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삼국사기 (우리 역사에 담긴 과학을 찾는다)

과학 삼국사기 (우리 역사에 담긴 과학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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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과학을 통해 역사를 성찰한다!
『과학 삼국사기』는 삼국사기에 수록된 여러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유물 등을 과학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학을 얼마나 지혜롭게 사용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장영실보다 거의 700년 전인 삼국시대에 있었던 ‘물시계’ 그리고 여기에 중국 물시계와 이슬람의 자동시보장치 원리를 가미한 혁신적 기기인 장영실의 ‘자격루’, 로마 양식으로 제작된 황금보검이 신라에서 발견된 이유 등 교과서나 기타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삼국시대의 놀라운 과학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유산들이 과학성도 없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가 전란이나 관리 소홀로 소실되고, 위정자들에 의해 자료가 파괴되거나 훼손되어 우리 것을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규명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전통적으로 한국인에게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는 조상과 스승에 대한 숭배사상에서 찾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스승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는 것이 순리이자 도리로 보았기 때문에 과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덜 연구되었다고 말한다.
저자

이종호

저자 이종호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 국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시절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논문제출상을 수상하고 해외유치과학자로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또한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한국과학저술인협회 저술상, 국민훈장석류장 등을 받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탐사하고 연구해서 기초 없이 50층 이상의 빌딩을 지을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 등 10여 개 특허권을 20여 개국에 출원했다. 과학과 관련해 100여 편의 논문과 80여권의 도서를 저술했으며, 문명 . 과학 . 역사를 넘나들며 많은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01 한국인의 DNA
02 개마무사
03 다뉴세문경
04 황금보검
05 한국인의 상징 소나무
06 살아있는 종이 한지
07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 자격루
08 주인과 함께하는 순장
09 유목민의 상징 동복
10 금의 나라
11 편두와 금관
12 천마도
13 천상열차분야지도
14 놀라운 천문기록
15 역법
16 나침반은 신라의 것이다
17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18 한반도는 제철의 보고
19 해녀

주

출판사 서평

과학을 통해 역사를 성찰한다!
과학과 인문학을 한 틀에서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


1959년 C. P. 스노우는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연에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단절을 ‘두 문화 two cultures’라는 단어로 규정했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간격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스노우가 강조한 것은 두 문화의 극점에 물리학자와 문학자가 있는데 이들이 대화를 한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서로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이었다. 이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한국에서도 통섭과 융합을 얘기하면서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선언만 있을 뿐 구체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고등학교 때 수학 점수가 좋다는 이유로 이과를 선택하고, 수학 점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문과를 선택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왜 수학 ? 물리학을 잘 아는 변호사가 될 생각을 하지 않고, 글 잘 쓰고 철학에 정통한 과학자 ? 의사가 되지 못 하는가?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인문학을 한 틀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틀에서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유산에서 과학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한국 유산에 과학이 있느냐고 반박한다. 과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동서양의 고전들을 섭렵하고 많은 세계 유산들을 직접 답사한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비판의 근거를 4가지로 정리했다.

우리 유산에 과학이 없게 느껴지는 이유 4가지

1. 우리의 유산 중에서 제작 방법이라든가 작동 방법 같은 과학적인 설명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가 거의 없다. 기술적인 내용이라도 한자로 기록했고 그림도 많지 않아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2. 수많은 자료들이 그동안의 전란이나 관리 소홀로 거의 파손되거나 멸실되었다. 전란이라는 악재 앞에서 귀중한 자료를 모두 챙기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유산의 수가 적다.
3. 위정자들이 필요에 의해 고의적으로 자료를 파괴하거나 훼손했다. 예를 들어, 아직도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의 문헌이나 자료에 남아 있어 애초 선조들이 물려준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 많다는 논란도 이런 이유다.
4. 전통적으로 한국인에게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는 조상과 스승에 대한 숭배사상이다. 과학은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학문인데, 스승의 이론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스승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는 것이 순리이자 도리로 보았다.

우리 유산에 과학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어느 유산에 과학이 있는지를 찾는 것이 시급하다!


