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늑대 (바이킹의 역사 | 반양장)

바다의 늑대 (바이킹의 역사 | 반양장)

$18.30
Description
침략자, 탐험가, 교역자로서 바이킹의 역사
이 책에서 저자는 위대한 바이킹의 이야기를 통해 서사시인, 영웅, 여행자로 이루어진 빼어난 북유럽 세계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특히 신세계를 발견한 ‘행운의 레이프’, 프랑스의 골칫덩어리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요크를 지배한 에리크 피도끼왕, 술수에 뛰어난 하랄 하르드라다 등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바이킹 시대의 사가를 한층 더 빛내준다. 특히 당시 지도와 인명·지명 등 사전을 실어 이해를 돕는다.
저자

라스 브라운워스

저자 라스 브라운워스(Lars Brownworth)는 저술가, 강연자, 방송인이자 교사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해왔으며, 역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뉴욕 타임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서구에 지다: 서구 문명을 일으키고 사라진 비잔틴 제국(Lost to the West: The Forgotten Byzantine Empire that Rescued Western Civilization)》 《노르만족: 침략자에서 왕으로(The Normans: From Raiders to Kings)》 등이 있다.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살고 있다

목차

지도
머리말: 북방의 망치
서문: 바이킹의 시대가 열리다

침략자
01 본국의 바이킹
02 샤를마뉴의 눈물
03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04 악마 토르길스
05 이교도 대군세
06 사면초가의 잉글랜드
07 잉글랜드 최후의 왕
08 아일랜드해의 바이킹 왕국
09 클론타프 전투
10 걷는 자 롤로

탐험가
11 리비에라 지역의 바이킹
12 아이슬란드
13 웨스턴아일스와 그린란드
14 빈란드

교역자
15 루스인 류리크
16 미클라가르드
17 비잔티움의 매혹
18 루스인에서 러시아인으로

북유럽 본국
19 바이킹 왕들
20 하랄 블로탄
21 영국 은의 유혹
22 북방의 황제
23 바이킹 시대의 종언

맺음말: 바이킹의 유산
부록
주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바이킹(Viking)’ 하면 흔히 무자비한 침략·싸움·약탈을 일삼으며 스칸디나비아반도를 근거지로 둔 ‘해적’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서구에서는 용 모양의 배에서 뛰어내려 수도원을 약탈한 금발의 야만인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한다. 이는 300년의 바이킹 시대가 서구 기독교 세계에 안겨준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이렇듯 793년 노르드 전사들은 잉글랜드의 린디스판섬을 공격해 쑥대밭을 만들었다. 이후 영국제도의 섬 상당수를 굴복시키고 유럽 본토의 파리와 아헨 등 수도를 차례로 습격했다. 이들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부 유럽으로 나아가 키예프를 함락하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바이킹의 이야기에는 잔혹한 폭력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이들은 법을 만들고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는 참신한 제도를 잉글랜드에 도입했다. 또한 훌륭한 상인이었으며, 아이슬란드에 정착해 더블린을 건설하고 바그다드에서 북미 연안에 이르는 정교한 교역망을 구축한 탐험가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위대한 바이킹의 이야기를 통해 서사시인, 영웅, 여행자로 이루어진 빼어난 북유럽 세계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특히 신세계를 발견한 ‘행운의 레이프’, 프랑스의 골칫덩어리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요크를 지배한 에리크 피도끼왕, 술수에 뛰어난 하랄 하르드라다 등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바이킹 시대의 사가를 한층 더 빛내준다. 특히 당시 지도와 인명·지명 등 사전을 실어 이해를 돕는다.

