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으로부터 배운 것들
이 책은 충북 진천의 들판에서 나고 자란 시인이자 국어교사 장인수의 산문집이다. 서울에서 진천까지, 주말마다 농사 짓는 부모님을 따라 들판으로 나선 시인이 관찰한 농촌의 사계절이 오롯이 담겨 있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는 일에서부터, 여름 장마와 농작물을 지키기 위한 농부의 노고, 가을걷이와 풍성한 들판의 살림살이를 비롯해 고요한 농촌의 겨울나기를 시인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대자연의 섭리로 가득한 이 들판에서 생명의 본질과 자연의 언어를 체득했다고 말한다. 관능이 넘쳐나며 광야 같은 고독과 적멸이 있는 곳, 시간의 속성마저 다르게 느껴지는 이곳 들판에서 저자는 풍성한 ‘취(趣)’를 만끽하며 걷고, 뛰고, 놀다가 들판의 이야기를 기록해두기로 마음먹었다.
“들판에는 풍성한 ‘취(趣)’가 있다. 늘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 뭔가 재미난 일이 없나 하고 눈동자를 뱅글뱅글 굴리는 마음! 세상에 대한 순순한 호기심! 사물의 변화에 매 순간 자신을 열어놓는 자세! 사물을 취하되 사물의 변화와 더불어 놀고 싶은 마음! 대상을 만져보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며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을 드러내는 시선! 그것이 취(趣)였다. 들판은 온갖 취(趣)로 가득했다.” (「들어가는 말-들판의 소년이 광야의 울음을 찾아서」 중)
그러나 들판이란 사색과 흥취뿐만 아니라 생업의 현장이기도 했다. 일손이 바쁜 철이면 꼭두새벽에 고사리손이라도 보태야 했던 어린 시절, 야반도주라도 하는 가족들처럼 이고 지고 일터로 향하던 새벽길, 그렇게 한바탕 일을 마치고 들에서 먹었던 아침밥. 노동의 현장이기도 한 들판에서 저자는 언제나 계절과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법을 배웠다. 농작물 속에 숨어든 작은 미물들에서부터 논밭에 피어난 잡초와 꽃을 바라보며 생명의 유한함과 고유함을 발견하고, 소와 염소를 비롯한 가축을 돌보며 삶의 무게와 생육의 비밀을 조심스레 관찰했다. 그리하여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이 당연하다는 듯 세상의 중심이 되어 다른 생명을 희생 제물로 삼는 대신, 모든 생명이 제 가치와 역할을 존중받으며 나란히 존재하는 ‘들판의 인문학’은 불가능한 것인지, 진지한 성찰과 깊은 질문을 남긴다.
농투사니 부모님이 삶에서 길어 올린 지혜
저자는 언어를 가장 섬세하고 밀도 있게 다루는 시인이자,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교사다. 그런 저자에게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부모님의 언어란 별안간 땅강아지나 벼룩처럼 툭 튀어나와 자연과 삶의 파문을 일으키며 영혼의 수면을 치고 가는 물수제비 같은 것이었다.
“부모님의 언어는 농사꾼의 언어요, 길바닥에 너부러진 자갈 같은 언어요, 패랭이꽃 같은 언어다. 풀의 언어이며 가축의 언어다. 질경이와 바랭이와 망초가 자라는 곳에서 길어 올린 어휘들이다. 부모님이 쓰시는 속담이나 사투리는 대자연의 순연(純然)한 거름냄새며, 이슬이고, 야생화의 향기라고나 할까.” (「들어가는 말-들판의 소년이 광야의 울음을 찾아서」 중)
십 리 밖에서도 들릴 것처럼 큰 소리로 말싸움을 하다가도 나무그늘에서 나란히 막걸리를 들이켜며 언제 그랬냐는 듯 도란도란해지는 노부부의 다정함, 폭우가 쏟아지는 장마철이든 함박눈이 퍼붓는 한겨울이든 들판의 농작물 곁으로 ‘가장 좋은 거름’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아버지의 성실함과 우직함, 비 오는 날 하루 종일 퉁퉁 불은 발에서 장화를 벗겨내며 엉덩방아를 찧느라 터져버린 어머니의 웃음 등이 저자의 애정과 연민어린 시선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문명의 편리를 누리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오신 부모님의 언어는 평생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길어 올린 지혜를 거름으로 태어났기에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무게와 밀도, 반향과 울림을 더해간다. 살아온 세대와 경험이 다르다 해도 몸으로 경험한 삶과 그 삶에서 나오는 언어는 시공간을 초월해 오래도록 살아남지 않는가.
