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시야에서벗어난역사들
와타나베노부유키가한일역사인식의차이로가장먼저언급하는것은,징용공소송에서한국대법원판결의골격이기도한‘한국병합은무효이자불법’이라는논리다.이는일본인으로서는‘헛소리’로들릴만큼이해하기어려운주장이다.그래서그는이태진교수가말한병합을위한일본의“분명히계산된지속적인노력”이무엇인지사료를찾아나선다.그과정에서,저자는동학농민전쟁의‘의병’이란존재와마주한다.“일본군의의병토벌은1911년까지계속되었다.그간의전투횟수는총2,852회이며,일본군은1만7,779명의폭도를살육했고,일본군전사자는136명이었다.싸움이가장치열했던1908년에는1,451회의전투에서일본군은의병1만1,562명을살육했다.다시말해,1908년한해동안한반도어딘가에서매일평균4회의전투가벌어졌고,30명정도의의병이살해된셈이다.”그리고이렇게덧붙인다.“이런사실을아는일본인은얼마나될까?부끄럽지만나는몰랐다.”그는의병토벌대로참여한한일본군의종군일지를살피며한반도에서일어난끔찍한살육의현장을되살려낸다.
다음은관동대지진의조선인학살사건이다.이역시많은일본인이“학살은없었다”고주장하고대부분그렇게믿고있다.저자는지진재해당시소학교아이들이쓴작문등의자료를찾아그현장상황을생생히복원한다.“많은사람이조선인을다리위에서칼로베거나쇠몽둥이로때리고창으로찔렀다.결국에는강물에던져버렸다.”“한사람이쇠갈고리로놈의머리를찍어나룻배로끌어당겼어요.마치목재를끌어당기는것같았어요.(…)쇠갈고리한방으로이미죽은놈을다시칼로베고죽창으로찔렀어요.”
저자는여기에그치지않고동학농민전쟁과관동대지진이라는두학살을연결하는고리를찾아낸다.그가해자인후비역병사와재향군인회그리고그들이속한자경단에대해당시사회적인상황과연결하여그조직의성격을분석하고이렇게말한다.“지진이덮쳐불안과공포의혼란속에서유언비어가흘러나왔다.재향군인에게는박진감넘치는상황이었고,그들은의심할여지없이유언비어를믿었다.(…)경찰기능을보완하기위해준비된것이자경단이었다.치안공백상태에서‘민중의경찰’로서의직무를다해야한다는의식이작용했을수도있다.그때문에어디에있는지알수없는적을찾는일에조금도멈칫거리지않았다.살의에차서과거한반도나대륙에서자행했던만행을일본내에서재현했다.그것이관동대지진당시자경단에의한조선인학살의기본적인구도였던게아닐까?”
왜일본인의기억에사라졌을까?
그렇다면왜이러한역사는일본인의기억에서사라진것일까?저자는개찬된『청일전사』를예로들며,정부와군이역사“기록을처분하거나정사正史를날조”했고,그로인해동학농민전쟁과3.1운동에서의조선인들의희생은일본인의기억에서사라지게됐다고말한다.관동대지진의기록또한마찬가지다.“누군가에의해조직적으로처분”되어조선인학살과관련된자료는거의찾아볼수없다.그뿐만이아니다.지진재해직후일본정부의조선인학살에대한방침은“정상참작을해야할점이적지않다.소요에가담한전원을검거하지않고현저한행위를한자로검거범위를한정한다”고발표한다.그리하여“모든시와마을구석구석까지폭동을일으키고,폭동을일으킨민중에의한살해가있었던”요코하마시에서조선인을살해한행위로기소된사람은‘단한명’으로기록된다.저자는이렇게덧붙인다.
“너무많은민중이가해자였다.지역사회는누가가해자인지잘알고있었지만,그모든사람에게죄를추궁하면엄청나게큰사건이되는것이었다.잘못된것이라고말하지도못했다.그러니유독악질적인범죄를제외하고는학살은없던일로할수밖에없었을것이다.정부도군도경찰도그리고민중도일본사회가하나가되어은폐하고잊어버리려했을것이다.이미일어난일은어쩔수없다며,책임을묻지않고반성도없이애매하게방치하면서흐지부지하다가그냥잊히기를기다린것이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