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충무공 : 이순신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공무원의 길

공직자 충무공 : 이순신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공무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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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공직이란 무엇인가, 공직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제44대 검찰총장 김오수가, 33년의 공직생활을 마친 후
항상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충무공 이순신에게 바치는 소회
“1576년 12월 임시직이던 권지훈련원봉사 충무공에게 처음 부여된 보직은 함경도 동구비보(함경도 삼수 지역) 권관(종9품)이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 1994년 3월 필자는 인천지검 초임 검사가 되었다. 우연히 충무공이 처음 공직을 시작한 것과 같은 31세였다.”

공직자로서 자신의 자취를 충무공 이순신의 발걸음에 겹쳐서 본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시도일 것이다. 그만큼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는 이름은 너무도 거대하고, 또 무겁다. 저자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공직생활을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와 결부짓는다는 것은 쉽사리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난중일기』를 읽고 충무공을 존경해왔던 저자에게 있어서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는 이름은 일종의 성역과도 같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저자가 이순신이라고 하는 ‘공직자’를 들여다보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난 공직생활을 돌이켜보고자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물론 저자가 오랜 공직생활 동안 줄곧,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을 위대한 이정표로 생각해 왔다는 점이다. 아마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비단 저자만이 아닐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는 이름은 그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충무공 이순신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은 각별한 구석이 있다. 충무공을 모시고 있는 충무사 가까이 부임하게 되었을 때는 휘하의 공직자들과 함께 충무사를 찾아 참배하기도 했고, 충무공이 남긴 글귀를 현판으로 걸어놓거나 검찰총장실 복도에 거북선의 모형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저 마음속으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항상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는 거인을 의식하고, 본받고자 했던 것이다. 비슷한 나이에 공직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이나, 전국 각지를 임지로 삼아 떠돌아다니는 생활, 그 임지들이나 여행지 곳곳에서 느껴지는 충무공의 흔적 등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자신의 공직생활이 충무공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동질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궤적이 겹치면 겹칠수록 충무공이라고 하는 거인이 남긴 발자취에는 턱없이 모자르다는 생각에 자신의 왜소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자취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공직자로서 나아가야 할 길이 밝혀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분을 자신만이 아닌 이 땅 위의 수많은 공직자들도 함께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 저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으로는 지금 대한민국에 불어오는 하 수상한 바람이다. 특히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은 지난 역사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고통과 피해를 안겨주었던 나라이지만 여태까지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수시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우리나라를 비난하는 등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2024년 현재, 그러한 일본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 이러한 때야말로 일본의 무도한 침략에 맞서 백성들을 지켰던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공직자, 충무공을 생각할 때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유지를 되새기는 것은 다름 아닌 공직자의 일단으로서 일하기도 했던 본인의 책무임을 통감한다.
저자

김오수

저자:김오수
전남영광군홍농면가곡리에서농부의아들로태어나그곳에서국민학교와중학교를졸업했다.서울대학교법과대학을나와사법시험에합격해제20기사법연수원생으로공직에입문했다.이후3년동안강원도화천에서군법무관으로복무했고,1994년인천지검검사로임관하여장흥,서울,부산,수원,광주,원주,성남,청주,세종,진천,과천등지에서검사와부장검사,차장검사,지청장,검사장,법무연수원장,법무부차관,검찰총장등으로일했다.
검사로있으면서안기부장등이제15대대통령선거에개입한북풍사건및총풍사건,서울지검피의자고문치사사건,청와대정책실장이관여한학력위조·채용비리사건등을수사했다.
법무연수원장때는법무·검찰교육체계와교육환경을정비했고,법무부차관때는검경수사권조정등검찰개혁에관여했으며,교정시설개선,전자출입국시스템및보호관찰제도도입등법무부업무를개선하는한편코로나19대응을위해노력했다.2021년6월1일제44대검찰총장으로취임해대통령선거와지방선거를관리했고,국민중심검찰을목표로검찰업무혁신을시도했으나,2022년5월정치권에서소위‘검수완박’을추진하자검찰을대표해반대하다가책임을지고사퇴했다.이후전남대학교연구석좌교수로있다가2024년5월부터변호사로일하고있다.
어린시절부터역사에대한흥미와관심이많았고역사학자를꿈꾸기도했다.공직자가된이후에는공직자의표상으로항상충무공을생각하며근무했다.배우고싶고따르고싶었던마음의스승충무공에대해이야기하고자30년공직경험을바탕으로이책을썼다.

