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공 신익희 평전 (독립운동과 민주화의 큰 별)

해공 신익희 평전 (독립운동과 민주화의 큰 별)

$18.00
Description
역동의 시대를 큰 별처럼 살아간 신익희,
그의 생애는 독립운동사이고 해방 전후사이며
1950년대의 정당사이자 민주투쟁사다!
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큰 별 신익희, 그의 빛나는 업적과 아까운 죽음
해공 신익희의 생애를 한국 현대사의 관점으로 집대성한 역작

해공 신익희(1894~1956)는 식민지 → 해방 → 분단 → 단정수립이라는 변혁기의 중심인물로서, 조국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1956년 대통령선거 도중에 63세를 일기로 급서하였다. 생애의 전반기 대부분을 독립전장에서, 후반기는 이승만의 폭정에 맞선 민주전선에서 싸웠다. 임시정부의 요인으로서 두 차례의 국회의장을 지내고 민주세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후보까지 이른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신익희의 돌연한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큰 국가적 손실이자 정치사의 비극이었다.
이 책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초석을 놓은 신익희의 전체 생애에서 한국 현대사 속 그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며, 급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한국 정치사에 어떠한 비극을 맞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를 연구하면서 이 시대 인물들을 탐구해온 저자가 그간 발행되었던 신익희 관련 저서를 모두 참고하여 한국 현대사의 관점에서 집대성하면서, 신익희의 생애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인용문들을 적절히 뽑아 게재하였다.
저자

김삼웅

독립운동사및친일반민족사연구가로,현재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공동대표를맡고있다.대한매일신보(지금의서울신문)주필을거쳐성균관대학교에서정치문화론을가르쳤으며,4년여동안독립기념관장을지냈다.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및명예회복위원회위원,백범학술원운영위원등을역임하였다.
역사·언론바로잡기와민주화·통일운동에큰관심을두고,독립운동가와민주화운동에헌신한인물의평전등이분야에많은저서를집필했다.주요저서로『한국필화사』,『3·1혁명과임시정부』,『장일순평전』,『의열단,항일의불꽃』,『수운최제우평전』,『꺼지지않는오월의불꽃5·18광주혈사』,『운암김성숙』,『나철평전』,『정의의길,역사의길』,『광이불요의지도자:성재이시영선생평전』,『개남,새세상을열다』,『이승만평전』,『김재규장군평전』등이있다.

목차

글머리에|독립운동과민주화의큰별해공신익희선생

제1부독립운동의큰별로떠올라
01|총명한아이로자란성장기:
학덕의아버지와현숙한어머니
02|일본유학시기:
와세다대학,학업과비밀결사
03|3·1혁명의마그마역할로:
보성전문학교의명교수가되다
04|임시정부에참여하여:
의정원의원으로‘임시헌장’을기초하다
05|임시정부분열속새길을모색하다:
국민대표회의도결렬되고
06|민족운동진영통합운동에앞장서서:
한국혁명당창당을주도하고
07|임시정부에돌아오다:
‘한중문화협회’를조직,운영하면서

제2부해방조국민주화의큰별로살다
08|해방된조국에서새로운시작:
임시정부요인들,‘개인자격’으로귀국
09|독자노선을추구하다:
민족진영통합을위한‘독촉국민회’조직
10|입법부의수장으로:
국회의장에선출되다
11|정치격랑기에국정의중심을잡아:
백범김구암살비보에추도사를쓰다
12|6·25전쟁의와중에:
이승만,전쟁을피해남쪽으로도주하고
13|높아진정치적위상에따른탄압:
26개국을순방하며거둔외교성과
14|야당대통령후보로선출되다:
전통야당의원조민주당의창당
15|서거그리고추모사업:
63세,호남선열차에서눈을감다

남은이야기|민주적인리더십을기리며
해공신익희선생연보

출판사 서평

신익희의홀연한죽음이가져온한국정치의비극
“못살겠다갈아보자”라는외침이정권교체를열흘남기고무산되기까지

1956년당시야당인민주당의대통령후보로출마한신익희는“못살겠다갈아보자”라는구호로선풍을일으켰다.서울인구가150만정도이고교통이불편했던당시상황에서도,서울한강변모래밭에40만인파가모여신익희의후보유세를들었다.명연설을마치고다음유세차탑승한열차안에서신익희는급서하고만다.헌정사상최초의수평적정권교체를꼭열흘남긴채주역이사라짐으로써한국현대사는급변하게된것이다.
우리현대사는국가적으로대단히불행한과정이었다.무엇보다외세가만든분단체제를극복하고민족자주의민주공화제를실행할지도자들이,여운형·김구에이어신익희가서거하면서차례로사라졌다.신익희가건재하여그때평화적인정권교체가이루어졌으면,이승만의독재와부패의늪지에서기형적으로성장한정치군인들의쿠데타와같은변태는발생하지못하고민주주의가발전했을것이다.신익희의돌연한서거로한국의민주주의가오래지체된것은한국현대사의불행이었다.

