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상무대’가 있던 광주 상무지구의 역사
발품으로 복원한 전인미답의 기록
발품으로 복원한 전인미답의 기록
광주 사람들은 김정호 씨를 ‘원장님’이라고 부른다. 올해 86세인 그는 지난 2010년 진도문화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조선일보, 전남일보, 광주일보, 무등일보 등에서 반평생을 기자로 일했으나 학계의 관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더라도 일일이 발품을 팔아 현장 중심의 역사를 정립해온 그는 언론인보다는 혜안 있는 향토사학자로 명망이 높다.
고령인 그가 지금 광주광역시청이 있는 상무지구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보석 같은 책 『요새의 땅, 광주 상무대』(심미안 刊)을 펴냈다. 광주 사람이라고 해도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군대가 주둔한 요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이 책의 편집자는 “원고를 검토하고 편집하는 동안 새롭게 알게 된 상무지구의 역사 앞에 부끄러움과 함께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상무대는 1951년 지금의 광주 치평동 일대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붙인 이름이다. ‘무(武)를 숭상하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이다. 1994년 전남 장성으로 이전하기까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육군 양성의 요람이었다. 1980년 5월 항쟁 당시에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을 살상하고 고문과 재판을 자행한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역사는 상식이다. 하지만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동족상잔과 상무대가 자리하기까지 이 지역이 번번이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례로 조선시대 군분면(軍盆面)은 한자 이름이 나타내는 것과 같이 군대를 주둔시킨 요새라는 뜻이다. 현재 무각사라는 절이 있는 망덕산 자락에는 쌍촌동 노치(老雉) 마을이 있었다. ‘치(雉)’라는 말에서 옛 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광주를 중심으로 떨쳐 일어난 ‘진훤’은 ‘왕건’과의 싸움에서 패해 ‘견훤’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고지도 광주 편에 ‘진훤대’와 ‘왕조대(왕자대)’가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오늘날의 신창동이 된 마지면(馬池面) 모신리 박메들에 방목평(放牧坪)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1760년대에 만든 『여지도서』에는 “방목평은 진훤대 아래에 있다. 전하는 말에 진훤이 머물며 진을 치고 말을 기르던 곳이라 한다.”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옛 기록이 현재의 지형과 차이가 있음에 주목한다. 진훤대 밑이라면 지금의 운암동이나 동림동 또는 상무대 들판이어야 하는데, 방목평으로 짐작되는 신창동은 현재 영산강 건너편인 것이다. 저자의 혜안이 빛나는 것은 이런 대목이다. 직강공사로 물길이 바뀐 광주천의 옛 물줄기를 일제 강점기의 지적도를 근거로 복원해 내듯이, 신창도 유적지를 징검다리 삼아 천 년 전 영산강의 물길을 지금과 달리 유추해 보는 것이다.
“신창동 유적은 영산강 물줄기가 지금처럼 산동교 쪽으로 고개를 틀어 흐른 것이 아니라 월봉산 동쪽 끝머리인 반촌동 쪽으로 흘러 신창동으로 흐르다가 어느 시기의 홍수 범람으로 물길의 머리에 토사가 쌓이면서 강머리를 돌렸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학자들은 시대에 따른 지형 변화를 살피지 않고 오직 어떤 장소에 대한 유물에만 관심을 갖는다. 나의 전제처럼 영산강이 지금처럼 운림동 산동교 곁을 흐르지 않고 신창동 쪽으로 흘렀다면 마지면의 매결 후백제 군주 진훤의 방목평은 지금처럼 영산강으로 운암동 들녘과 갈린 땅이 아니라 자연스레 운암동 진훤대와 한들녘이었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일본제국주의는 무슨 목적으로 광주천 직강공사를 하게 되었나.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선 과정은 어떠했나. 거기 터를 내린 마을들의 부침은 어떠한가. 해방 직후 미군정과 동족상잔을 겪으며 ‘상무대’가 들어선 배경과, 1980년 5월 항쟁 이후 군부대 이전과 함께 들어선 현재의 광주광역시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상무대와 광주의 희로애락을 아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의 기록이다. 관련 현장을 하나하나 촬영했고, 시군구와 국방부의 자료를 손이 닿는 대로 취합했다.
1백 년도 되지 않은 상무대의 역사가 어느새 희미해져 간다. 영산강과 광주천의 물줄기, 거기 깃든 마을과 사람들 그리고 상무대와 광주. 책 속에서 저자는 “정의란 언제나 승자의 것이고 역사란 승자에 의해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이치를 깨닫기 위해 역사를 공부한다.”고 강조했다.
1937년 진도에서 태어난 저자는 무등일보 편집국장, 전라남도농업박물관장, 사단법인 향토문화진흥원장, 광주광역시·전라남도 문화재위원, 문화재청 민속 감정위원, 문화관광부 21세기 문화정책위원, 진도문화원장 등을 역임했다. 광주광역시 시민대상, 장보고 선양 국민포장, 화관문화훈장, 대동전통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호남의 인문지리-동서 지역갈등의 사회사』 『광주산책』 『한국의 귀화성씨』 등 50여 권이 있다.
