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청나라,당나라,송나라,한나라역대황제평전’에이은여섯번째시리즈
역사상가장강력한대제국을건국했으나,채100년을버티지못하고초원으로사라졌다.
원말,기황후를비롯한고려사람들이원나라정치경제문화의중심으로우뚝서다
이책은역사자료에근거하여원나라황제12명의통치시대에어떤역사적사건들이일어났는지살펴봄으로써역사의교훈을얻고자한다.과거에만머물러있는역사는박물관의먼지쌓인골동품에불과하다.역사는현재진행형이며미래에대한예측이다.역사에서교훈을얻음으로써현재를바로잡고미래를열어가는것이다.또원나라황제들의공적과과오를평가함으로써오늘날지도자가어떠한덕목과리더십을갖추어야하는지이해할수있다.
칭기즈칸의손자이자몽골제국의제5대카안인쿠빌라이는마침내중국을통일하고원나라를건국했다.원나라는몽골역사의일부이자중국역사의일부이기도하다.몽골족의관점에서볼때그들은한족이세운송나라를멸망시키고중국대륙의지배자이자주인이되었다.반면에오랜세월동안중원지방을중심으로역대봉건왕조를세웠던한족은소수민족인몽골족에게국권과영토를빼앗기고피지배층으로전락했다.따라서원나라는몽골역사의전성기에해당하지만,한족에게는심각한고난을겪게한시련의시기였다.
또중국역사의관점에서보면원나라는유목민족이처음으로농경민족인한족을정복하고건국한대제국이다.문명수준과경제력에서한족에게크게열세였으며심지어문자조차없었던몽골족은앞서언급한장점들을극대화하여중국천하를통일한것이다.원나라의영토는4대칸국을포함했으며,황제는4대칸국의칸을통제하는카안이었다.그런데시간이흐를수록4대칸국은원나라와형식적인주종관계를맺고독립국으로발전했다.이에따라원나라황제의통치권은중국과그주변국가에한정되었다.원나라의역대황제들은인구수가가장많고피지배층인한족을어떻게통치해야할지심각하게고민했다.이는소수의유목민족이다수의농경민족을다루는문제이기도했다.원세조쿠빌라이는한족의법률과제도를수용하고유가사상을존중하며유학자들을등용함으로써한족을원나라의통치에순응하게했다.원세조이후역대황제들은조종(祖宗)의법도를받들어대제국을다스렸다.
하지만원나라는건국한지97년만에다시북방의초원으로쫓겨났다.어째서원나라는백년도못되어중국에서지배권을상실했을까.
첫째,원나라는건국초기부터한족문명에동화된몽골인과한족출신유학자들로구성된한법파(漢法派)와몽골의귀족세력간의갈등이잠재되어있었다.한법파는한족의법률과제도로국가를다스림으로써원나라가역대한족왕조의정통성을계승하고자했다.그들은유가사상을치국(治國)의도(道)로삼았으며한족왕조의흥망성쇠에서역사적교훈을얻고자했다.반면에몽골의귀족세력은몽골족이유목민족으로서의정체성(正體性)을고수해야한다고생각했다.그들은원나라황실과조정이한족문명의영향을받는것을싫어했다.왜냐하면한족의법률과제도는몽골족의전통과관습에맞지않으며,한인(漢人)은착취의대상이지몽골인과동급이아니라고생각했기때문이다.한법파와몽골의귀족세력은정국의주도권을놓고사사건건대립했다.특히황제를추대하는일에서는양대세력이충돌하여내전을벌이기도했다.한법파에의하여추대된황제들은지방군벌로성장한귀족세력을제대로통제하지못했다.
둘째,원나라의황제들은유목민족의‘퍼주기습관’을버리지못했다.공동체의식이엄청나게강했던몽골족은자력으로생산한물건이나약탈한재물은반드시나누어가지는전통이있었다.원세조는정해진규정에따라신하들에게재화를하사했지만,원세조이후의황제들은기분내키는대로국고에비축한재화를아낌없이방출하고흥청망청낭비했다.그결과원나라는건국초기부터심각한재정난에시달렸다.재정난을타개하고자화폐개혁을단행했으나오히려통화팽창으로인해원나라말기에이르러민생경제가붕괴하고말았다.