27년간쉼없는독립운동으로보낸청장년시절

신익희는일본유학시절에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활동하면서기관지《학지광》을펴냈고,비밀결사조선학회를조직하면서2·8독립선언과3·1운동의초석이되었으며,상하이임시정부에참여하여이승만이야기한분란을수습하기위해노력하기도했다.임시정부분열속에서새로운길을모색하기도하고한국혁명당창당을주도했으며,좌우통합의민족혁명당에참여하여중앙집행위원을지냈으며,조선의용대에결성에참여하면서다양한활동을전개하였다.임시정부가충칭으로이동해오자한중문화협회를설립하여독립운동의후원단체역할을하기도했다.1942년부터는임시정부에서내무부장에선임되어해방을맞기까지다시임시정부에본격적으로참여하였다.

논리정연하고심금을울리는언변의소유자

와세다대학시절신익희의별명은‘메기의입’이었다.몸가짐이다부진데다,입을굳게다물고듣기를다하여쉽게입을열지않고,상대의말이끝나면논리정연한언변을토하여붙은별명이다.그는아무리전문적인내용이라도상대가알아듣기쉽도록전달하였다.제헌국회때는우리말표현이나법률적·사무적인일에서투른이승만의장을대신해신익희부의장이능수능란하게사회를진행하기도할정도였다.또한대통령후보가되어한강변에서40만인파를상대로한심금을울린명연설등도이때부터다듬어진변술이었다.

서거후치러진선거에서도명백했던신익희지지표

신익희서거열흘후에치러진대통령선거에서총투표자906만7,000여표중유효721만여표,무효185만6,800표,기권54만표가나왔다.무효표와기권표를합하면239만6,000여표가신익희의추모표라고볼수있다.이승만500만표,조봉암216만표를두고볼때그가살아서투표가이루어졌다면능히이승만을압도했을것이라는분석이었다.서울에서이승만은20만여표밖에안되는데추모표가28만여표에이르렀다.살아있는대통령보다죽은후보의추모표가더많이나온것이다.

“이만한리더십을가진정치인이한국현대사에또있을까”
이승만을견제하여입법부의독립성을지켜낸기상

한국현대정치사에서신익희의민주적인리더십은두가지측면에서도드라진다.
하나는지극히권위적인행정부수반이승만과대좌하여입법부의독립성과권위를지켜낸점이다.국회가반민특위를구성하여친일분자들을처리할때,이승만세력이두차례에걸쳐날조한국회프락치사건으로현역의원13명을구속하는등국회가위기에처해있을때,그리고부산정치파동당시정부안의일부극우세력이국회해산을모의할때,이대통령과만나부당한처사를따지는등견제역할을할수있었다.이승만과마주앉아당당히일대일로사리를따질수있는국내유일의정치인이바로그였다는평가이다.

놀라울만큼청렴한,‘수신제가修身齊家’의전형

다른하나는공직자로서청렴성을지키면서권위를유지할수있는지도자의전형을보인것이다.자기가만든국민대학과떠맡아서육성한신문사를관계자들에게넘겨준것이나사저를공관으로만들어국가에헌납하고전세생활을감당한것은,본인도본인이지만가족의공감이없으면쉽지않은일이었다.남들은권력을잡으면없던재산도만드는판에외국인이넘겨준집을의장공관으로삼고명의를국가에넘긴것이다.그만큼그는‘수신제가’의수범을보여주었다.찾아오는공무원들에게는‘염생위廉生威’세글자를써주거나당부하였다.바르고곧은관리가되라는뜻이었다.

현실에바탕을둔,그러나원칙을지키는정치를보여주다
이승만독재에맞선원칙주의자

그는또한대단히실사구시적인정치지도자였다.흔히다수의정치인들이예나지금이나구름잡는식의허장성세를일삼는데비해그는항상현실에바탕을둔정책과방략을추구했다.하지만원칙이짓밟힐때는결코용납하지않았다.부산피난시절이승만이영구집권을획책하며발췌개헌에이어사사오입개헌을감행하자분연히일어나여야,무소속의원60명을이끌고호헌동지회를조직했다.호헌동지회는한국전통야당의원조격인민주당의뿌리가되었다.

분단정부에참여한현실주의와이중성에대한평가

신익희는전통적소양과근대적소양을균형있게접목시키고,외교·법률·내무에능통한문인적풍모이면서도군사·무력의중요성을아는지도자,풍찬노숙의민족운동가와합리적선택에능한현실정치인의면모가적절히배합된드문인물로꼽힌다.
김구주석과김규식부주석등임시정부지도부는단독정부불참노선을택했지만그는현실정치에참여한다.남북협상과관련해서‘여호모피론與狐謀皮論’,즉“여우와더불어값진모피를얻을의논을한다는것은의미가없다”라는주장을편것이다.이러한분단정부참여는임시정부주류와는엇박자의행보였으므로‘노선선택의이중성’이라는평가도따른다.환경의불가피한반영또는발전적전환의모습을보여주면서비평적분석을요구하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