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선 작품선

이범선 작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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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950년 6·25가 남긴 우리 민족의 상처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잔잔한 이범선의 소설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작가 이범선은 50년대적 관점에서 선량한 사람들의 피해의식만 조명했으나, 이미 우리 사회는 ‘인정’의 단계쯤은 누구나 파괴할 수 있는 강심장들만이 우글거리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이범선의 소설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느낌일 수도 있을 만큼 새로운 감회를 준다. 농경사회의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의식이 지배하던 시대의 인정삽화가 이범선 소설의 구수한 장점이자 한계이기 때문이다. 〈학마을 사람들〉, 〈오발탄〉 등 여섯 작품을 실었다.
저자

이범선

저자:이범선
소설가.평남안주출생이며호는학촌(鶴村).1955년《현대문학》에김동리의추천으로단편〈암표〉,〈일요일〉을발표하면서문단에등장했다.대표작인〈오발탄(1959)〉은6·25전쟁후처절한삶을살아가는한가족의일상사를통해민족분단문제를그려냈다.인간이세상에태어난것이‘조물주의오발탄’이라는주인공의절규와,발광한노모의모습을통해서전쟁의폭력성과월남민들의비애를심도있게보여주고있다.

목차


이책을읽는분에게5

암표(暗標)13
일요일(日曜日)21
학(鶴)마을사람들32
피해자(被害者)60
오발탄(誤發彈)168
표구(表具)된휴지(休紙)211

연보219

출판사 서평

이책을읽는분에게

선량한사람들이받은삶의상처
―임헌영(문학평론가)

10편의장편과70여편의중단편을남긴이범선의소설세계에는1950년6·25가남긴우리민족의상처가곳곳에도사리고있다.평안남도안주군신안주면운학리의대지주집안에태어난이범선은고향이학의이미지를주는이름이었듯이작가자신도일생을고고한학처럼세속에물들지않은채잔잔히살다갔다.

무대를강원도로잡았으나정작은작가자신의고향을연상시키는〈학마을사람들〉은민속적인학의전설과이를믿고소박하게살고있는마을사람들이일제식민지부터해방과6·25동란을겪으면서어떤수난을받았는가를차분하게그려준다.유지급인이장영감과서당의박훈장은의좋은전형적인우리시골사람으로마을사람모두가잘살도록앞장선다.그러나그손자들(덕이와바우)은처녀봉네를두고서로좋아하며다투다가덕이가그녀와결혼하게되자바우는마을을떠난다.6·25가터지자바우는홀연히나타나동인민위원회장이되어미신같은이야기를쫓고자학을향해총을쏴댄다.인민군의후퇴와함께바우가마을을떠나자다시평화가오는가했으나1·4후퇴로사람들은다시피난길에오른다.수복후마을에들어온사람들은학나무와이장집과봉네의집이타버린채새까만뼈대만남은걸발견하고는바우를떠올린다.그런데손자를기다리느라마을에남았던박훈장의시체가이장의무너진집벽밑에서발견된다.그날밤이장도“학,학나무를,학나무를……”이라고더듬거리며세상을떠나덕이는두위패를모신다.

작가는여기서분단의비극을그리는데,이념의문제를완벽하게삭제해버린다.바우는실연때문에사회주의자가된것처럼그려지며,그런바우는고향에와서도농지개혁이나어떤정치·경제적인행위보다는학을없애려는일에먼저손을댔는데,이것은이범선이지닌지주집안출신으로월남해온작가의식의소산임을느끼게한다.작가는역사와민족의운명을사회과학적인관점으로해부하기보다는정서적인태도로접근하여학의나타남과사라짐,제새끼를물어죽이기,새끼낳는수의많고적음등등으로풍년과가뭄과국가의길흉을예견한다.전설적인세계에서사람들이사는모습은원초적으로같을수밖에없다는작가의세계관이스며있는작품이다.

여기서작가가이장과박훈장이어떤정치적인대립속에서도오해나불화가없이믿고사랑하는관계를유지할수있었다는모습을보여주었다는사실은상징적이다.손자들의대립도이들의우애를저버릴수없었고,끝내는박훈장은자기손자에의하여강요받은적대감조차도거절한채죽어갔음을암시하고있다.작가가이런죽음을통하여제시하는것은소박한인간주의적삶의진솔함이다.이런인간주의에는승리자도패배자도없다.다만선량하기때문에겪지않을수없는삶의상처가있을뿐이다.

이장도박훈장도서로를미워하고원수가될수없는것은보통사람의선량함때문이며,그들은자신이잘살기위하여남을죽여야한대도그렇게는못할인간상들이다.바우역시마찬가지여서그는학을죽일수는있어도마을사람들은그러지못했다.서로가좋아했던봉네에게도비인간적인행위는하지않았다.우리나라의다른분단소재소설들은이럴경우예외없이개인적인앙갚음으로옛연인을정복하는것으로사건을전개하는데,이범선은악인을그리는데소질이없을뿐만아니라세상에악인은아예없다고치부한다.가해자이기보다는차라리피해자인편이이범선문학이창조한인간상들이다.

