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어주는남편>의감동이다시찾아온다.
건축가이자도시전문가인
허정도가추적하고재현하고상상해낸역작,<도시의얼굴들>
20세기초중반60여년의시간,
한반도남녘작은항구도시에남은16인의흔적을찾아떠나는도시이야기!
백석,천상병,나도향,김해랑,순종,김수환,김춘수,이극로,이원수,김명시,임화,지하련,옥기환,김주열,명도석,산장의여인…
“김선생님이무슨일로저를보자고했는지사실궁금했어요.”호텔커피숍에앉자마자그가대뜸말했다.전화에선이유를묻지않았는데곰곰이생각했던모양이다.“아,사실글을부탁할까싶어서요.”그는화들짝놀라며팔을저었다.“저에게요,허참.아시겠지만저는공돌이에요.공대출신이무슨글을씁니까?”그의말에는겸손이묻어났다.
난그가도시연구에얼마나매진했는지,<책읽어주는남편>에서그의문장이얼마나따뜻했는지를담담하게말했다.잠시침묵이흘렀고그가말했다.“시간을좀주실수있을까요.내좀생각해보고연락드렸으면해서요.”그의제안에난무한정기다릴수있다고했고,결심이서면언제든연락을달라고했다.도시이야기를,제대로된도시이야기를책으로만들고싶다고은근히강조하면서말이다.
3개월후그에게서연락이왔다.원고를써보겠다고.그로부터꼬박1년뒤정확히마감일에정갈한글이메일로날아왔다.책이시작됐다.
16명의인물로들려주는도시이야기
허정도,그는건축가이다.또한,지역신문사대표를지낸언론인이다.그래서인지그의글은담백하고군더더기없다.그의글을처음접했을때바람소리가들렸다.화려하고유려한문체는아니었지만간결하고명징한그의글에선초겨울갈대에서걱거리는바람소리가들렸다.
“글을쓰는내내,정해진시간이지나면떠나야하는인간의한정된삶을생각했다.때로는무거웠고때로는편안했다.”
저자가건축가여서이책이도시의건축에대한글일거라는추측은위험하다.허정도는일반의생각에허를찌른다.건축이아닌사람의이야기를넉살좋게풀어낸다.감수성과문장력으로무장한시인이나소설가처럼스토리를흥미롭게엮어간다.
어디그뿐인가.책에16명의인물을등장시켜그들의이야기에흠뻑빠지게하는가하면어느새읽는이로하여금건축과공간의한가운데에서있게한다.바로이지점에서건축가허정도의장점이유감없이발휘된다.그는마산이라는한도시의옛거리와장소,건축물들을각종지도와자료,문헌등을통해재구성하고하나하나복원해내는치밀함을보여준다.그런데정작글을읽는사람에겐전문적인연구의흔적은보이지않고이미알고있는익숙한이야기처럼친숙하게다가올뿐이다.
이책을읽는독자는마치20세기초중반마산이라는한도시의거리를걷는것처럼현장감을느낄것이다.마치타임슬립해서그시대그도시에살고있다는착각을불러일으킬정도다.
도시전문가가들려주는사람이야기
허정도는도시전문가이다.1991년당시13대국회의원이던노무현전대통령이저자가쓴<도시불량주거지재개발사업에대한조사연구>라는책을구하기위해직접전화를걸어마산까지사람을보냈다는일화는공공연히알려져있다.‘재개발’이라는과정에서도세입자를포함한전주민의재정착을위한‘사람사는세상’을고민한두사람의인연이주목된다.
이책에는모두16명의인물들이등장하여도시의다양한얼굴을보여준다.부부였던임화와지하련은함께묶어서전체열다섯꼭지로구성됐다.널리알려진인물들이대부분이고,생소한인물들도몇몇있다.그럼에도그들의삶과이야기의무게는결코가볍지않다.
시인백석처럼잠시이도시를스쳐간이도있고,옥기환,명도석,김해랑처럼평생마산이라는도시에서산이도있고,마산에서태어나고자라서대륙에서독립운동을한김명시도있고,계획된일로이도시를방문한순종,이극로,김수환추기경도있고,마산에서문학의터를닦은이원수,김춘수,천상병도있고,병으로이도시와인연을맺은나도향,임화,지하련,산장의여인도있고,열일곱살마지막엿새를마산에서보낸김주열도있다.