고령인 그가 지금 광주광역시청이 있는 상무지구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보석 같은 책 『요새의 땅, 광주 상무대』(심미안 刊)을 펴냈다. 광주 사람이라고 해도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군대가 주둔한 요새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이 책의 편집자는 “원고를 검토하고 편집하는 동안 새롭게 알게 된 상무지구의 역사 앞에 부끄러움과 함께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상무대는 1951년 지금의 광주 치평동 일대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붙인 이름이다. ‘무(武)를 숭상하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이다. 1994년 전남 장성으로 이전하기까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육군 양성의 요람이었다. 1980년 5월 항쟁 당시에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을 살상하고 고문과 재판을 자행한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역사는 상식이다. 하지만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동족상잔과 상무대가 자리하기까지 이 지역이 번번이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례로 조선시대 군분면(軍盆面)은 한자 이름이 나타내는 것과 같이 군대를 주둔시킨 요새라는 뜻이다. 현재 무각사라는 절이 있는 망덕산 자락에는 쌍촌동 노치(老雉) 마을이 있었다. ‘치(雉)’라는 말에서 옛 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광주를 중심으로 떨쳐 일어난 ‘진훤’은 ‘왕건’과의 싸움에서 패해 ‘견훤’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고지도 광주 편에 ‘진훤대’와 ‘왕조대(왕자대)’가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오늘날의 신창동이 된 마지면(馬池面) 모신리 박메들에 방목평(放牧坪)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1760년대에 만든 『여지도서』에는 “방목평은 진훤대 아래에 있다. 전하는 말에 진훤이 머물며 진을 치고 말을 기르던 곳이라 한다.”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옛 기록이 현재의 지형과 차이가 있음에 주목한다. 진훤대 밑이라면 지금의 운암동이나 동림동 또는 상무대 들판이어야 하는데, 방목평으로 짐작되는 신창동은 현재 영산강 건너편인 것이다. 저자의 혜안이 빛나는 것은 이런 대목이다. 직강공사로 물길이 바뀐 광주천의 옛 물줄기를 일제 강점기의 지적도를 근거로 복원해 내듯이, 신창도 유적지를 징검다리 삼아 천 년 전 영산강의 물길을 지금과 달리 유추해 보는 것이다.
“신창동 유적은 영산강 물줄기가 지금처럼 산동교 쪽으로 고개를 틀어 흐른 것이 아니라 월봉산 동쪽 끝머리인 반촌동 쪽으로 흘러 신창동으로 흐르다가 어느 시기의 홍수 범람으로 물길의 머리에 토사가 쌓이면서 강머리를 돌렸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학자들은 시대에 따른 지형 변화를 살피지 않고 오직 어떤 장소에 대한 유물에만 관심을 갖는다. 나의 전제처럼 영산강이 지금처럼 운림동 산동교 곁을 흐르지 않고 신창동 쪽으로 흘렀다면 마지면의 매결 후백제 군주 진훤의 방목평은 지금처럼 영산강으로 운암동 들녘과 갈린 땅이 아니라 자연스레 운암동 진훤대와 한들녘이었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일본제국주의는 무슨 목적으로 광주천 직강공사를 하게 되었나.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선 과정은 어떠했나. 거기 터를 내린 마을들의 부침은 어떠한가. 해방 직후 미군정과 동족상잔을 겪으며 ‘상무대’가 들어선 배경과, 1980년 5월 항쟁 이후 군부대 이전과 함께 들어선 현재의 광주광역시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상무대와 광주의 희로애락을 아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의 기록이다. 관련 현장을 하나하나 촬영했고, 시군구와 국방부의 자료를 손이 닿는 대로 취합했다.
1백 년도 되지 않은 상무대의 역사가 어느새 희미해져 간다. 영산강과 광주천의 물줄기, 거기 깃든 마을과 사람들 그리고 상무대와 광주. 책 속에서 저자는 “정의란 언제나 승자의 것이고 역사란 승자에 의해 왜곡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이치를 깨닫기 위해 역사를 공부한다.”고 강조했다.
1937년 진도에서 태어난 저자는 무등일보 편집국장, 전라남도농업박물관장, 사단법인 향토문화진흥원장, 광주광역시·전라남도 문화재위원, 문화재청 민속 감정위원, 문화관광부 21세기 문화정책위원, 진도문화원장 등을 역임했다. 광주광역시 시민대상, 장보고 선양 국민포장, 화관문화훈장, 대동전통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호남의 인문지리-동서 지역갈등의 사회사』 『광주산책』 『한국의 귀화성씨』 등 50여 권이 있다.
요새의 땅, 광주 상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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