또한 저자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모든 것의 핵심은 뿌리이며 버릴 것과 기를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가르침,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가축의 도살과 손질도 스스럼없이 해내는 모습, 불타버린 집에서도 아들의 책가방을 제일 먼저 구해내던 든든한 웃음, 들판의 온갖 냄새가 배어있는 체취를 통해 무엇보다도 숭고하고 고답적인 배움을 전해주던 살아있는 교본이었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의 언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포개어 보며, 검게 그을리고 땀에 젖은 아버지의 근육을 경탄하며, 잠든 아버지의 갈라진 발등을 애처로워하며 가만히 그 곁에 눕는다. 아들은 점점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 간다.
시인의 언어로 담아낸 농촌의 사계
저자는 유난히 청각에 민감한 편으로, 과거를 생각하면 언제나 소리가 먼저 들려오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소개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개구리 우는 소리, 댑싸리비로 마당 쓰는 소리, 소가 되새김질하는 소리, 숫돌에 낫 가는 소리, 문틈으로 황소바람 들이치는 소리, 아궁이에서 솔가지 타닥타닥 타는 소리, 손 펌프질로 우물물 길어내는 소리, 찔레 덤불에서 날아오르는 벌떼 소리가 들려오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책은 그만큼 감각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로 그득하다. 현대 문명의 편리함 뒤로 사라져버린 그리 오래지 않은 옛 시절의 추억과 온기가 시인의 섬세한 묘사로 되살아난다. 산문 속에서도 군데군데 시를 읽는 듯 탁월한 우리말 문장과 리듬을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을 펼친 것에 후회가 없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꽃마다 향기와 색깔이 솟아난다. 노란 피, 빨간 웃음, 파란 절망, 분홍빛 현악 4중주, 초록 꽹과리, 하얀 뽕짝이 차고 넘쳐 흘러간다. 꽃밭은 색채의 군무이며, 범람이며, 해일이며, 탕진이며, 고갈이며, 사막이며, 은하수이며, 격랑이며, 초신성이다. 꽃밭은 색깔의 현기증이며, 순교이며, 아우성이며, 진군이며, 순례이며, 아제아제바라아제이며, 나무아미타불이다. 꽃은 세계 안에 있는 빛의 총량을 잘게 쪼갠 것이다. 그 쪼개진 것들의 퍼짐이다.” (「흙색과 꽃색은 서로를 핥고 스민다」 중)
이토록 깊은 감수성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힘은 과연 드넓은 초평의 자연 속에서 체득한 저자의 야성과 꾸밈없는 천진함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껏 절망하고, 부르짖고, 미쳐 날뛰며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되는 자연 속에서 그는 어느 새 자연과 닮은 사람이 되었다. 초평의 들판과 동식물에서부터 바람과 눈송이와 빗방울과 염소와 새떼들을 비롯해 관능의 희열과 우주의 열락까지를 자유롭게 오가는 솔직하고 건강한 사유.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감정이 흘러넘치며, 때로는 엉뚱하고 삐딱한 언어들이 인간과 생에 대한 온기를 가득 품은 채 지면 위에 펼쳐진다. 자연스럽게, 저 들판에 넘쳐나는 흥(興)과 취(趣)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