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히로히토에게면죄부를주는가
히로히토(裕仁,1901-1989)는우리에게낯설지않은이름이다.일반인의앎속에그는124대일본천황이자,1926년부터집권해제2차세계대전을체험했으며,히로시마와나가사키에원자폭탄이투하된후,무조건항복선언을한인물로남아있다.또강경한우익성향의군부가주도했던태평양전쟁에서허수아비역할을했고,종전후에는상징적지위에머물면서심지어평화를설파했던것으로까지기억된다.히로히토라는이름은,태평양전쟁과일제강점기가거론될때총독부,일본우익,군부,가미카제특공대같은명칭들이나온뒤한참후에나따라오곤했다.일본본토와우방인미국은물론이고,일본과늘어딘가불편한관계였던한국과아시아여러국가들에서조차도히로히토가일본제국의잔악한현대사와태평양전쟁을주도했다는제대로된비난이나논의는나온적이없다.곧히로히토에게는늘일종의면죄부가주어졌던셈이다.
신간『히로히토평전,근대일본의형성』은이러한세간의인식을뒤엎는책이다.물경900페이지가넘는이책에서저자이자역사학자인허버트빅스는,일왕히로히토가태어날때부터전제군주로길러졌고,태평양전쟁에서도누구보다주도적인역할을했으며,따라서전쟁책임문제에서결코면죄부를받을입장이아님을적나라하게밝혔다.저자에따르면히로히토는한국과중국등아시아국가들에대한침략과공세,학살은물론이고,미국에맞선전쟁에서는전진과후퇴와같은소소한전술에이르기까지거의모든사항을장악하고통제한사실상의전쟁지도자였다.
종전후일본우익과미국은암묵적공조속에히로히토에게유약하고유명무실한천황이라는가면을씌워태평양전쟁에서히로히토라는이름을없애려했지만,그는냉혹하고잔인한군주였을뿐만아니라,기소조차도한번받지않고아흔살이가깝도록천수를누렸다는것이저자의냉정한진단이다.『히로히토평전,근대일본의형성』은학문적엄밀성과집요함을가지고,바로그히로히토의탄생에서죽음에이르기까지행적을,일본제국주의의형성과변화에이르는과정속에서면밀하게조명하고추적했다.
일본제국잔혹사와히로히토
근대일본은메이지천황이쇼군휘하막부의손에있던권력을장악했을때부터시작됐다.그전까지천황이하는일은지극히상징적인것으로,신도의축문을읊으며제사를올리고,시[和歌]를지으며예능을발현하는것이지군사나정치가아니었다.그러나메이지천황집권기에만들어진메이지헌법은정치와군사를장악한명실상부한전제군주로서천황의지위를보장했다.20세기에접어들어제국주의로발전한일본의잔혹한역사는그렇게그기반을닦은것이다.
그러나제도만으로는모든것을담보할수없었던것일까.메이지천황의아들요시히토(嘉仁,1912-1926년)는병약한인물이었다.천황에게주어진사상초유의막강한권력과권위에도불구하고주변에는천황에대한회의의눈길이끊이지않았다.의회정치실현을추구하는정치가,언론인,지식인들이등장했고,미국문화와개인주의가부상하는‘다이쇼데모크라시’의시대로접어든것이다.이런상황에서요시히토의아들이자메이지의손자인히로히토는강한천황의부활이라는일본우익의기대를한몸에받았다.그는어린시절부터엄격한군대식교육으로메이지천황의본을받도록훈육되었으며,당시이미제국주의국가로급부상하던일본의공격적행보에익숙해지도록의식화되었다.천황으로태어나천황으로길러졌으며,자기자신을전제군주이자신격을가진존재로인식하도록교육된것이다.
저자에따르면요시히토의사망직후에히로히토는다소어설픈모습을보였다.목소리는여자같았고,풍채는왜소했으며,대단한영민함이나정치적감각을보이지는않았기때문이다.그러나잇단해외순방과천황주변세력의끊임없는관심,천황제이데올로기를등에업고아시아패권재패를노리던우익군부의영향속에서점차지도자로서면모를드러내기시작했다.각료들과의회의에서중립적인입장을취하는척하면서도언제나손을들어주는쪽은강경한발언을하는군부쪽이었고,각종정책과군사전술에도점점깊숙하게관여하기시작했다.특히태평양전쟁이막바지에달할무렵에는군사지도자로서자신의위치를분명히했다.
