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왕은 누구인가? : 역사의 대척점에 선 형제, 부여융과 부여풍

백제의 마지막 왕은 누구인가? : 역사의 대척점에 선 형제, 부여융과 부여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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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백제 왕자로 태어났지만, 당나라 편에 선 형 부여융과
왜의 편에서 백제를 되살리려 한 동생 부여풍의 굴곡진 운명과 7세기 국제정세
격동하는 동아시아의 거친 파고 속에서,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과 풍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폐태자 되거나 왜로 보내졌었다. 이후 나라의 멸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은 다시 융과 풍을 시대의 깊은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었다. 당에 의해, 그리고 또 왜에 의해 두 사람은 백제의 마지막 운명을 걸머진 채로 굴곡진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폐태자 되었지만, 체념한 채로 왕자로서 평범하게 살았던 융이었다. 일본열도의 미와산에서 벌통을 갖다 놓고
기르는 등 유유자적하던 풍이었다. 융과 풍 모두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국제질서 재편 속에서 스러진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융왕과 풍왕의 고뇌는 신냉전체제로 재편되는 21세기의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화두이다.
저자

이도학

저자: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융합고고학과명예교수.
문화재청한국전통문화대학교문화유산대학학장과일반대학원원장역임.고조선단군학회회장,동아시아고대학회회장,동국사학회회장,한국연구재단전문위원,문화재청고도보존중앙심의위원회위원,한국전통문화대학교부설역사문화연구소소장,한성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위원장,충청남도문화재위원,부여군지역혁신협의회의장,연세대와한양대강사등역임.대통령표창(제181011호)수상.
〈저서〉
『쉽고도어려운한국고대사』,『나의연구회상―고투와약진45년』,『백제사신연구』,『후백제사연구』.『한국고대사최대쟁점,백제요서경략』,『고구려도성과왕릉,』『새롭게해석한광개토왕릉비문』,『무녕왕과무령왕릉』,『분석고대한국사』,『쟁점,한국고대사그해답을찾다』등36권.
〈논문〉
「신라의中原지역진출과娘城·娘臂城의考證」,「백제의마한병합과정과영암내동리쌍무덤」,「후백제의건국과정과‘始都光州’」,「풍석이종학의신라해양사연구업적」,「虎巖寺址위치에관한논의」등286편.

목차


머리말

1.무왕시대의융과풍
부여융의출생과백제기년법
부여풍의출생
무왕은누구인가
국제결혼은어떻게가능했는가
익산왕도
익산에소재한‘궁남지’
미륵의세상,그리고낙토로가는이상향

2.의자왕시대의융과풍
의자왕의등장
부여융의등장
「부여융묘지」
정변과부여융
비운의폐태자융
의자왕의남은5년,음황과탐락의세월
패망과의자왕의책임
백제최후의날,공산성과예씨?氏일가의동향
예식과예식진은동일인물인가?
백제멸망당시예식진·예군행적
의자왕이항복한이유

3.멸망을막으려는공주
미녀공주의등장
여성전사戰士의전형
계산공주설화는구전인가?

4.국가회복을위한융과풍
거인,세상을건너가다
의자왕대에대한평가
‘부흥운동’용어
융과풍왕정권의성격
구국의영웅복신
승려출신의병장도침
풍왕의환국
풍과융사이에서고뇌하는흑치상지
「흑치상지묘지」
백제지원위한왜의동향
고구려는백제를지원했는가?
내분의폭발
흑치상지의향배

5.백강과주류성위치
연구사백강비정
연구사주류성비정
주류성위치
백강과주류성위치비정의관건

6.지자체의지역정체성확인
홍성군
당진시
서천군
청양군
세종시
정읍시
부안군

7.동아시아대전大戰,백강전투
백강전투가지닌의미
백강해전과백제군·왜군의참담한패배
백강구전투의승패요인
행방이묘연했던풍왕
백제인들최후의항전

8.백제옛땅의융왕과고구려에서의풍왕
웅진도독부의귀속문제
한반도내웅진도독부의해체시점

9.당에서재건된백제
‘내번內蕃백제’
풍왕의마지막모습과유배지기원설……219

10.한반도백제유민들의동향,그리고에필로그
세종시연기지역유민들의동향
만들어진제의祭儀,은산별신제

에필로그
참고문헌
색인

출판사 서평

융을수반으로한친당정권과풍을왕으로한친왜정권이백강전투에서맞붙었다.
주류성마저함락된후형제의운명은끝내승자와패자로갈려역사속으로사라졌다.