16인이머물렀던시간과장소,이유와행적은모두달랐다.저자는그다름을하나둘찾아내며그들이남긴행적을좇고,머물렀던장소를연결하고,사라졌거나흐릿한것을재현하고,짧은말과글로만남은것을복원하고,사이사이의빈틈을상상해냈다.훼손되고사라져서장소만남은것은화두처럼부여잡고숙성시켜세상에드러냈다.
주목할건한도시공간에서의행적뿐만아니라각인물의세부까지깊이들여다보고있다는점이다.브람스교향곡4번을유독좋아했던책벌레천상병,자신이좋아했던단가의거장이시카와다쿠보쿠의석(石)자를따와필명으로썼던백석,한자리에서70사발의주량을자랑했던나도향,독립지사명도석선생의넷째딸숙경을아내로맞은김춘수의마산생활,시골성당에서신자들에게화투놀이‘나이롱뽕’을즉석에서배워밤늦도록함께놀았던김수환추기경의뒷이야기까지들려준다.
다시살아난생생한도시풍경
일본인들에게마산은‘술과꽃의도시’였다고한다.저자는오늘날과다른도시풍경과지금까지이어지는도시풍경을과감없이보여준다.지금의진해보다더유명했던창원천벚꽃이야기,‘조선의나다자케’라부를정도로유명했던마산의명주이야기,하모니카를닮은귀환동포의집단거주지였던‘하모니카촌’이야기,“오동추야달이밝아오동동이냐동동주술타령이오동동이냐~”는가사처럼술이넘쳤고‘3?15의거’발원지였던오동동거리이야기,대구와부산은물론이고경부선특별열차로서울에서도찾던벚꽃의명소사쿠라마치라불리던문화동이야기들이끊임없이이어진다.
“백석은구마산역에처음왔던1936년1월과두번째였던2월에는낡고조그마한단층역사에서나왔고,12월말세번째왔을때는새로지은역을통했다.”
저자는또한상상한다.동시대를산인물들이혹여어느거리,어느공간에서만나지않았을까를.임화가비바람속에섰던선창은5개월뒤백석이란을찾아통영가는배를탔던곳이었고,춤꾼김해랑과여장군김명시의집은200여미터거리여서어느골목모퉁이에서만났을지도모른다는것이다.
이책을통해독자들은한반도남녘한도시의공간에서다양한삶의군상들을만날수있다.그들을통해도시의거리와건축,더나아가도시공간자체를이해하는계기가될것이다.
이책에는당시의건물과거리사진,풍부한삽화,옛지도등으로당시의도시풍경을생생하게전달하고있다.또한,각글의마지막에는책에서등장인물들이살았거나다녔던장소와거리를표시한상세지도가있어독자들이그현장을직접찾을수있도록도와준다.부록에는책에나오는인물들에대한정보를한눈에알수있는인물연보가있어더욱알차다.<도시의얼굴들-한도시에남긴16인의흔적>은경상대학교출판부가기획한‘지앤유로컬북스’의네번째책이다.