목차


글을시작하며

1.조선시대의관직과군사제도
2.공직에입문하기까지
3.충무공의공직생활
4.공직입문과1차파직
5.복직과2차파직
6.왜란의조짐과파격인사
7.운명의전라좌수사취임
8.임진왜란의발발과전개
9.왜란에서의활약
10.명군의참전과지루한대치
11.삼도수군통제사로서의일
12.길고험난했던왜군과의대치
13.압송과투옥,백의종군
14.삼도수군통제사재임명과명량해전
15.수군재건과노량해전

글을마치며
충무공연표

출판사 서평


한산도,명량,노량…,격전의바다에나가기전까지
공직자로서의충무공은무엇을준비하고생각했을까?
시골농부의아들로태어나검찰총장이된공직자김오수

공직자의귀감,충무공이라는거울을통해
33년간의공직생활을반추하다!

공직이란무엇인가,공직자는어떤모습이어야하는가
제44대검찰총장김오수가,33년의공직생활을마친후
항상길잡이가되어주었던충무공이순신에게바치는소회

“1576년12월임시직이던권지훈련원봉사충무공에게처음부여된보직은함경도동구비보(함경도삼수지역)권관(종9품)이었다.그의나이31세였다.(…)1994년3월필자는인천지검초임검사가되었다.우연히충무공이처음공직을시작한것과같은31세였다.”

공직자로서자신의자취를충무공이순신의발걸음에겹쳐서본다고하면그것은분명쉬이받아들일수없는시도일것이다.그만큼충무공이순신이라고하는이름은너무도거대하고,또무겁다.저자에게있어서도마찬가지였다.자신의공직생활을충무공이순신의생애와결부짓는다는것은쉽사리시도할수있는일이아니다.특히어린시절부터『난중일기』를읽고충무공을존경해왔던저자에게있어서충무공이순신이라고하는이름은일종의성역과도같은특별한것이었다.그러한부담에도불구하고이번에저자가이순신이라고하는‘공직자’를들여다보고,그를바탕으로자신의지난공직생활을돌이켜보고자하는데는그럴만한이유가있다.
첫째는물론저자가오랜공직생활동안줄곧,충무공이순신이라고하는걸출한인물을위대한이정표로생각해왔다는점이다.아마그런마음을품고있는것은비단저자만이아닐것이다.충무공이순신이라고하는이름은그정도로우리나라사람들의마음속에서큰자리를차지하고있는이름이기때문이다.그럼에도불구하고저자가충무공이순신에게가지고있는마음은각별한구석이있다.충무공을모시고있는충무사가까이부임하게되었을때는휘하의공직자들과함께충무사를찾아참배하기도했고,충무공이남긴글귀를현판으로걸어놓거나검찰총장실복도에거북선의모형을전시하기도했다.그저마음속으로존경심을가지고있는것을넘어서서공직생활을하면서항상충무공이순신이라고하는거인을의식하고,본받고자했던것이다.비슷한나이에공직생활을시작했다는점이나,전국각지를임지로삼아떠돌아다니는생활,그임지들이나여행지곳곳에서느껴지는충무공의흔적등을바라보면서느끼는것은자신의공직생활이충무공의그것과비슷하다는동질감같은것이아니었다.오히려궤적이겹치면겹칠수록충무공이라고하는거인이남긴발자취에는턱없이모자르다는생각에자신의왜소함을절감할수밖에없다.그럼에도불구하고그발자취에서눈을돌리지않고정면으로마주함으로써공직자로서나아가야할길이밝혀지는듯한기분이들었다는것이다.그리고그러한기분을자신만이아닌이땅위의수많은공직자들도함께느꼈으면하는바람에저자는글을쓰기시작했다.
다음으로는지금대한민국에불어오는하수상한바람이다.특히가깝고도먼나라일본과의관계가심상치않다고저자는말한다.일본은지난역사에서우리민족에게가장큰고통과피해를안겨주었던나라이지만여태까지제대로된사과없이수시로역사를왜곡하거나우리나라를비난하는등물의를일으키고있다.그런데2024년현재,그러한일본에대한정부의태도가심상치않다.이러한때야말로일본의무도한침략에맞서백성들을지켰던우리역사의가장위대한공직자,충무공을생각할때라고저자는말한다.그리고그유지를되새기는것은다름아닌공직자의일단으로서일하기도했던본인의책무임을통감한다.

