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대의 루저들

우리 근대의 루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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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 근대의 루저들이 남긴 그 유언장을 소설 나부랭이라 비아냥대는 듯한 환청에 숱하게 시달리면서도 이 책의 집필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글쓰기가 생존을 위한 각혈과 각골의 기록이요, 정신의 고투이자 노동이었다는 사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기억하지 않는 후세들에게 그들이 가질 억하심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붙들린 부채의식이 이 책의 자산이자 그 천기를 엿본 필자가 치르는 죗값일 터다.
2019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 될지도 모를 역병이 창궐했다. 한때의 소나기라 낙관하기엔 우리 모두 강 이편 불 한가운데 서 있다. 그러나 염상섭의 무심한 눈길을 스쳤던 것처럼 삶은 계속되고, 이 시간 역시 이내 지나간 미래가 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과거의 소설을 읽는 일이 우리에게 정신의 면역력을 선사하리라.
저자

김병길

연세대학교에서한국근현대소설을공부한후숙명여자대학교에서가르치고연구하는중이다.
저서로『우리말의이단아들』(글누림),『정전의질투』(소명출판),『역사문학속(俗)과통(通)하다』(삼인),『역사소설,자미(滋味)에빠지다』(삼인)가있다.

목차

책머리에

첫째매듭|최서해
두번의출가(出家)

둘째매듭|홍명희
영웅이때를만들지않고,때가영웅을만든다!

셋째매듭|한설야
인민을위한나라는없다

넷째매듭|심훈
남북의통치자가사랑한소설

다섯째매듭|백석
백석은소설가였다

여섯째매듭|이기영
오!인간의희비극이여!!

일곱째매듭|김기진
어느일루셔니스트(illusionist)의방랑

여덟째매듭|김정한
친일과민족의이분법너머


아홉째매듭|현덕
‘노마’는어른의아버지

열째매듭|채만식
“문송합니다!”

열한째매듭|허준
사람은모든것을다잃어버리고넋하나를얻는다

열둘째매듭|김동리
왜‘순수문학’은순수할수없는가?

열셋째매듭|정비석
유한매담의키쓰를허하라!

열넷째매듭|황순원
‘아벨’을찾아서

이책에서다룬주요작품의출전

출판사 서평

당대최고의명창박녹주를향한김유정의짝사랑연애편지심부름을하고,거절의의사를위조한편지를다시유정에게전했던이가안회남이란필명으로알려진안필승이다.유정은죽기열하루전그필승에게서신을띄웠다.악화된병세에고향으로내려간유정은‘이글이글끓는명일(明日)의희망’을다지며닭삼십마리를고아먹고땅꾼을사서살모사와구렁이를십여마리달여먹을계획을세웠다.그러기위해돈이필요했던유정은필승에게일거리를구해달라청한것이다.죽음을목전에둔상황에서번역을한다는것이병을더치는일임을알면서도유정은병마와의최후담판이고비에이르렀다고판단하여그렇게승부수를던졌다.유정은이편지에서절박한심정으로“돈,돈”을연발한다.그러면서그런자신의모습이슬픈일이라자조한다.
문단데뷔전일본에잠시머물던현덕은막일을나갔으나흙바구니를지지못하여쓰러지고쓰러지다가결국감독에게쫓겨난일이있었다.그날울다웃다요도가와(淀川)뚝을홀로걸으며현덕은자신의몸이그일을지탱해갈수없음을깨달았다.그쓰일수없는몸으로할수있는최후의한가지일로동경해오던문학의길을밟아보겠다고결심한그는귀경했다.이가난한청년을문학의세계로이끈이는김유정이었다.유정의권유로문인이되겠다는뜻을굳힌현덕은〈〈조선일보〉〉신춘문예에응모하여소설가로등단했다.그후어느날현덕은유정의병이극심해진사실을인편으로듣고놀란마음에황황히뛰어가려하나,때마침그의아우가과한객혈로정신을잃고눕는바람에붙들리고만다.현덕은돈이없어약한첩못쓴채형으로서이러지도저러지도못하고동생을우울히지키고만앉아있는자신의처지를유정에게편지로전했다.‘한편에는아우가누었고,다른한편에는동무가누었고,이렇게시급히돈이필요하건만현덕에게는왜그리없는것이많은지’라며유정은탄식했다.그러면서현덕에게처세의길을열어줄수없어내치어굴리더니마침내는주저앉히고야만세상을한탄했다.그리고그원망은다시“아나에게돈이왜없었든가.”라는절규로이어졌다.안타깝게도유정은필승으로부터끝내답장을받지못했다.폐결핵이초대한죽음이앞서도착했기때문이다.유정의마지막곁을지킨이는현덕이었다.

