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7년간의 전쟁을 끝내며 적의 총탄에 맞아 스러지는 와중에도
장차 나라 일이 어찌 될지,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던 성웅이자 민족적 영웅,
충무공 이순신 진중일기
7년간의 전쟁을 끝내며 적의 총탄에 맞아 스러지는 와중에도
장차 나라 일이 어찌 될지,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던 성웅이자 민족적 영웅,
충무공 이순신 진중일기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전라남도좌수사가 된 임진년(1592년),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날인 무술년(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일기이다. 충무공이 몸소 진중에서 기록한 수기로, 이 충무공의 사적이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자 국보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기에는 임지왜란 7년간 이 충무공의 진중 생애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공은 어려서 이웃 어린이들과 놀 때도 언제나 전쟁놀이를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반드시 대장이 되어 딴 아이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 충무공은 숭고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지극한 충성과 막강한 통솔력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웅이며, 임진왜란 중 국가의 운명을 홀로 붙들었던 민족적 은인이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안개 끼고 비가 잠시 내리다가 늦게 갰다. 선창에 나가서 쓸 만한 판자를 고르는데, 마침 피라미 떼가 웅덩이 안에 몰려들었기에 그물을 쳐서 2000여 마리를 잡았으니 가위 장한 일이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와 술을 마시면서 함께 새봄 경치를 구경했다.” (임진년 2월 1일 일기)
“조수를 따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을 가지고 명량을 등지고서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약속하기를, “병볍에 이르기를, 꼭 죽으려고 하면 살고 꼭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1000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모두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즉시 군율에 의해서 다스려서 조금도 용서치 않으리라” 하고 재삼 엄격히 신칙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지시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길 것이요,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 했다. (계묘 9월 15일)
“여러 겹으로 포위당해서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어, 온 배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낯빛이 질린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다보니 멀리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이 틈을 타서 더 태어들 것이어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다. 이에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 내리는 기를 세우라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으나,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고, 거제 현령 안위의 배는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하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한다. 나는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나 적의 형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했다.이 두 배가 적진을 향해서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게 지휘하여 안위의 배에 마치 개미떼처럼 붙어서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한다. 이에 안위와 그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각각 죽을 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럽게 치다가 배 위의 사람이 거의 힘이 다하게 되었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적에게 들어가서 비가 퍼붓듯이 마구 총을 쏘니 세 배의 적들이 거의 모두 쓰러진다. 이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서 쏘아 죽이니 적이 한 놈도 움직이지 못한다.” (갑진년 9월 16일 일기 중에서)
“맑고도 서북풍이 크게 불었다.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서 말하기를, “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한다”고 한다. 통분할 일이다. 나라 일이 장차 어이 되려는가?” (무오년 10월 6일 일기)
- 본문 중에서
공은 어려서 이웃 어린이들과 놀 때도 언제나 전쟁놀이를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반드시 대장이 되어 딴 아이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 충무공은 숭고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지극한 충성과 막강한 통솔력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웅이며, 임진왜란 중 국가의 운명을 홀로 붙들었던 민족적 은인이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안개 끼고 비가 잠시 내리다가 늦게 갰다. 선창에 나가서 쓸 만한 판자를 고르는데, 마침 피라미 떼가 웅덩이 안에 몰려들었기에 그물을 쳐서 2000여 마리를 잡았으니 가위 장한 일이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와 술을 마시면서 함께 새봄 경치를 구경했다.” (임진년 2월 1일 일기)
“조수를 따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을 가지고 명량을 등지고서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약속하기를, “병볍에 이르기를, 꼭 죽으려고 하면 살고 꼭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1000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모두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즉시 군율에 의해서 다스려서 조금도 용서치 않으리라” 하고 재삼 엄격히 신칙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지시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길 것이요,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 했다. (계묘 9월 15일)
“여러 겹으로 포위당해서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어, 온 배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낯빛이 질린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다보니 멀리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이 틈을 타서 더 태어들 것이어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다. 이에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 내리는 기를 세우라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으나,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고, 거제 현령 안위의 배는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하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한다. 나는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나 적의 형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했다.이 두 배가 적진을 향해서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게 지휘하여 안위의 배에 마치 개미떼처럼 붙어서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한다. 이에 안위와 그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각각 죽을 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럽게 치다가 배 위의 사람이 거의 힘이 다하게 되었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적에게 들어가서 비가 퍼붓듯이 마구 총을 쏘니 세 배의 적들이 거의 모두 쓰러진다. 이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서 쏘아 죽이니 적이 한 놈도 움직이지 못한다.” (갑진년 9월 16일 일기 중에서)
“맑고도 서북풍이 크게 불었다.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서 말하기를, “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한다”고 한다. 통분할 일이다. 나라 일이 장차 어이 되려는가?” (무오년 10월 6일 일기)
- 본문 중에서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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