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고전을 통해 지금 여기, 현재의 삶을 성찰하다.
잠 못 이룰 정도의 그리움이 그립다.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져서 그렇게 그립다.
잠 오지 않는 밤의 꿀 수 없는 꿈이 그립다.
한자 ‘莫(막)’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해[日]가 없으면 저물녘[暮]이 되고, 물[氵]이 없으면 사막[漠]이 되며, 아무것도 없는 집[宀]은 적막[寞]이 된다. 그리워한다는 뜻의 ‘慕(모)’자 역시 지금 곁에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心)이 분명한데, 조선조 명신 김상용은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겼다.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그 더욱 거짓말이
나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리오
임이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더구나 사랑하면 꿈에 나타나 보인다는 말은 더 믿을 수 없는 거짓인데, 그 이유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으니 꿈에서 볼 일조차 없는 까닭이다. 실제로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꿈에서나마 볼 수 있는 길조차 막힌, 현실에서든 상상에서든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그런 임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작가의 개인사를 헤아려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로도 푸는 모양이지만, 어떻게 보든 빼어난 연시(戀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시를 이해하기에는 현대사회는 너무도 촘촘하고, 편리하고, 신속하게 연결되어 있다. 10년 전 오늘 무엇을 했는지는 지금 당장 자신의 폰을 여는 수고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날 찍은 사진이 시간과 장소까지 정확하게 남아 있으며, 그날 누군가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연인과 실시간 메시지 전송은 물론 현재 모습을 화상으로 보며 음성으로 대화를 해볼 수도 있다. 버튼 하나 누르는 수고로 단번에 알 수 있으니 꿈에서라도 보려고 애쓰던 그리움의 강도가 매우 약해진 것이다. 아니, 그리워하는 것 말고도 할 것이 너무 많은 현대 문명사회의 밤은 그런 그리움의 원천을 아예 빼앗아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에게 시 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어떤 학생이 수업은 안 듣고 자꾸 제 폰을 만지고 있는 것 같아 주의를 주었더니 그 학생 대답이 걸작이었다. “하도 감동스러워서 친구한테 보내느라고요.” 그날 다룬 시가 모두 사랑시였으니 아마도 여자친구에게 보낸 듯했다. 그러나 감동이 밀려오면 잠시 거기에 빠져들어 보기도 하고, 친구에게 보내고싶으면 수업 끝나기를 기다릴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도 있으련만, 즉각 무언가를 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태가 야속하다.
하긴 상대에게 짧은 문자 메시지 하나를 달랑 보내놓고는 이내 답이 없다고 “비(非)매너”를 운운하는 세태에서, 그저 어떻게는 말이나마 전해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거나 편지를 보내놓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열흘 남짓은 행복하다는 마음은 시대착오적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정말 소중한 것이라면 그렇게 즉답이 가능한 곳에 있지 않을 터, 잠 못 이룰 정도의 그리움이 그립다.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져서 그렇게 그립다. 잠 오지 않는 밤의 꿀 수 없는 꿈이 그립다.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져서 그렇게 그립다.
잠 오지 않는 밤의 꿀 수 없는 꿈이 그립다.
한자 ‘莫(막)’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해[日]가 없으면 저물녘[暮]이 되고, 물[氵]이 없으면 사막[漠]이 되며, 아무것도 없는 집[宀]은 적막[寞]이 된다. 그리워한다는 뜻의 ‘慕(모)’자 역시 지금 곁에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心)이 분명한데, 조선조 명신 김상용은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겼다.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그 더욱 거짓말이
나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리오
임이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더구나 사랑하면 꿈에 나타나 보인다는 말은 더 믿을 수 없는 거짓인데, 그 이유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으니 꿈에서 볼 일조차 없는 까닭이다. 실제로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꿈에서나마 볼 수 있는 길조차 막힌, 현실에서든 상상에서든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그런 임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작가의 개인사를 헤아려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로도 푸는 모양이지만, 어떻게 보든 빼어난 연시(戀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시를 이해하기에는 현대사회는 너무도 촘촘하고, 편리하고, 신속하게 연결되어 있다. 10년 전 오늘 무엇을 했는지는 지금 당장 자신의 폰을 여는 수고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날 찍은 사진이 시간과 장소까지 정확하게 남아 있으며, 그날 누군가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연인과 실시간 메시지 전송은 물론 현재 모습을 화상으로 보며 음성으로 대화를 해볼 수도 있다. 버튼 하나 누르는 수고로 단번에 알 수 있으니 꿈에서라도 보려고 애쓰던 그리움의 강도가 매우 약해진 것이다. 아니, 그리워하는 것 말고도 할 것이 너무 많은 현대 문명사회의 밤은 그런 그리움의 원천을 아예 빼앗아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에게 시 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어떤 학생이 수업은 안 듣고 자꾸 제 폰을 만지고 있는 것 같아 주의를 주었더니 그 학생 대답이 걸작이었다. “하도 감동스러워서 친구한테 보내느라고요.” 그날 다룬 시가 모두 사랑시였으니 아마도 여자친구에게 보낸 듯했다. 그러나 감동이 밀려오면 잠시 거기에 빠져들어 보기도 하고, 친구에게 보내고싶으면 수업 끝나기를 기다릴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도 있으련만, 즉각 무언가를 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태가 야속하다.
하긴 상대에게 짧은 문자 메시지 하나를 달랑 보내놓고는 이내 답이 없다고 “비(非)매너”를 운운하는 세태에서, 그저 어떻게는 말이나마 전해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거나 편지를 보내놓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열흘 남짓은 행복하다는 마음은 시대착오적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정말 소중한 것이라면 그렇게 즉답이 가능한 곳에 있지 않을 터, 잠 못 이룰 정도의 그리움이 그립다.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져서 그렇게 그립다. 잠 오지 않는 밤의 꿀 수 없는 꿈이 그립다.
그리움의 그리움 (고전 칼럼)
$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