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아포칼립스 2 : 주류성 및 탄현은 어디인가?

백제 아포칼립스 2 : 주류성 및 탄현은 어디인가?

$23.83
저자

서동인

저자:서동인

저자는오랜세월,우리의역사그중에서도한국고대사를깊이연구해왔다.한국만이아니라중국의고대사에도각별한관심을갖고있는저자는역사전문연구자이자작가로서다음과같은저서들을펴냈다.



『흉노인김씨의나라가야』(2011)

『신안보물선의마지막대항해』(2014)

『조선의거짓말』-대마도,그진실은무엇인가?(2015)

『미완의제국가야』(2017)

『영원한제국가야』(2017)

『병자년남한산성항전일기』(번역서,2018)

백제사최대의비밀,1360년만에풀었다

-『백제아포칼립스1』-백강과기벌포는어디인가?(2023)

-『백제아포칼립스2』-주류성및탄현은어디인가?(2023)

목차

Ⅰ부,주류성은어디인가?

1.충남지방백제지명(地名)에숨겨진비밀코드
-당군의첫도착지‘소정방섬’소야도(蘇爺島)
-나당군이7월12일중에격파한부여파진산의백제수비군
-‘승적(勝敵)’이란지명에스며있는백제인들의항전흔적들
-당군의첫백제상륙지,당진자래현(子來縣)

2.탄현은어디인가?
-탄현에대한여러가지견해들
-침현과탄현같은지명인가,다른이름인가?
-『고려사』·『삼국유사』가전하는탄현과탄령
-조선의지리서들이기록한탄현은실체가없다!
-조선의기록대로면진안주천면싸리재가탄현일수있어
-금산남이면의‘백령치’는탄현일수없어
-운주쑥고개탄현설의또다른문제점들
-쑥고개의한자명은애현(艾峴),숯고개는탄현
-탄현은진산교촌리숯고개,침현은진산막현리고개

3.주류성의실체와의미그리고그위치에대하여
-‘周留城’의백제향찰및한자의미서로달라
-周留城은백제향찰‘두루기’,豆率城은신라향찰두루성(두루기)

4.전씨아미타불비상과삼존천불비상
-주류성의백제유민들불상을봉헌하다
1)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2)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5.구마노리성과여자진(余自進)의부흥운동
-익산금마면동고도리의성이구마노리성일것
-대관사괴변기사는김춘추의죽음과관련있어

6.두량윤성(豆良尹城)은어디인가?
-두량윤성에대한몇몇연구자들의견해
-두량윤성은어디에있었나?
-고사비성및두량윤성전투에서백제군의승리
-두릉이성의‘두릉이’는백제어‘두렝이’의향찰표기
-두릉윤성과두량윤성의윤성(尹城)은무엇인가?

7.고사비성은어디인가?
-고사비성은백제소비포현의현성(縣城)이었을것
-좌평정무(正武)의부흥운동과두시원악

8.전의주류성은부흥백제의왕성,북부의중심은목천
-주류성에대한여러기록
-서부임존성과북부주류성은북방성관할지역
-백제온조왕의십신과천안전씨설화
-백제멸망후천안전씨들함경도단천으로사민된듯

9.주류성은어디인가?
-주류성에관한제설(諸說)의문제점들
-그렇다면주류성은어디인가?

10.피성(避城)은어디인가?

Ⅱ부.백제멸망기인물열전

1.사비도성함락과함께일어선부흥운동지도자들
1)부여풍(扶餘豊)
2)부여용(扶餘勇)
3)흑치상지(黑齒常之)
4)사타상여(沙相如)
5)복신(福信)
6)도침(道琛)
7)여자진(餘自進)
8)규해(解)
9)정무(正武)

2.부여풍은언제부흥백제국의왕이되었나?
-소정방의철군직후~1차사비성공격이전에왕에추대돼
-백제부흥군,663년7월에도사비성공격한듯
-백제부흥군,1차사비성공격때두차례나공성전벌여
-부여풍국왕추대관련『일본서기』기록믿을수없어

3.천안병천전투에서전사한신라화랑기파랑(耆婆郞)과은석사설화

4.웅진방령예씨일가의배신과의자왕의항복
-웅진방령예군,웅진성대장(방좌)예식진의배신
-예군·예식진-예소사-예인수묘지명내용대략같아
-수왕조말에예군·예식진의아비예선이백제로망명
-백제멸망후예군은‘웅진도독부사마’,예식진은동명주자사지내

5.묘지명으로보는부여륭(扶餘隆)의생애

6.여러기록으로보는흑치상지의생애

7.진법자묘지명으로본백제의관직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한국고대사의비밀‘1360년만에풀었다!