바이킹이라는 단어의 기원
‘바이킹’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인 9세기의 기록에서는 이 침략자들을 ‘북방인(Northmen)’, ‘데인인(Danes)’, ‘노르드인(Norse)’, ‘이교도(Heathen)’라 불렀다. 이들이 주로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앵글로색슨족은 ‘바다 침략자’라는 뜻의 ‘wic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이 단어는 11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등장한다. 더 나은 설명은 바이킹에게서 나왔다. 옛 스칸디나비아어 ‘vic’은 후미 혹은 만이라는 뜻이고, 오슬로피오르 부근의 만 지역은 칼을 주조하는 데 쓰는 철의 주요 생산지였다.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그 만의 지역민을 일컫던 데서 비롯되어 점차 모든 스칸디나비아의 침략자를 아우르는 의미로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이킹의 본거지
오늘날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로 나뉜 당시의 스칸디나비아는 극한의 땅이었다. 이들 중 기후가 가장 좋은 나라는 덴마크였다. 덴마크는 서부 연안을 오늘날의 독일과 공유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서쪽 방향으로 탐험에 나섰다. 덴마크 바이킹은 저지대 국가와 프랑스 각지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영국해협을 건너 영국으로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거기에서부터 에스파냐·이탈리아도 공략했다.
오늘날 노르웨이·스웨덴이 자리한 스칸디나비아반도는 덴마크보다 기후가 한층 더 험악하다. 이 지역의 동부 해안은 러시아 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스웨덴 바이킹은 대부분 러시아 쪽으로 항해했다. 침략이 아닌 통상을 위해서였다.
바이킹의 땅에서 가장 험준한 곳은 영토의 약 3분의 1이 북극권보다 더 높은 지역에 위치한 노르웨이다. 노르웨이의 기다란 서부 연안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섬들, 배를 타고 북극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안 항로, 즉 ‘북쪽 길〔northern way: 노르웨이(Norway)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됐다〕’을 만들어주는 절묘한 피오르들이 마치 장벽처럼 차가운 대서양의 파도를 막아준다. 당연히 노르웨이 바이킹은 북해로 모험을 나설 때면 서쪽을 택했다. 이들은 그린란드에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1000년경 신세계에 도착했다.

바이킹 역사에 관한 부족한 자료
8세기에 바이킹이 왜 본거지에서 벗어나 침략을 일삼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추측이 난무한다.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 정치적 압력에서부터 기후 변화와 기술 혁신에 이르기까지 온갖 설이 분분하다. 바이킹은 공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결코 단일한 민족이 아니었으며, 바이킹 시대에도 스칸디나비아에서 살아가던 이들 대다수는 결코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모험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모종의 이유를 가진 다소 수상쩍은 소수의 무리였다. 한층 복잡한 문제는 바이킹의 이야기가 그 피해자들이 기록한 역사, 좀더 오래되고 문명화한 국가들의 기록이 들려주는 이야기고, 고고학이 말해주는 것 역시 몹시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바이킹 유적이 변변찮은 데는 바이킹 예술가들이 나무로 작업을 한 탓도 있다. 이들은 여름에 나무를 잘라 처음에는 연회장이나 배를 만들고 나중에는 그들의 문명을 이루는 목조교회(stave church)를 세웠다. 이 가운데 비교적 원형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유적은 목조교회뿐으로, 여기에는 바이킹 세계의 쇠락기가 반영되어 있다.
바이킹은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의 룬 문자는 서사시나 역사 기록보다는 마술적 주문이나 푯돌을 표기하는 데 더 알맞았다.