우리 것에 대한 기술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외국 것에 대한 정보가 곧바로 유입되었으므로, 외국 것이 우리 것보다 더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이 과학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로 신화 ? 전설 ? 문학작품에 과학성을 볼 수 있는 내용, 즉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이나 과학적 관찰력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틀렸다! 상상력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전래 문학작품에서 과학적인 소재를 분명 찾을 수 있다. 『흥부전』, 『옹고집전』, 『도깨비감투』 등을 보면 우리 조상들도 공상적인 소재를 사용했다. 특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면 최신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 SF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유산에 대해 몰랐으며 이런 것을 발굴하는데 게을리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부족이 과학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있는 과학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과학사의 높은 위상을 알게 되어 뿌듯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 나로호 발사의 실패 원인을 신라의 포석정에서 찾는다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나로호를 발사시켰지만, 발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에서 폭발했다. 과학자들은 두 번의 발사 실패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서 다시 세 번째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 나로호 같은 우주 로켓에는 고체연료보다는 액체연료를 사용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액체연료는 초냉각된 수소와 산소를 말한다. 산소와 수소의 혼합물은 액체 상태일 때 정확하게 계량될 수 있으므로 폭발을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다. 이 액체연료는 우주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에 탱크에 주입하는데 액체연료의 온도를 목표 온도까지 순간적으로 올릴 때 회돌이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우주선이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때 사용되는 액체연료 탱크의 설계나 우유를 포함한 각종 음료의 살균을 비롯한 실용적인 용도를 위해서는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용기를 설계한다. 회돌이 현상은 유체의 주 흐름의 충돌면에서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을 뜻하므로, 유체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데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포석정도 회돌이 현상을 이용해서 설계되었다. 액체연료 탱크와는 반대로 포석정은 회돌이 현상이 발생하도록 제작되었다.
먼저 포석정과 관련된 역사를 살펴보자. 포석정은 신라 패망의 현장으로 비운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신라 말기에 고려 태조 왕건은 왕위에 올라 신라를 위협했다. 그리고 왕건이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자 신라에서는 왕건과 친교를 맺어 국가의 운명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라에서 고려로 투항하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자, 신라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경명왕이 사망하고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왕위가 바뀌었어도 신라의 위엄은 서지 않고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여 몸을 부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애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11월 비빈과 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었다. 『삼국유사』 <기이(2)> ‘김부대왕’에 당시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천성 2년 정해 9월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에 이르니,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종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해 죽게 하고 황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인 부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다.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포석정이 과학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회돌이 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회돌이 현상이란 주 흐름에 반하는 회전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장근식 교수는 포석정의 모형을 만들어 실험과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포석적의 유체역학적 특성에 대해 분석했다. 장 교수는 포석정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비정상 난류 유동에 의해 회돌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포석정의 유체역학적 기능은 물결이 치는 듯 하는 독특한 포어鮑魚 모양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포석정의 물이 흘러가는 경로는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시킬 경우 술잔은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술잔은 회돌이 구역에서 돌기도 하고 막혀서 갇힐 수도 있다. 신라인들은 수로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굴곡이 있는 지점에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측 바닥면의 함몰을 조성하여 술잔의 전복을 방지했다. 즉, 포석정은 다양한 수로를 만들어 그 위에 술잔을 띄웠을 때 다양한 흐름과 위치 변화를 만들어내도록 주의 깊은 관찰력과 이해력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 포석정에서 회돌이 현상을 만들어 술잔이 돌게 하는 것은 실용적인 면에서 특이한 예다. 공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오히려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기 않도록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과학 삼국유사』 49~50쪽)

■ 천 년 전에도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변환시켰다

인간은 각자 느끼는 시간이 상대적인 감각에 따르지 않고 일관된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정한 객관적인 물리현상을 사용하여 시간을 단지 측정 시스템의 결과로 간주한다. 이런 방법으로 가장 먼저 도입된 것이 해시계다. 해시계는 간단하여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흐린 날이나 밤에는 사용할 수 없다. 이런 불편 때문에 모래시계나 불시계도 제작되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정밀하게 시간을 세분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정확도도 높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물시계다. 물시계는 인간이 문명시대로 들어간 초창기부터 개발되었는데 학자들은 적어도 기원전 2000년경에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 사용되었다고 추정하며 그리스 시대에도 이미 보급되었다. 한국인 중에서 물시계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장영실이다.
그러나 물시계가 장영실의 전유물은 아니다. 장영실보다 거의 700년 전인 삼국시대에도 물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9> ‘경덕왕 8년’에 물시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8년 봄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두었다.” 『삼국사기』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