셋째,티베트불교(라마교)의폐단이심각했다.티베트불교가원나라의국교가된이후에역대황제들은티베트불교의최고지도자를제사(帝師)로모시고극진하게예우했다.그들은불사(佛事)를황제의절대적권위를드러내는수단으로활용했다.전국의명산대찰은말할것도없고,황궁의수많은사찰에서도수시로불사를벌였다.불사를열때마다막대한재화와인력이필요했다.또승려들은현실정치에개입하여온갖비리를저질렀으며심각한민폐를끼쳤다.원나라는불교때문에망했다는얘기가있을정도였다.
넷째,원나라의지배계급은한족을거칠게다루었다.한족출신유학자들이등용되어국정에참여했지만,국정에참여한한족은극소수였다.한때과거제를실시하여한족지식인들의벼슬길을열어주었지만,이것도아주드물었다.유학을배우는유생은신분이기생보다낮고거지보다높은정도였다.원나라조정은시대에따라한족은창과칼,말,철제도구등무기로전용될수있는것들을소유하지못하게했다.원나라말기에이르러한인과남인의반란이끊이질않았던이유는이러한민족차별정책때문이었다.몽골족의한족에대한차별과박해는결과적으로원나라의수명을단축하였다.
그런데역사적관점에서몽골족의원나라와만주족(여진족)의청나라를비교해보면,몽골족이정체성을잃지않고한족문명에완전히동화되지않았기때문에오늘날몽골국가가존재하는것이라고본다.반면에만주족은청나라를건국하고스스로한족문명에동화되는길을걸었다.오늘날중국에서만주족은소수민족으로존재한다.하지만그들은이미고유의언어와문화를상실했으며,성씨도한족성씨로바꾸어완전히한족으로동화되고말았다.원나라도한법파가국정의주도세력으로뿌리를내렸다면청나라와같은운명이되지않았을까.
원나라는고려와도불가분의역사관계를맺었다.13∼14세기에몽골제국의군대는천하무적이었다.칭기즈칸과그의후예들은천리마를타고각국의성읍을유린했다.그런데그들의공성전략은의외로간단했다.항복하면생존권과자치권을보장해주고,저항하면씨를말렸다.그들에게저항하다가멸절된민족도있었다.그런데고려의대몽항쟁은무려42년동안지속되었다.결국고려는원나라에굴복하여신하를칭했지만,종묘사직을지켰다.인구등모든면에서원나라와비교하여조족지혈이었던고려가어떻게국권을지킬수있었을까.고구려의상무정신을이어받지않았다면불가능했을것이다.원세조는고려가사신을보내자신을황제로받들어모시겠다는얘기를듣고극도로흥분했다.천하의당태종이세민도고구려를굴복시키지못했는데마침내자기가고려국왕을신하로삼았다는기쁨이었다.
그는원나라를건국하는과정에서고려의복속을정치적자산으로삼았다.또고려왕을사위로삼고고려를부마국으로특별대우했다.고려는명분을양보하고실리를택했다.원나라조정에는고려출신환관,후궁들이많았다.그들중에는황제의총애를받아고위관리가되어조정의실세가되거나황후가된인물이있었다.기황후가대표적인인물이다.원나라후기에이르러그녀와고려출신환관들이사실상원나라를간접통치했다.우리나라의역사인물중에서중국을다스린유일한인물은기황후였다.또중국에최초로‘한류’를전파한사람들도그녀와고려출신환관,궁녀들이었다.고려와원나라의관계사를천착하면고려가얼마나대단한‘강소국’이었으며,또어떤실리적외교전을펼쳤는지미루어짐작할수있다.
본서는『원사(元史)』등역사서의내용을근거로역대황제들을중심으로원나라역사를개괄적으로기술했다.역사서에따라같은역사적사건이조금다르게기록된부분이적지않다.필자는여러자료를비교,분석하여객관적으로기술했다.또난해한한문을가능한한쉬운한글로풀어써한문이낯선세대에게조금이나마도움이되고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