바이킹 시대의 시작
린디스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홀리아일랜드, 6세기에 번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영적 피난처를 구하던 일군의 수도사들이 이 섬에 터를 잡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못 되어 섬 남쪽 곶에 소(小)수도원이 들어섰다. 8세기 말의 새로운 자신감을 이 수도원보다 더 잘 보여주는 곳은 없었다.
대왕국 4개와 소왕국 3개 등 7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잉글랜드는 8세기에 전역이 번영을 구가했는데, 특히 북부 지역은 문화적으로 크게 융성했다. 787년 앵글로색슨족 연대기는 잉글랜드 농부들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게” 일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불길한 전조가 드러났다. 웨섹스 남부 포틀랜드섬 연안해에서 경비병이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배 세 척을 발견한 것이다.
배를 발견하면 일단 왕이 파견한 지방 행정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해안 경비병의 의무였다. 포틀랜드섬의 지방 행정관 비두허드는 그들을 안내하려 말을 타고 해안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이 비두허드를 향해 화살을 쏘아댔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비두허드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바이킹과 접촉한 비운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었다.
이들의 습격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방어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이킹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머잖아 영국의 대비책은 터무니없이 허술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793년 마침내 바이킹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재난은 유럽 전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영국 기독교 사회의 심장부가 무너졌다면 어딘들 안전하겠는가. 이러한 사태가 터진 것은 영국 교회의 도덕적 해이 탓이라는 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에 교회의 개혁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뒤따랐다. 그러나 제아무리 치열한 자기 성찰도 당시의 도도한 흐름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듬해에는 동부 연안의 자로 수도원과 서쪽의 스카이섬이 피해를 입었으며, 795년에는 아이오나 수도원이 약탈당했다. 바이킹 시대의 시작이었다.

바이킹의 문화
스칸디나비아인은 서로 싸우지 않을 때에는 더러 동물들을 싸움 붙이곤 했다. 이런 식의 취향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지막지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바이킹은 그 외 다른 점에서는 매우 현대적이었다.
바이킹 문화에서는 남성과 동등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여성도 서구 기독교 사회의 그 어느 곳보다 많은 권리를 누렸다. 많은 소녀가 열두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혼례를 치렀지만, 남편이 없을 적에는 부인이 가정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고 온갖 중대사를 직접 결정했다.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와 달리 아내는 재산을 상속받고, 남편과 이혼하고, 파경을 맞았을 때 결혼 지참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또 이들은 아이들에게 부모를 도와 가사를 거들도록 장려했다.
사회 질서는 혹독한 처벌을 통해 유지했다. 간통을 저지르다 걸린 남성에게는 거꾸로 매달아놓거나 말에게 짓밟히는 형벌을 내렸으며, 방화범은 화형에 처했다. 그런가 하면 이 같은 폭력적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바이킹은 문화인이라면 응당 음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바이킹은 신을 모시기는 하나 ‘종교’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예배를 올리는 ‘공식적’ 방법도 보편적 교리도 중앙 교회도 따로 없었다. 대신 이들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일련의 일반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얼음에 뒤덮인 대재앙으로부터 몸을 피할 곳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바이킹은 끊임없이 신들, 특히 바다의 신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바이킹의 세계는 바다의 세계였다.

바이킹과 조선술
바다를 중시한 바이킹은 남쪽으로 가는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는 펠트·호박·철광상 같은 방대한 자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9세기경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남부나 동부 지역과 활발하게 교역하고 있었다. 로마인과 접촉한 초기 몇 백 년 동안 이 ‘이상하게 생긴 배’가 내려온 이유 역시 약탈이 아니라 통상을 위해서였다.
최초의 ‘바이킹’ 침략은 육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8세기 말, 대대적인 바이킹의 침략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술의 혁신적인 발달 덕분이었다.
초기의 바이킹 선박은 로마와 켈트족의 디자인을 본뜬 것이었다. 여느 선박과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배도 속도가 느리고 거친 바다에서 잘 뒤집혔다. 그러던 8세기 어느 때쯤 이들은 용골을 창안해냈다. 이 단순한 구조물이야말로 항해술의 발전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육지를 벗어나 멀리까지 모험을 나서는 유럽인이 거의 없던 시절에 바이킹은 목재·동물·식량 따위의 화물을 싣고 대서양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화물선, 연락선, 어선 등 수많은 배가 앞다퉈 개발되었다. 하지만 특히 군함, 즉 롱십(longship)은 힘·유연성·속도가 기막히게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해수면에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도록 고안된 롱십은 특수 기술 없이도 지역에서 확보한 재료만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이 배는 참나무 널빤지를 겹붙여서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배가 파도 속에서 방향을 틀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바이킹의 롱십은 해양을 횡단하는 큰 배에 달린 용골이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흘수가 얕아서 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