〈오발탄〉도그렇다.송철호일가는모두가피해자들이나원수를갚기보다는차라리자신들이불행하게살아가는길을택한다.동생영호가강도짓을하다가들키자‘인정’때문에죽이지못한게화근이되어체포당한것은이범선소설의참모습이다.

양심이란손끝의가십니다.빼어버리면아무렇지도않은데공연히그냥두고건드릴때마다깜짝깜짝놀라는거야요.윤리요?윤리.그건나이롱빤쯔같은것이죠.입으나마나불알이덜렁비쳐보이기는매한가지죠.관습이요?그건소녀의머리위에달린리본이라고나할까요?있으면예쁠수도있어요.그러나없대서뭐별일도없어요.법률?그건마치허수아비같은것입니다.허수아비.덜굳은바가지에다되는대로눈과코를그리고수염만크게그린허수아비.누더기를걸치고팔을쩍벌리고서있는허수아비.참새들을향해서는그것이제법공갈이되지요.그러나까마귀쯤만돼도벌써무서워하지않아요.아니무서워하기는커녕그놈의상투끝에턱올라앉아서썩은흙을쑤시던더러운주둥이를쓱쓱문질러도별일없거든요.흥.
――〈오발탄〉중에서  

영호가늘어놓는이런억설은50년대의분단사회를살았던사람들의생각을그대로대변한것이기도하다.이장이나박훈장같은세대가사라지고난뒤50년대의한국사회는홉스의《레바이아단》이생활교본이될정도로인간과인간이서로가이리인시대로접어든다.영호도사람에서늑대가되고자변신을꾀했으나그는기어이인간으로남을수밖에없었으며,그증거가그로하여금강도를하는데법률의망은넘어섰으나인정선에는철컥걸려체포된결말로반증된다.철호도영호도어쩔수없이영원한피해자적인간상으로남을것이며,이것이이범선소설의본질이기도하다.

이범선의첫작품인〈암표〉는글도모르는맏아들이군에서마을의김훈장이써준봉투에다일등병계급장만그려서보낸편지를받고서배워야한다는걸절감하고작은놈을중학교에보내겠다고생각을고치는최영감의심리적과정을그려준다.여기서배워야한다는지각은어떤면에서는선량한이범선의주인공으로부터멀어지는것을의미하기도한다.배움으로써남을지배하고이기주의적자세로자신의이익을위하여남을희생시키고도양심의가책을느끼지않는인간상을대량생산해내는것이자본주의사회의교육이기때문이다.그런데이범선이〈암표〉에서제기하는작은아들의중학교진학은무식을면하는정도에그치며,도저히악인으로환치될수없는토착적인간상에고착되어있음을알수있다.지게꾼으로도시에나간아들에게보낸고향농민의편지를소개한〈표구된휴지〉를보노라면이런사실은더한층명백해진다.

〈일요일〉은전형적인사소설적구성으로이뤄진소품인데,잡은임자를제치고자기모자에잠시도망해서앉았다고자기메뚜기라고우기는‘캡을쓴놈’은이범선이증오하는세계악의화신을상징한다.모자를썼다는것은뭔가권력이나재력이나악을행사할수있는힘을가진것을상징하는데,이작가는힘그자체를비인간화의원인으로거부한다.

힘(권력이든폭력이든금력이든)없는사람에의한인간다움의회복은저절로이루어지지않고많은희생이따른다는것을〈피해자〉는보여준다.고아원을경영하는장로의외아들로고이자란최요한은고아양명숙을좋아했으나부모의거절로목사의딸과결혼하게된다.최요한은고아원을뛰쳐나간양명숙과20년만에술집에서만나게된다.이들사이에는6·25,월남등등무수한세월의풍화가지나갔으나사랑에는변함이없었다.‘최목사’란별명을가진교사인최요한이학생들과경주로수학여행을갔는데몰래따라간명숙은이루지못할사랑을안은채자살하고만다.최요한은기독교신자인교직원들을향하여“그녀는피해자입니다.그리고그를죽인하수인은접니다.당신들의어리석은사주를받은어리석은등신요한입니다.아니하수인인동시에저도역시그녀와마찬가지로피해잡니다”라고말한다.

이지경에이르면이범선의선량한사람들의피해의식은외형적인것에만그치지않고심리적,윤리적인데에까지이르고있음을알수있고,그것은이작가가날카롭게당대의기독교가지닌위선을비판해준여러대목과연계된다.작가는〈오발탄〉을쓰고기독교계학교에서면직을당한적이있는데,작품곳곳에서그는당시의기독교지배층이비인간적으로신앙을왜곡시키고있음을정면으로풍자하고있다.

우리사회는분단이후선량한사람들이피해의식에젖어헤어날길이없는처지에있으며,그것은산업화이후에도변함이없다.

이범선은그나마도50년대적관점에서선량한사람들의피해의식만조명했으나,이미우리사회는‘인정’의단계쯤은누구나파괴할수있는강심장들만이우글거리는지경에이르고있다.이런시대에이범선의소설은한폭의수채화를보는느낌일수도있을만큼새로운감회를준다.농경사회의기본적인도덕과윤리의식이지배하던시대의인정삽화가이범선소설의구수한장점이자한계이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