백제인들의구국운동중심이었던백강및기벌포와주류성의위치를찾는일은백제사복원에중요한핵심사항이다.백제말기에백제·왜·고구려‘남북’연합군이신라·당‘동서’연합군을상대로최후의결전을벌인백강(白江,=기벌포)해전과‘부흥백제’의왕성이자부흥운동의중심이었던주류성에서의패전은삼국시대를마감하는신호탄이었다.남북및동서두연합의교차점(십자연합)에서발생한대규모충돌은한국고대사의방향을완전히바꿔버렸다.660년나당군에게사비성이함락되고,의자왕과지배층대다수가포로로잡혀간뒤로3년여에걸쳐가열차게진행된백제인들의구국운동은백강해전패배에이어주류성과임존성이함락됨으로써허망하게끝나고말았지만,특히주류성과임존성·가림성(성흥산성)은나라를되살리려는백제인들의구국의지와항전활동을대표하는장소였다.그중에서도주류성과기벌포는백제부흥운동에서그만큼중요한위치를차지한다.그럼에도백제가나당군을상대로해전을벌인기벌포(백강)와주류성이어디인지는지금껏아무도모르고있다.

자료에대한철저한분석과다양한분야의지식,그리고그것을바탕으로한합리적인상상력과추리력이절대적으로필요한분야가고대사이다.한국과중국에전하는기본자료만이라도제대로이해하고,올바르게분석했더라면그간의부끄러운결과는면했을것이다.『구당서』·『신당서』와같은전쟁당사자인당唐의1차사료만이라도제대로들여다보고이해했더라면백강과주류성을적어도충남북부권에서찾으려고노력했을것이다.그런기본적인노력조차없었기에일제강점기에일본인들이이땅에들어와서내세운전북만경강또는동진강백강설이나전북주류성설과같은엉터리가설을진작에청산하지못한것이다.백강(기벌포)과주류성이지금의금강하류로부터전북지역어딘가에있었다는일본인들의주장은허구이다.그들의허무맹랑한주장을맹종하여그안에서허우적거리다보니백강이지금의충남당진시우강면남원포일대이고,주류성이충남세종시전의에있었다는사실을알아내지못한것이다.

저자가백강(기벌포)과주류성의위치를찾기위해충남북및전북지역에서는빼놓은곳이별로없을만큼많은곳을두루답사하였다.하지만그처럼샅샅이뒤지는답사가별도움이안되는일이었음을깨달은것은향찰(鄕札)과지명에대한이해가이루어진뒤였다.기본적인문헌자료를바탕으로우리말과향찰로해독하면기벌포및주류성을쉽게알수있는일이었다.그래서지명과한국고대어,각지역의필요한방언을추가로조사하였다.기호지방의방언가운데상당수가백제어또는그이전마한어일수있다는가정하에그지역방언이신라어와다른점은무엇이며,그것이향찰에어떻게반영되었을까하는것까지탐구하였다.가는곳마다지명에얽힌내력도뒤져야했고,『삼국사기』지리지를비롯하여조선시대의각종지리서도빠트리지않았다.

마지막으로백강및주류성이어디인가하는문제를연구하면서저자가중점을두었던몇가지사항들을정리하여제시해둔다.
▲백제사에서왜백강(기벌포)·주류성이그토록중요한문제인가?
백제가당과신라를상대로한마지막구국전쟁을주류성과임존성에서시작했고,백강(기벌포)해전에서의패전으로백제인들의구국운동(부흥운동)은실패로끝났다.그러므로부흥운동의중심지였던기벌포(백강)및주류성의위치와그곳에서의당시상황을정확히알아야부활을꿈꾼백제인들의항전활동과구국운동이패망에이른과정을선명하게복원할수있다.

▲왜일본인들은백강(기벌포)·주류성을전북지역에서찾으려했는가?
일본인들은중국과한국의관련기록을제대로들여다보지않은채,막연한추측에서이문제에접근하였다.정확한자료와증거를제쳐두고단순한상상만으로전북지역에서백강·주류성을찾으려했던것이다.그런데도어찌된일인지우리의연구자들은일본인들의역사인식을추종하여스스로발목에족쇄를채우고말았다.1백여년전일본인들이세운가설을그대로이어가려애쓰는이들이지금도있다.무엇보다도한·중·일삼국의관련자료를제대로들여다보지않은것이큰문제였다.백강을지금의금강하구로부터전북서부권(김제·부안)의만경강이나동진강으로,주류성은부안~정읍등의전북지역에있을것이라는일본인들의주장은근거가없는허구다.연구자로서기본자질이부족한자들이남의나라에들어와온통혼란을불렀다.그럼에도그에대한근본적인의문조차제기하지않고맹목적으로그들의견해를추종한국내연구자들이있었다.

