 554
누빔점으로서의 만주 - 한석정의 『만주 모던』을 읽다 567

종장 - 케이라는 유니버스 587

참고문헌 636
인명 찾아보기 650

출판사 서평

실패한 숭고에서 배우기
브뤼노 라투르는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자성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재는 매개, 번역, 전환이라는 긴 우회의 궤적 속에서 매번 새로이 ‘창설’되는 것이다. 이 책이 출발하는 문제의식도 여기에 있다. 근대화가 분리와 정화의 비대칭성으로 세계를 환원해 왔다면, 저자는 그 환원의 폭력에 맞서 연결과 혼합의 대칭성, 즉 ‘생태화’의 길을 더듬는다. 저자에 따르면 존재를 가능케 하는 타자성의 내재적 경험이 중요하며 그 경험은 언제나 위험을 감수하는 우회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 우회의 역량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바꾸는가를 저자는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읽어낸다. 조총련계 자이니치 가족사, 북송사업, 4.3의 상흔 같은 이념과 폭력의 기억은 한 개인의 몸과 감정에 ‘현전’하는 규제로 각인되지만, 그 규제는 완전한 장악이 아니라 틈과 잉여를 남긴다. 일본인 사위를 끝내 받아들이며 수프를 내어주는 어머니를 보여주는 장면은 그러한 틈이 환대로 반전되는 극적인 순간이다. 고통의 기억을 ‘함께 나눔’(분유/partage)으로써 타자의 관점을 감내하고 통과하는 그 시간 속에서 가족은 민족, 국가, 이념의 경계를 넘어 서로를 새롭게 겹쳐 보게 된다.
저자가 『취약함의 정신사, 숭고함의 서사들』에서 하려는 일도 이와 닮아 있다. 양영희의 영화에서 가족은 타자의 시간을 통과하며, 상처의 기억이 만든 경계를 잠시 느슨하게 만들고 마침내 환대라는 몸짓에 이른다. 식민주의는 힘의 격차와 문명의 위계를 근간으로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관계를 비대칭적인 것으로 만들어 차별하고 착취하는 체계이다. 그 비대칭성의 폭력은 물리적인 폭력 이상으로 강력한 상흔을 남기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식민지 트라우마’라 불리기도 한다. ‘취약함의 정신사’는 바로 그 트라우마적 주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은 한국의 지성사를 사로잡고 있는 그 식민의 트라우마에 주목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포스트식민 주체들’의 정신사적 투쟁의 궤적을 따라간다. 요컨대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구축했던 막대한 학술적 담론들은, 서구적 근대성과의 쟁투 속에서 벌인 탈식민의 정신사적 궤적을 반영하는 ‘숭고함의 서사들’이다. 그들은 식민과 냉전, 격렬한 근대화 과정이 만들어낸 비대칭성의 분열을 아우르는 거대한 대칭성의 종합을 학술적으로 담론화하였으며, 그것이 곧 ‘숭고함의 서사’를 세우는 일이었다.
예컨대 이어령의 기호학과 우물 파기, 김윤식의 초인적 읽고 쓰기, 김용운의 원형과 중립, 조동일의 생극과 대등, 최원식의 회통과 겹눈, 정재서의 해체 신화학, 백영서의 동아시아와 사회인문학, 김종철의 공생공락, 김지하의 화엄 역학과 흰 그늘, 김용옥의 번역(동양학), 정수일의 문명교류학과 범지구적 보편문명,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 함재봉의 전통과 현대의 융합은 분열과 파열, 어긋남과 결여라는 그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칭성의 관념적 장치들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균열을 봉합하려는 그 필사적 도약은 봉합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실패의 증례이기도 했다. 숭고한 대상은 정신의 결핍과 결여를 채우는 관념의 대체물이자 환상이다. 그것은 모순과 간극, 구멍과 틈새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기에 숭고하다. 숭고는 결핍을 봉합하려는 도약이었지만, 바로 그 봉합의 자국에서 취약함이 새어 나온다. 저자는 그 누출을 흠결로만 판정하지 않고, 타자를 통과한 흔적이자 다시 관계를 배치할 여백으로 읽는다. 또 저자 전성욱은 그 실패한 숭고를 비평하며 그들이 통과했던 타자성의 흔적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취약함 또한 마주하게 된다고 고백한다. 즉 이 책은 타자들을 매개하는 긴 우회 끝에 숭고를 좇는 욕망이 어떻게 취약함을 드러내고 또 갱신의 여백으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타자와의 마찰이 남긴 상처를 지워버리기보다 그것을 견디고 공유하는 길(양영희의 다큐가 환대로 보여준 그 방식)을 비평의 언어로 옮겨오는 작업이기도 하다.