예를들어히로히토는중국현지관동군이상부를명령조차따르지않고만주에서공격적인준동을하는것을유야무야눈감아주었고,결국만주사변을용인했다.당시사료와증언에따르면히로히토는충분히사태의확산을막고일본제국의향배를온건화할수있었는데도사실상잔인한패권적행보를승인한것이다.뿐만아니라히로히토는1930년대에이르러전황이일본에불리해지자독가스등화학무기사용을재가하기했으며,중국몇몇도시에대한무자비한대인공격을허락하기까지했다.1940년대들어서는우익세력의지지를얻고있던기도고이치(木戶幸一)를내대신으로임명했으며,중일전쟁확대문제로사임했던고노에후미마로(近衛文?)를다시수상으로임명하면서,동시에육군강경파도조히데키(東條英機)를육군대신으로삼는것을용인했다.아울러중국과한국이외의아시아국가들에대한침략을진두지휘했으며,개전에관한국제법조차어기면서하와이진주만공습을주도했다.
강경우익으로정계를좌지우지하고개편해가던히로히토는전쟁막바지에이르러패색이짙어졌을때는,우익세력의만류에도불구하고집요하고끈질기게일본의항전을주장했다.그가전쟁종결의사를비친것은미군의소이탄폭격으로60개이상의도시가초토화되었을무렵이다.
히로히토는오히려중신들편에기울어,전쟁종결은“다시한번전과를올린후가아니면좀처럼이야기하기어렵다”고했다.전하는바에따르면고노에는“그렇게말씀하실시기가과연오겠습니까.지금해야만합니다.반년,1년뒤에는아무런도움도되지않습니다”라고대답했다.그렇지만히로히토는자신의견해에집착했다.우리신민은초인적인노력과희생을감내할수있다.그렇기때문에석유자원을잃고매일공중폭격을받는다해도일본은승리할수있다.일본이마지막결전에서승리를거두면강화협상의전망이밝아진다.이것이천황의견해였다.-3장중
평화애호자라는가면그리고전쟁책임론
일본의무조건항복으로결국전쟁은끝났으나,냉전체제에서일본을방위세력으로만들려는맥아더주도의연합국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GeneralHeadquarters,GHQ)와천황제의존속으로자신들의안녕을바랐던일본집권세력의담합에의해,히로히토는면죄부를받았다.천황의지위를유지하는것은물론이고,전범재판에서기소되지않는동시에다른전범들의증언에서그의이름이거론되는일이없도록사전담합과여론조작도행해졌다.
히로히토대신전쟁책임을뒤집어쓴도조히데키는법정에서,“평화를바라는천황의의사에반하여기도고이치(木戶幸一)가어떤행동을취하거나무언가진언한사례를기억하느냐”는질문에저도모르게“그런사례는물론없습니다.내가아는한은없습니다.뿐만아니라일본의신민이폐하의의사에반하여이러쿵저러쿵하는것은있을수없는일입니다.”라고말해놓고는이튿날바로발언을뒤집었다.이런과정을거쳐서,전제군주로길러진히로히토가최초로‘인간선언’을한‘상징천황’이되었다.
‘입헌군주’를자처했던히로히토의통치는메이지헌법의‘무답책(無答責:군주가정치적으로나법률적으로나어떠한책임도지지않는것)’으로보호되었는데,그는신하에게도백성에게도책임감이없었다.그가책임져야할것은오로지‘황조황종(皇祖皇宗)’에대한도리뿐이었다.황조는태양여신인아마테라스오미카미에서시작되어진무(神武)천황에이르는신화상의선조를뜻한다.황종은그뒤를대대로이었다고전해지는역대천황들을의미한다.1945년,항복을촉구한포츠담선언으로부터8월6일히로시마에원자폭탄이떨어질때까지,히로히토는포츠담선언에관해서는아무런말도행동도하지않았지만,7월25일과31일두번에걸쳐‘3종신기’를어떻게든보호해야한다는말은했다.패전을앞두고그가걱정한것은신하도백성도아니고‘국체’를상징하는‘3종신기(神器,검과곱은옥,청동거울)’의안위였으며,그가끝까지지키고자한‘국체(國體,nationalpolity)’는나라의제도나정치체제가아니라바로황조황종의후손인자기자신이었다.