비단김유정과현덕만이아니다.우리근대의소설가들은자칭타칭천재요지식인이었지만,그들의최고비기라할글쓰기가밥벌이가된순간이내가난을제2의숙명으로떠안아야했다.그림자처럼잠시도곁을떠나지않는빈궁은필연코이들에게질병을선물했고,드디어그들의무릎을꺾어놓고야말았다.소설쟁이로불린그들은얼어죽어도곁불은쬐지않는다는앞선시대의문사(文士)로더이상남을수없었다.어디그뿐인가.사회주의의세례를받았던이들상당수는전향이라는이름으로변절을선언했고,그가운데다수는목숨을부지하기위해부왜(附倭)를넘어친일의길로나섰다.해방이왔다고달라진것은없었다.이참에좌우익으로갈린그들은펜을벼리어서로의목줄을겨누었다.그리고이내각자의피난처를찾아남과북으로흩어졌다.그러나한반도어디에도그들을따뜻이품을줄곳은없었다.결국은두세계모두로부터배척당했고경계인으로내쳐졌다.자신이목멘글쓰기에숨을내놓고야마는루저(loser,잉여인간)로서그렇게그들은스스로예비한몰락의수순을밟아갔다.한국의근대소설사는가히이들루저가미리쓴공모의종생기(終生記)나다름이없다.
우리근대의루저들이남긴그유언장을소설나부랭이라비아냥대는듯한환청에숱하게시달리면서도이책의집필을멈출수없었던이유는그들의글쓰기가생존을위한각혈과각골의기록이요,정신의고투이자노동이었다는사실을목격했기때문이다.또한이를기억하지않는후세들에게그들이가질억하심사를차마외면할수없었기때문이다.그렇게붙들린부채의식이이책의자산이자그천기를엿본필자가치르는죗값일터다.
한국전쟁의와중에도염상섭은장편?취우(驟雨)?(〈〈조선일보〉〉,1952.7~1953.2.)의연재를완결지은바있다.이작품의연재를앞두고그는다음과같은소회를밝혔다.

나는이번난리를겪으면서문득문득머리에떠오르는것은썰물같이밀려가는피난민의떼를담배를피우며손주새끼와태연무심히바라보는노인의얼굴과강아지의우두커니섰는꼴이다.길이편에서는소낙비가쏟아지는데마주뵈는건너편에서는햇살이쨍이비추는것을눈이부시게바라보는듯한그런느낌이다.생각하면이런큰환란을만난뒤에우리의생각과생활과감정에는이와같이너무나왕정뛰게얼룩이진것이사실이다.그얼룩을그려보려는것이다.

염상섭은그처럼난데없이찾아든동란을소나기에,그리고그후유증을얼룩에비유했다.소설의제목‘취우(驟雨)’는노자의?도덕경?의한구절,“사나운바람은아침내내부는일이없고,소나기는하루종일오는일이없다(故飄風不終朝驟雨不終日).”에서따온것이다.염상섭은이제목을내걸어미증유의전쟁역시언젠가는지나가고야말소나기처럼생의한순간에지나지않는다고말한다.하여소설은죽음이문밖에기다리고있는전시에도돈과사랑을향한일상의욕망이평시와다를바없이활개젖는현실을이야기한다.2019년인류역사상최악의재난이될지도모를역병이창궐했다.한때의소나기라낙관하기엔우리모두강이편불한가운데서있다.그러나염상섭의무심한눈길을스쳤던것처럼삶은계속되고,이시간역시이내지나간미래가될것이다.그날이오기까지과거의소설을읽는일이우리에게정신의면역력을선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