‘서로라이벌’이라는말을흔히사용하거나듣고있다.라이벌의사전적의미는‘같은분야에서또는같은목적을위해서로경쟁하는사람’을가리킨다.‘역사상의라이벌’이라는용어도흔하게사용해왔다.동일한목적을지녔지만서로대척점에섰던백제의자왕의두아들만한라이벌이있었을까?

부여융과부여풍은모두의자왕의아들이었다.7세기후반동아시아의정치질서가재편되는급변기를맞아끊임없이부침을거듭했던두왕자의인생행로는굴곡그자체였다.백제사신단의수석인23세미남청년융은‘대당大唐’의궁정을밟았다.압도하는제궐帝闕의웅위한모습,천하의영걸이자노회한태종알현과휘황한채색비단3천단을하사받고득의에차서귀국선에몸을실었던순간은,환희와감격그자체였을것이다.그가생을마감할때까지도뇌리에서지워지지않았을영광스러운장면이었음이분명했다.융이친당親唐의길을걸었고,당에서생을마감한것은어쩌면예정된숙명이었는지도모르겠다.그와대척되는삶을살았던자신의아우가풍이었다.풍은어린시절왜로파견되었다.풍은왜에서의생활에익숙해져있었다.그는631년에서661년까지어언30년,한세대동안왜에서체류하였다.

백제가의식하지않을수없었고,또책봉을요청해야할주체요영향력이극대한중원의당제국,그리고전통우방이왜였다.융과풍은백제가절대홀시할수없는두나라체험을각각한것이다.풍의경우는귀국하지못하고왜에서한세대를내리살았다.풍은왜에체류하는중에딸을낳았다.이때가647년이었으니,풍의배우자는왜녀倭女일가능성을배제할수없다.즉위와관련해그가661년환국할때왜녀를왕비로맞아들였었다.660년7월,신라와당의합공合攻이라는사변은,태평성대를구가하던백제왕실로서는청천벽력같은날벼락이었다.사비도성이함락되었을때폐태자되어정치적으로영락해있던융은,훗날신라문무왕이되는김법민태자로부터침세례를받았다.신라의백제정벌직접동기인대야성참극에대한복수였다.법민태자는한때백제2인자였던융에게묵은원한을뱉은것이다.이때의처참한상황은신라트라우마를융의가슴에깊이새겨놓았다.

당군은‘가짜를폐하고진짜를세운다.廢假立眞’를침공명분으로삼았던것같다.당군은의자왕의실정失政대신,두번째왕후은고를‘요녀妖女’로규정하면서악마화했다.그소생인‘태자효’를축출하고폐태자였던융을복권시켜주었다.그러면서‘망한것을일으키고끊어진것을잇는다.興亡繼絶’는명분으로백제재건을약속하였다.융을수반으로한친당정권을수립하고철수할계획이었다.그랬기에백제지방관들은선선히관款즉관인官印을일제히바쳤던것이다.

그러나의자왕에대한모욕과당군의만행이발단이되어도도하게항쟁의불길이번져갔다.당군의구상이흔들리는상황과연동해항전의불길은더욱거세게번져나갔다.백제인들은웅진성과사비도성을제외한백제전역의200여개성을회복했다.백제영역을거의회복한것이다.이와연계해왜의지원을받은풍이환국하였다.그는백제왕으로서신라군과당군을축출하고영토를수복해예전의백제를복구하는일에진력했다.무력을통한국가회복을택한것이다.