▲당군과신라군은어디로먼저들어왔는가?
중국기록에당군은덕물도(덕적도)로들어온것으로되어있다.그러나실제로는소야도가당군의첫주둔지였다.거기서당군은어디를최초의공략지점으로삼았는가하는점이중요하다.간단히정리하면당군은소야도에서좌군과우군두진영으로나누어좌군은당진으로,우군은웅진강(금강)하구의부여로들어갔다.따라서당군과신라군의침입초기전장은①당진백강②웅진강하구③황산벌세군데에형성되었다.웅진강으로들어간우군은세도면반조원리에상륙했다가그맞은편으로옮겨가서석성면봉정리일대를주둔지로삼았다.같은날비슷한시각에황산벌로들어간김유신의신라군은계백군대와싸우느라10일까지황산벌에묶여있어야했다.신라및당연합군은7월12일에야가까운부여석성면지역에서사비도성을향해진군하였다.

▲당군의웅진강상륙시간은언제일까?
소정방과그가거느린우군은660년7월9일(음력)아침조금의오름물때(들물)에맞춰금강(웅진강)으로거슬러올라왔다.그날아침바닷물이불어나는이른시간에반조원리및고다진으로상륙하였다.그러므로군산항조석표를기준으로바다물때를계산하면당군이상륙한시간을정확히계산해낼수있다.그에따르면소정방의상륙시간은7월9일오전9시~10시전후였다.그리고그날저녁(오후6~7시이후)무렵,두번째오름물때에맞춰건너편석성면봉정리일대로상륙을재개하였다.이렇게해서소정방과당군은신라군과의약속대로7월9~10일(무쉬물때)사비성남쪽20리지점으로부터30리사이의10리범위에집결하였다.

▲기벌포(백강)를추적하는데가장중요한열쇠는향찰과고대어였다.
향찰및지명과한국고대어(백제어)로써기벌포(백강)의위치를분석해냈다.한국고대어가한자지명으로바뀌어가는과정에주목하여기벌포는현재의삽교호내수면인당진시우강면부장리남원포임을밝혔다.남원포옆강문리가옛백강구(白江口)였고,거기서상류로합덕읍구만리일대까지가기벌포및백강의범위였을것으로추정하였다.그리고백강은지금의삽교천이었다.이런것들을해독하는데가장중요한열쇠는한국고대어와향찰이었다.

▲주류성(周留城)은전성(全城),‘백제인이두루머무는성’을의미
주류성(周留城)을향찰로풀면전성(全城),전기(全?)그리고한자본래의뜻으로는‘백제인이두루머무는성’이다.주류성이바로부흥백제의수도에있던성이었다.예산임존성과마찬가지로주류성(운주산성)은최후의항전성으로그곳엔부흥백제국의왕부여풍의군지휘부가상주하였을것이다.그간에는향찰연구가부족했으므로지명에얽혀있는암호를해독하지못하였다.저자는현재의운주산성(충남세종시전동면)을주류성으로확정하였다.다만부여풍과부흥운동지도자들은운주산성입구의미곡리일대나지금의전의읍읍성을포함한평지어딘가에거주하였을것이다.

▲한·중의일차사료를주의깊게보지않은게문제였다.
당시임존성은서부의중심이었고,주류성은북부에있는부흥백제의왕성이었다.해당지역들을서부와북부로설명한한·중의기록을잘살펴보았더라면전북지방에서백강과주류성을찾는무지한일은없었을것이다.물론백제부흥을위한구국운동을벌이기전에는북부의중심은오히려목천이나지금의청주지방이었을것이다.그러나당시의조건에서부흥운동에가장적합한요충이주류성이었으므로목천과주류성을최후의저지선으로택했을것이다.나아가『삼국사기』문무왕답설인귀서의“남방이평정되고나니군대를돌려북쪽을쳤다”(南方已定回軍北伐)는내용과‘북부주류성’이란기록을정확히이해했더라면최소한사비시대백제북방지역으로서웅진방령(=북방성방령)의관할지인북부에서주류성을찾는시도는하였을것이다.그러나아무도그것을파악하지못했고그런시도자체가없었다.그것이바로아무도관련기사를제대로읽지도않았고주목하지도않았다는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