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전기·실화적 수필체로 묘사한 궁중소설
전기·실화적 수필체로 묘사한 궁중소설
이 책은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1667~1701)의 생애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인현왕후성덕현행록》을 바탕으로 풀어써서 작품화한 전기·실화적 수필체의 궁중소설이다. 또한 부록으로 《인현왕후전》 필사본을 수록했다. 작자는 인목대비의 나인이라는 설과 문체 및 사실 등을 들어 인목대비가 직접 지은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최근의 연구로는 왕후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나 왕후의 친정 일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인현왕후는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특히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왔던 장소의가 왕자 균을 낳고 희빈으로 승격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갖은 모략과 간계에 시달린다.
이 소설은 어진 인현왕후의 파란만장한 사건의 흥미뿐 아니라 일종의 교훈서로 널리 알려져 오고 있으며, 국문학 자료 및 당시의 궁중 풍속과 생활 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인현왕후전》은 국문학사상 3대 궁중수필의 하나로 불리며, 본디 서명은 ‘인현왕후덕행록’으로 ‘민중전덕행록’ ‘민중전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저마다 다른 한글 필사본이 15종 이상 전해지며 옛 활자본으로 된 ‘민중전실기’도 있다.
인현왕후전은 지은이와 때를 알 수 없어 전해져오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조금씩 바뀌었고, 심지어 역사소설로 고쳐 쓰인 것도 있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딸로 1681년(숙종 7)에 가례해서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689년에 장희빈의 아들이자 왕자 균(경종)의 책봉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었을 때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 당하고 서인이 되었다. 그 뒤 1694년에 갑술옥사가 일어나 장희빈이 목락하며 복위되었다. 인현왕후는 예의가 바르고 언행이 청초했으나 소생이 없었다. 당파 싸움이 심하던 숙종조에 인형왕후는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34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해설을 쓴 문학박사이자 교수, 수필가 이상보는 숙종·인현왕후·인경왕후·민유중·송시열·박태보·장희빈·장희재 등 작품 이해를 돕는 주요 작중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인현왕후는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특히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왔던 장소의가 왕자 균을 낳고 희빈으로 승격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갖은 모략과 간계에 시달린다.
이 소설은 어진 인현왕후의 파란만장한 사건의 흥미뿐 아니라 일종의 교훈서로 널리 알려져 오고 있으며, 국문학 자료 및 당시의 궁중 풍속과 생활 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인현왕후전》은 국문학사상 3대 궁중수필의 하나로 불리며, 본디 서명은 ‘인현왕후덕행록’으로 ‘민중전덕행록’ ‘민중전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저마다 다른 한글 필사본이 15종 이상 전해지며 옛 활자본으로 된 ‘민중전실기’도 있다.
인현왕후전은 지은이와 때를 알 수 없어 전해져오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조금씩 바뀌었고, 심지어 역사소설로 고쳐 쓰인 것도 있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딸로 1681년(숙종 7)에 가례해서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689년에 장희빈의 아들이자 왕자 균(경종)의 책봉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었을 때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 당하고 서인이 되었다. 그 뒤 1694년에 갑술옥사가 일어나 장희빈이 목락하며 복위되었다. 인현왕후는 예의가 바르고 언행이 청초했으나 소생이 없었다. 당파 싸움이 심하던 숙종조에 인형왕후는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34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해설을 쓴 문학박사이자 교수, 수필가 이상보는 숙종·인현왕후·인경왕후·민유중·송시열·박태보·장희빈·장희재 등 작품 이해를 돕는 주요 작중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인현왕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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