[책속으로이어서]
신축한원동무역사옥은마산포에서가장돋보이는집이었다.세련되게디자인된당당하고균형잡힌건물이었다.시각적안정감을높이기위해기단부를두었고,무게감있는엔타블러처(entablature)가얹혀있었다.르네상스식열주를연상시키는수직형벽과일부벽의최상부에는섬세하게조각된갓돌(capstone)이박혀있었다.도로에바싹붙여지은건물이라처마는없었지만화려하고중후한출입구를가진건물이었다.설계를한건축가도집을지은이도알려져있지않지만일제강점기마산포사람들의자부심을한껏채워준건물이었다.-만석꾼옥기환,146쪽
서울역에서출발한백석은삼랑진에서기차를갈아탄후구마산역에내렸다.통영으로가는배를타기위해서였다.하지만하필그날은란이서울로가는날이었다.선창에서내린란이구마산역으로올라가고있을때백석은배를타기위해구마산역에서선창으로내려가고있었다.두사람은불종거리에서지나쳤다.백석은몰랐고란은알았다.란과함께가던서정귀가백석을알아보고란에게귀띔해주어알게됐다.그러나란은역으로가던걸음을멈추어알은체를하지않고서울행기차를탔다.(…)백석이왔던1936년,마산에는31,000명정도가살고있었다.그중일본인이5,400여명이었다.하지만일본인들대부분은그들의도시신마산에모여살았다.백석이걸었던불종거리는한국인들의거리였다.-시인백석,156,162쪽
산책을즐겼던임화는마산해안을자주걸었다.1935년,폭풍이지나간8월의어느이른새벽에도해안을걸었다.아직해가바다건너산등성이를오르기전이었다.산책구간은신포동매립지에서시작해질펀하게물이드나드는갈풀더미였던산호동구강(舊江)나루터까지였다.(…)임화의낚시터는신마산중앙부두에서구마산선창과오동동산호동까지펼쳐진마산포해안이었다.때때로배를타고먼바다로나가기도했지만자주있던일은아니었다.-임화와지하련,185,189쪽
특기할만한것은그의‘책읽기’였다.거의병적이라할만했다.어릴때부터시작된그의독서병(?)이건강까지해치게되자어머니가책을불태울정도였다.집이가난해주로서점에서책을읽었다.마산중학교를다닐때도마찬가지였다.매일같이하굣길에구마산시장의일본어책방에서한시간씩책을읽었다.이런천상병을보고나중에는책방주인이“읽고싶은책이있으면집에가져가서읽고갖다놓아라”고까지했다.책방에서책을읽을때마다바로옆다방에서고전음악이흘러나와천상병의귀를사로잡았다.생전에브람스교향곡4번을유난히좋아한것도그때문이었다.천상병이드나들었다는책방이어디였는지정확히알수는없다.다만SC제일은행뒷골목에책방과고전음악다방이나란히있었다는한노인의말로짐작할뿐이다.마산중학교와오동동집의중간쯤되는곳이니그럴만도했다.-귀천천상병,231쪽
변변한치료약조차없었던시절,폐결핵에는맑은공기가최고의약이었다.물좋고공기좋기로유명했던마산에결핵치료병원들이곳곳에들어섰다.6?25전쟁때가절정이었다.산장의여인이머물었던요양소외에도립마산병원,마산교통요양원,마산상고건물을징발해세운국립신생결핵요양원,결핵전문제36육군병원,공군결핵요양소,진해해군병원결핵병동등이있었다.결핵을전문으로보는개인병원도많았다.바야흐로마산은결핵치료의메카였다.결핵은‘글쟁이들의직업병’이라불릴만큼문인들에게만연한때가있었다.해방후권환,이영도,김상옥,구상,김지하등이이병원에서치료를받았고,함석헌,김춘수,서정주등이결핵을매개로이곳을오갔다.「이름모를소녀」로1970년대를풍미하다요절한가수김정호도생의마지막을이곳에서보냈다.-산장의여인,246쪽
어느날,김춘수는잔무처리때문에교무실에혼자늦게남아있었다.전쟁중이라정식교사는군부대에내주고판자로된임시교무실에서였다.해가다지고책상머리가어둑어둑할때였다.바로그때,저만치책상한쪽유리컵속의하얀꽃송이가눈에들어왔다.선명한빛깔이었다.그순간시인의머리에‘저선명한빛깔도곧지워질지모른다’는생각이스쳤다.이어서허두한마디가나왔다.「꽃」은그렇게탄생됐다.-꽃의시인김춘수,276쪽
1960년4월11일,미친듯마산거리를나다녔던어머니는끝내아들찾기를포기하고남원가는첫버스를탔다.시신을시청뒤연못에빠뜨렸다는소문에이틀간못물까지퍼내봤지만모두허사였다.같은날오전부산일보기자허종(1923~2008)은신마산외교구락부(두월동1가,지금의럭키사우나)에서한가로이커피를마시며신문을뒤적이고있었다.11시쯤다방문을열고한사람이들어와주변을살피며허종의옆자리에와입을열었다.낮은목소리가두려움으로떨렸다.“중앙부두에빨리가보이소.틀림없이김주열입니더.떠올랐으예….”-열사김주열,285쪽
주교가탔던전용차는짙은초록색미제윌리스지프(WillysJeep)였다.운전은완월동성당신도였던정태조선생이했다.비서직을맡은신부가있었지만주로주교혼자다녔다.자가용은꿈도못꿀때였다.더구나미제윌리스지프는아무나탈수있는차가아니었다.당시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