한산도,명량,노량…,조선해군은어떻게강군이되었나
해전사에길이남을승리를가능케한‘공직자이순신’의뒷받침

첫째,존경받는공직자였다.
둘째,공직을가장중요하게생각했다.
셋째,성실했다.
넷째,무엇보다백성을위해일했다.
다섯째,인간에대한사랑이있었다.
여섯째,열린자세와정보의중요성을알고있었다.
일곱째,원칙과기준에충실했다.
여덟째,현장을중시했다.
아홉째,소통하는지도력을갖추었다.

이순신에대해새로운이야기를하는것은지극히어려운일이다.한반도역사상둘째가라면서러울정도의영웅인만큼이제껏수많은사람들이이순신에대해서이야기했고,저자또한그러한사료들을보고자랐다.전문가들만이아니다.드라마나영화,소설등수많은매체를통해서다양한사람들이이순신을다뤄왔다.그런데새삼스레다시이순신에대해서논하는것이어떤의미가있을까?이런상황하에서다시이순신에대해서이야기한다는것은결코쉬운시도는아니었다.저자는스스로가역사가들이상으로사료에통달해있다고생각하지않는다.저자가이책을통해서하고자하는것은역사가나전쟁사가등학자가아닌공직자의시선으로이순신을바라보는것이다.
이순신이라는말을들으면많은사람들이“신에게는아직12척의배가남아있나이다”라고하는말을떠올린다.명량해전을앞두고충무공이선조에게올린장계에나오는말로,실제개전때는여기에전라우수사김억추의판옥선1척이더해져13척이되었다고한다.그렇다고하더라도적의함선133척에비하면10분의1에불과한수준의전력으로지형을교묘하게이용하면서분전해완승을거둔명량해전은틀림없이전쟁사에길이남을해전이었음에틀림없다.이런통쾌한승리는누구나주목하기쉬운스펙타클이라고할수있겠지만이러한승전보에주목하다보면지휘관,전략가로서의면모에만눈이가기쉽다.그러나우리가알아야할것은충무공은결코자신의병법과전술만을믿고평상시의준비를게을리하는장수가아니었다는사실이다.충무공이명량해전에고작13척의배만을가지고싸우게된것은결코본의가아니었고,그자신의과오에의한것은더더욱아니다.오히려충무공은평상시부터둘째가라면서러울정도로군비를충실히갖추고자한지휘관이었다.
충무공은전선,병력,군량등모든방면에있어서준비를철저히하고자했다.저자는전시가아닌그러한평시의충무공에게주목한다.충무공은어떤생각을하고공직에임했을까?전쟁을대비하여무엇을했을까?특히공직자의일이라고하는것은단한명의영웅의힘만으로해낼수있는것이아니다.물론충무공이라고하는인물의위대함은누구도부정할수없겠으나,거북선건조를비롯한수많은위업이그의독단이아니라주변인물들을최대한살리는용인술에있었던것또한사실이다.저서『공직자충무공』을통해서들여다보는충무공은그저위대한전쟁영웅이아니라,철두철미한공직자인동시에인간경영의전문가이기도하다.전시이상으로빛나는평시의모습이있었기에전쟁에서그토록활약할수있었다.또한그러한삶의태도는전시가아닌현재우리나라의공직자들에게도크나큰울림을전한다.저자의손에의해서우리는430년의세월을넘어,본받아야마땅한공직자의거울을다시한번마주하게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