그런데백제땅에는풍과생각을같이하는이들만존재한것은아니었다.융을수반으로한친당정권과풍을왕으로한친왜정권이대치하였다.신라인들은풍을‘가짜왕’으로일컬으면서정권자체를인정하지않았다.반면신라인들의의지와는무관하게당의중재로융은신라상대역으로자리를잡았다.663년8월처절한백강전투현장에서융과풍은맞대치하였다.이싸움에서풍은구사일생으로고구려로탈출했다.주류성에남아있던풍의일족들은당군에넘겨졌다.풍왕이사라진백제땅은융의통치권이되었다.융은당의선의를믿고또대안으로당과손을잡아국가회복을모색하였다.그러나웅진도독융은신라에대한포비아가극심했다.신라의압박을받고있던그는결국당으로돌아갔다.백강전투를겪고5년후고구려평양성이무너지던날풍은당으로압송되었다.융과풍,이두사람은모두당으로들어갔다.친당정권의수반이었던융은일정한대우를받았지만,당과대척점에섰던풍은중국최남단으로유배보내졌다.그렇지만주류성함락때16세였던풍의딸은당의고관가문과의혼인을통해영예를누렸다.

역사의대척점에섰던두형제,이주제는필자가저서를비롯해논문으로자주발표했던사안이었지만,본서를집필하면서예전에간과했던쟁점관련자료를재해석해보완할수있었다.가령중국에서발견된백제유민묘지墓誌를집중분석함으로써,의자왕의항복과관련한예식?植과예식진?寔進은동일인물일수없는이유를보완했다.그리고예식이웅진성의의자왕을꽁꽁묶어사비성으로끌고갔다는주장은허구에불과했다.「예군묘지」에보이는“참제가하루아침에신하를칭하였고僭帝一旦稱臣”의‘참제’는,의자왕이아니라왜왕임을밝혔다.백강전투에서‘왜선1천척’은신라측의과장으로단정하지만,“1천척이나되는배가물결을가로질러들뱀을도우려고늘어져서가득했다”는「예군묘지」의‘1천척’과부합했다.중국측에서도,그것도『구당서』와같은중국사서보다앞선당대의금석문에서증언한것이다.이점을유의하지않을수없다.여기서‘들뱀’은백제를가리킨다.

백강전투와관련해당군의승리요인에대한많은추정이제기되었다.그런데중요한사실은백강전투는준비된싸움이아니었다.앞서간육군을따라군량을가득적재하고웅진강에서백강으로진입해주류성으로이동하려는당의수송선과백제를지원하기위해병력을실은왜의수송선이백강어구에서갑자기맞닥뜨려벌어진우발적인전투였다.군량과병력수송선간의전투에서,당군은군량선을호위하는수군이탑승한전함이따라왔기에단연우세할수밖에없었다.기존의연구에서는이점을역시간과한것이다.연구사가조선후기까지거슬러올라가는백강의소재지는주류성위치파악의관건이었다.백강이라는강주변에서주류성의위치를찾는게기본전제였다.그럼에도이러한대전제를홀시한경향이많지만,백강과연계되지않은주류성위치추적은무의미해지는것이다.이점안타깝게여기지않을수없었다.

그밖에자랑스러운우리나라의병운동발상지로서의미부여가가능한전적지가임존성이었다.백제의병들을위한사당을충절의고장인예산에건립했으면하는바람을지니게된다.실현되는날이반드시오기를바랄뿐이다.더러는임존성에서백제때유물이출토되지않았기에그위치를다른곳으로모색하기도한다.현재의임존성에는통일신라때유물만집중출토되었다.그러나예산봉수산의임존성(둘레약2.5km)은항전관련첫기록에서‘임사기산任射岐山’으로적혀있었다.임존성을‘성’이아니라‘산’이라고했고,책柵을설치한기록이보인다.이것을일러‘임존에보堡를쌓아’라고한것같다.그렇다면임존성은당초봉수산에책을설치해항전의기지로삼은게된다.주류성의위치파악과관련해물증제시만이능사가아님을환기시키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