취약함은 갱신을 가능하게 하는 생성의 여백
『취약함의 정신사, 숭고함의 서사들』은 취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하면서, 취약함을 “단지 고통스런 결핍”이 아니라 “갱신을 가능하게 하는 생성의 여백”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근대화의 시간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은 그 결핍을 채우는 것을 진보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방으로 오해해 왔다. 특히 식민과 냉전, 개발근대화의 역사에서 비서구의 주체는 “서구적 근대화로서의 문명화”라는 성장서사 속으로 끌려 들어가 세계로부터의 인정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 인정은 유럽이라는 문명화의 척도, 즉 그 대타자로부터 자기 존재를 승인받는 정신적 과정이다. 이는 생존을 건 필사적인 도약이었고, 한국의 근대는 파국적 생존 위기를 벗어나려는 생존의 꿈으로 특징지어진다. 저자에게 취약함은 바로 이처럼 비교와 인정투쟁, 열등감과 모멸감, ‘뒤처짐’의 수치가 만들어내는 상흔의 조건이며, 그 상흔이 담론을 통해 어떻게 봉합되려 하는지, 그리고 왜 그 봉합이 다시 균열을 생산하는지를 드러내는 낱말이다.
취약함은 곧바로 숭고함의 서사를 호출한다. “주체의 결핍은 때때로 자기 증명의 욕망으로 비등”하고, “취약함의 주체는 숭고함의 서사를 통해서 자기의 결핍을 메우려고” 한다. 민족, 국가, 아시아, 세계 같은 거대한 기표들은 “남근의 결여를 대리해서 보충하는 형이상학적인 생산물”이 된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지젝)처럼 어떠한 본질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그 형이상학적인 구멍과 결여를 그럴듯하게 봉합해 놓은 환상이다. 저자는 숭고함의 환상을 ‘극복’하려는 체계화된 거대서사 대신, 일상생활의 구체적 삶과 접속하는 방향을 강조한다. 이 책에서 취약함은 근대화의 분리나 정화를 넘어 생태화의 연결이나 혼합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턱(liminality)이자, 지름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겪어냄으로써만 견뎌낼 수 있는 우회의 힘을 요구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란 무엇이었고 무엇일 수 있는가
저자에 따르면 이어령, 김용운, 김윤식, 조동일, 김지하, 최원식, 백영서 등 한국의 포스트식민 남성 엘리트들이 동아시아를 말했던 것은, 그것이 “정체성의 명명들이 흔히 그러한 것처럼” 행위자의 욕망과 정치적 무의식이 투사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부제를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정치적 무의식”이라고 달았다. 식민과 냉전, 개발근대화와 분단의 시간을 통과한 포스트식민 주체에게 ‘세계’는 경험 가능한 물리적 현실이라기보다 취약한 주체가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으로 작동하기 쉬웠다. 그 세계로부터의 ‘인정’을 향한 집착은 늘 비교, 열등감, 모멸감의 상흔을 남겼다. 그래서 이들은 ‘민족’이라는 로컬만으로도, ‘세계’라는 글로벌만으로도 감당되지 않는 그 어긋남을 매개할 중간항을 필요로 했다. 동아시아(리저널)는 글로벌과 로컬 사이의 자리로 호출되었다. 그렇게 동아시아 담론은 모든 불화와 충돌을 너그럽게 포괄하고 끌어안는 중도, 즉 대칭성의 사상으로서, 대립과 모순의 급진적 지양을 강조하는 헤겔식 사유형식에 대한 극복의 모색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담론의 구축에는 구조와 체계라는 관념의 집을 세우겠다는 남근적인 강박이 작동하고 있었다. 민족, 동아시아, 세계라는 거대한 대상을 향한 체계화의 욕망은 유독 남성(적인) 학인들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거대한 이론을 세우려는 그 근대주의적 의욕은 마치 남근의 우악스러운 발기처럼 가부장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여성적 관점과 생태적 관점은 동아시아 담론에 있어 그런 과시적 체계화의 의욕을 비판적으로 비평하는 중요한 시각이 될 수 있다. 예컨대 김혜순의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근대화의 폭력에 대응하는 생태화의 한 방식으로서 아시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아시아가 하나의 실체나 정합적 이론이기보다 생생한 피부감각이나 생활감정으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저자가 요청하는 동아시아는 모호함을 명료함의 결여로 취급하며 순수한 체계로 환원하는 근대적 욕망을 거부하고, 오히려 분리 및 정화의 ‘근대화’를 넘어 연결 및 혼합의 ‘생태화’로 가는 문턱으로서의 동아시아, 즉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찬 탈영역적인 교통의 장”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자리에 가깝다. 동아시아는 타자와의 마찰과 균열을 통과하며 스스로를 갱신하는 우회의 장소여야 한다. 동아시아를 ‘해결된 이름’으로 쓰는 순간 그것은 숭고의 봉합이 되지만 동아시아를 ‘하기’로, 우발적 접속과 책임의 윤리,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배치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관계로 붙들 때 그것은 취약함을 갱신의 여백으로 바꾸는 사유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무의식의 세 장면 : 이어령, 김윤식, 김영민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지성사의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을 ‘포스트식민 남성 엘리트’라는 관점에서 비평한다. 이어령, 김용운, 함재봉, 조동일, 정재서, 최원식, 백영서, 김윤식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서 책의 문제의식이 응축되어 드러나는 이어령, 김윤식, 김영민 세 사람을 사례로, ‘취약함’이 어떻게 자기서사(혹은 담론의 체계)로 조직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숭고의 언어를 낳거나 비켜서는지 차례로 살펴보자.

랑가주의 자장 안에서 - 이어령의 일본문화론
이어령을 다루는 장 「랑가주의 자장 안에서 - 이어령의 일본문화론」은 한 개인의 연대기와 식민과 탈식민, 전쟁과 전후, 근대와 탈근대가 교차하는 격동의 한국사가 어떻게 겹치는지를 먼저 짚으며 시작한다. 저자는 이어령의 방대한 말과 글을 단순한 업적의 규모가 아니라, 결핍과 균열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작동한 환상의 생산으로 읽는다.
이어령에게 어머니와 외갓집은 문학의 기원인 동시에, 가부장적인 호적의 언어와 아버지의 언어가 강제한 규율을 우회하려는 상상적 장치였다. 호적상의 나이와 실제 나이의 불일치, 조선어 금지와 일본어 주입, 해방 직전 어머니의 죽음 같은 사건들은 ‘실존의 인간’을 ‘행정상의 국민’으로 등록시키는 폭력의 흔적으로 남고, 그 틈을 이어령은 사후적 기억을 유기적으로 재가공해 성장 서사로 봉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