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생명 앞에 걸음을 멈춘 기록
숲을 떠올리면 우리는 먼저 하나의 풍경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풍경은 수없이 많은 나뭇잎이 모여 이루어 낸 생명의 모습이다. 봄에는 연둣빛 새잎으로, 여름에는 짙은 그늘로, 가을에는 붉고 노란 단풍으로, 겨울에는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마른 잎으로 숲은 쉼 없이 모습을 바꾸어 간다. 그러나 우리는 숲은 기억하면서도, 그 숲을 이루는 나뭇잎 하나하나를 오래 바라볼 일은 많지 않다.
《걷다 보면 나뭇잎》은 그 작은 생명 앞에 걸음을 멈춘 기록이다. 저자는 숲을 걸으며 만난 나뭇잎을 하나씩 프로타주로 옮겨 담았다. 종이 위에 잎맥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저자는 새로운 숲을 만났다. 손바닥에 살포시 올라오는 작은 잎도 있었고, 4절 도화지보다 큰 잎도 있었다. 같은 숲에서 만난 잎인데도 크기와 모양, 잎맥과 결은 모두 달랐다. 오래 바라볼수록 나뭇잎은 더 이상 숲의 풍경을 이루는 작은 조각이 아니었다. 저마다 다른 계절을 지나고,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아온 생명이었다. 한 장의 나뭇잎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결국 숲 전체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었다.
200여 점의 프로타주에 담긴 자연의 시간
이 책에는 200여 점에 이르는 프로타주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 숲에서 만난 나뭇잎을 종이 위에 하나씩 옮겨 담은 기록이다. 잎맥의 섬세한 결, 가장자리의 작은 굴곡, 벌레가 머물다 간 흔적, 바람과 햇살을 견디며 새겨진 시간까지 한 장 한 장의 프로타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같은 나뭇잎이 하나도 없듯, 같은 프로타주도 하나도 없다. 200여 점의 작품은 숲이 얼마나 다채롭고 풍요로운 생명의 공간인지를 말없이 보여 준다. 글과 프로타주는 서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프로타주 앞에 머물게 되고, 프로타주를 바라보다 보면 다시 글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읽기와 바라보기가 하나의 호흡이 되는 순간, 독자는 어느새 숲길을 천천히 걷게 된다. 《걷다 보면 나뭇잎》은 자연을 읽는 책인 동시에 자연을 바라보는 책이며, 오래 곁에 두고 자주 펼쳐 보고 싶은 한 권의 작품집이다.
한 장의 나뭇잎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다
우리는 늘 더 크고, 더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을 새롭게 만나는 일은 언제나 가장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나뭇잎 한 장에는 계절이 지나온 길이 새겨져 있고,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가 남아 있으며, 한 생명이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순간, 자연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걷다 보면 나뭇잎》은 식물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바라보는 법을 일깨우는 책이다. 천천히 걷는 법, 오래 머무는 법, 익숙한 풍경 속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조용히 건넨다. 책장을 덮고 다시 숲을 걷는 날, 독자는 이전과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숲은 변한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숲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다.
책 속에서
나뭇잎은 얼핏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크기와 윤곽, 잎맥이 조금씩 다르다. 나뭇잎을 공장에서 찍어 낸 제품쯤으로 여기며 살다가 조금씩 다른 나뭇잎을 보니 나무에 달린 나뭇잎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으로 느껴졌다. p8
가지에서 어린잎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나뭇잎을 먹는 애벌레들도 나오기 시작한다. 애벌레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에 맞춰 육아를 하려면 서둘러 짝을 찾고, 둥지도 짓고, 알도 낳아 품어야 한다. 아직 겨울이 남은 것 같은데 새들의 노랫소리로 봄이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p44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은 중력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거미는 거미줄을 풀면서 아래로 내려오고, 열매와 나뭇잎도 아래로 떨어진다. 하지만 조용히 중력을 거스르는 반중력 노동자들이 있다. 바로 풀과 나무들이다. p59
작고 단단한 뭔가가 마른 낙엽 위로 계속 떨어진다. 소리의 정체는 애벌레들이 나뭇잎을 먹고 싼 똥이 마른 낙엽 위로 떨어지는 소리다. 얼마나 많은 애벌레가 잎사귀를 먹어 대면 애벌레 똥 싸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릴까? p69
쪽잎이 달린 모양이 새의 깃털과 닮았다고 해서 이런 잎을 깃꼴겹잎이라고 한다. 먼 곳까지 날아다니는 새의 깃털과 한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을 그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나무의 잎이 닮았다니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나무도 움직이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말이다. p85
선인장의 뾰족한 가시도, 완두의 긴 덩굴손도, 우리가 먹는 양파도 모두 잎이 변한 모습이다. 풀과 나무에서 유연하고, 수가 많으며, 해마다 새로 태어나면서 우연을 싹틔우는 곳. 일인 다역의 주인공은 바로 잎이다. p131
산에는 물길이 있듯 바람길도 있나 보다. 양쪽으로 봉우리가 있는 골짜기, 꼭 그 자리만 가면 커다란 나무 꼭대기 가지가 휘휘 흔들리고 가지마다 달린 나뭇잎이 밀렸다가 풀리고 다시 밀리며 서로 부딪혀 소리를 낸다. 나뭇잎은 바람을 몸으로 보여 주지만 소리로도 들려준다. p152
초피나무는 산초나무와 사이도 가깝고 외모도 비슷한데 향기가 훨씬 진해서 근처만 가도 향기가 난다. 향기는 그들의 언어다. 향기를 우리가 들을 수 있다면 초피나무는 숲에서 가장 시끄러운 나무일 거다. p179
축축해진 낙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톡토기나 응애 같은 작은 동물들이 먹으며 더 잘게 조각내고 부순다. 그렇게 형태가 사라진 낙엽이 오랜 시간 흙에 묻히면 낙엽도 흙이 된다. 흙이 된 나뭇잎은 다시 나무의 양분이 되어 준다. 나뭇잎은 얼마나 식물다운가? p224
그런데 놀랍게도 아주 오래전에는 나무에 잎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는 초록색 줄기와 가지가 양분을 만들며 살았다. 우연히 줄기에 작은 돌기가 생겨 그것이 점차 납작해지고 커져 잎이 되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우연히 가지가 서로 붙고 납작해져서 잎이 되었다. 나뭇잎의 긴 역사조차 그저 작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니……. 어쩌면 그래서 나뭇잎이 이처럼 다채로운 게 아닐까?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