천황이침략전쟁으로자기나라인민과다른나라사람들의삶을파탄에이르게한책임을지지않도록하면서,정치지배층은‘전쟁에대한책임’을온국민이나눠짊어져야할‘패전책임’으로바꿔놓았다.일본국민은도리어천황앞에서신하로서패배의책임을져야했다.그리고미군점령자들은한줌의‘군벌’에게가장큰책임을뒤집어씌우고천황과인민은일방적으로기만당한희생자라는생각을주입했다.천황이전쟁책임을지지않으니일본국민도책임을질필요가없었다.
이런가운데천황은종전후기회가있을때마다평화를설파하고다녔고,전쟁책임문제가불거질때마다자신에게는책임이없으며,오히려종전의공은자신에게있다고강조했다.미국방문때는디즈니랜드에서미키마우스와함께웃는모습을연출하며인자한평화애호자로서이미지를굳혔다.이토록합당하지않은가면과함께,그나마종전직후일본진보세력에의해표면화되는듯했던전쟁책임론은언제부터인가사라져버렸다.
히로시마원폭투하에대한질문에그는“원자폭탄이투하된것에대해서는유감으로생각합니다만,히로시마시민들에게는안된일이지만전쟁중이었기때문에어쩔수없는일이었다고생각합니다”고말했다.자신의통치하에일어났던일을무심하게방관하는듯한그의태도는많은일본인들에게지나친것으로여겨졌다.그의“어쩔수없다”는발언은히로시마를비극으로몰고간과정에서그가했던역할을완전히부인하는것으로,특히역사학자들을분개하게했다.-4장중
학문적엄정함과정의로운집요함으로써낸역작
이책은30년에걸쳐일본근·현대사에대한저술을하고,미·일양국에서일본사를강의해왔으며2001년까지일본히토쓰바시대학교대학원에서교수까지역임한허버트빅스빙햄튼대학교교수가10년에넘는기간동안집필한역작이다.2001년도퓰리처(논픽션부문)상을수상한이책서문에서저자는밝히길,집필과정에서수많은일본연구자들과관련자들로부터도움을받았으며,일본인장인으로부터는히로히토치세초기에대한증언까지확보했다.일본에서도『昭和天皇』이라는제목으로출간이된이책은일본과미국심지어한국정부까지공개적으로문제삼지않는히로히토의전쟁책임론이라는문제를전격적으로다룬다는점에서큰화제를모았다.
특히이책은단순히이데올로기적또는정치적입장에서히로히토의과거사문제를고발하는것이아니라,일본제국주의의형성과정에서히로히토가차지한위치,영향,궤적을치밀하고정교한학문적시선으로논했다는점에서큰특징이있다.이는헤아릴수없는희생자를낳은태평양전쟁의잔인한진실과책임소재를추적하려했던저자의집요함과균형감각을잃지않았던학문적엄정함덕분에가능한것이었다.
측근한사람은독백록의서문에,천황이“대동아전쟁의직?간접적원인,경과와종전에이르기까지의사정”에대해약술했다고기록했는데,이도사실과다르다.히로히토의진술에는천황자신과궁정관료들이차기총리대신을선임하고,독자적인국정방침을지시함으로써,1920년대중후반기에발전한정당정치제도를동요시켰던사실도들어있지않다.중국에서전쟁이어떻게시작되었는지도,확전을직접주도한일도,일본군육상부대와항공부대의움직임에대해서도말하지않았다.자신의인생에가장큰영향을미친경험이나사건,그로인해형성된가치기준,행동을규정하고인격을형성한사상등,히로히토가입을다문채침묵으로일관한것은이외에도많다.타인을희생하면서까지자신의지위를결사적으로지키려했던점에서그는근대의군주가운데가장솔직하지못했던인물축에들었다.-서장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