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으로부터시작된역사왜곡
「결정초안」은전체122장으로구성되어있었으나남아있는것은16장,두권분량이다.원고형식으로보아총38만4,540자였던것으로생각된다.이에반해8권50장으로되어있는『일청전사』는13만1,898자로「결정초안」에포함된분량의3분의2를삭제한결과물이라할수있다.
『청일전쟁과러일전쟁의진실』은『일청전사』와「결정초안」을비교분석하며일본내각과군이왜전쟁의기억을왜곡하려했으며숨겨진진실은무엇이었는지살펴보는책이다.
저널리스트이자논픽션작가인저자와타나베노부유키는일본의파멸을가져온소위대미전쟁을둘러싼자료들을찾다가새로운의문이꼬리를물기시작했다.그렇게새로운자료를계속찾아나가다보니청일전쟁에까지이르게되었는데가장중요한자료가되어야할일본군의기록으로는도무지실상을파악할수없었다.
예컨대일본에서는조선에서의동학농민군의움직임이관심을청일전쟁의발단이라고하지만『일청전사』에서농민군과싸운일본군부대의활동은찾아볼수없었다.농민군측의희생자는3만명이라고도하고5만명이라고도하지만일본군기록에는마치없었던일처럼되어있었다.청일전쟁에서도대체무슨일이있었을까,전쟁의실체는무엇이었을까.
저자는「일청전사결정초안」에서그실마리를찾는다.그리고거기서새로운사실들을찾아낸다.대본영의지시를따르지않는현지부대의독단적인행동,지휘관의개인적야망과사심에의한무모한작전,인명을경시하고병참을고려하지않는방만한부대운영등숨겨진사실을파헤쳐전쟁의실체에접근한다.그리고러일전쟁은물론이후의침략전쟁에서일본육군에나타난심각한결함과문제는이미청일전쟁에서부터시작되었음을밝혀내고있다.
『일러전사』의허구-이것은구술에그치기로한다
불편한사실을은폐,조작하여전쟁사를편찬하는작업은『일청전사』에서시작되었다.그리고이후간행된『일러전사』역시그런생각과경험을그대로답습했다.
러일전쟁을배경으로한시바료타로의『언덕위의구름』은일본인의역사관을크게뒤흔들었다.일본인들에게‘군신軍神’으로추앙받던육군대장노기마레스케를평범한장군으로,나라를불가피한희생으로여겨지던뤼순요새공략을둘러싼수많은전사자에대해어리석은작전으로인한불필요한죽음으로단정지었기때문이었다.
시바료타로가비판했던『일러전사』편찬과관련된참모본부내부자료가확인되었다.결정초안을처음공개한나까쓰카아키라가찾아낸「일러전사편찬강령」이었다.러일전쟁이끝난다음해인1906년에참모총장의이름으로간행한것으로그중「일러전사편찬에관한주의」라는제목의문서다.무엇을써서는안되는지를15개항목에걸쳐구체적으로제시해놓았으니『일러전사』역시일청전사와다를바가없었다.
겉으로만보기좋게꾸며진전쟁사에의문을품고있던,대좌이자육군대학교의병학교관이었던다니히사오는진실을규명하는러일전쟁사를만들어육군에남기고싶다는생각으로『기밀일러전사』라는강의록을만들었다.다니가강의한것은단1년뿐이고수강자는단지10명뿐인특별한강의였다.그『기밀일러전사』에는“이것은구술에그치기로한다”고적힌부분이있다.강의에서는말하지만,글로는남기지않겠다는설명이라고한다.
또한저자는『기밀일러전사』가발견되어같은제목으로출간된것은1996년,그로부터2년뒤에『일러전사』에비판적인시바료타로의『언덕위의구름』이신문에연재되기시작했다는것을짚어낸다.그리고『기밀일러전사』에서술된사실들을바탕으로군신으로추앙받던노기장군의실체,황당하기까지했던뤼순요새공방전의진실을짐작하게해주고있다.그리고정사로발간된『일러전사』를가리켜전쟁사라기보다는다이헤이키太平記같은군담소설의세계와도같다고일침한다.
전쟁의실체,비대칭공간에서의개인과집단의기억
『청일전쟁과러일전쟁의진실』은일본정부와군이국민에게알리고싶지않았던사실들을드러내보여주면서그렇게왜곡된전쟁사를정사正史로받아들이고있는일본인의역사관에어떤영향을끼쳤는지를살핀다.
저자는근대일본이최초로편찬한『일청전사』의경험과방침은이후러일전쟁에서도그대로답습되어『일러전사』와같이전쟁사의정형화가진행되었고,왜곡된전쟁사를바탕으로획일적인교육이이루어졌으며,결코“패배한적이없는”,“특별한일본”이라는환상을국민에게심어주었다고주장한다.
‘청일전쟁이후일본은자본주의의급속한발전을이루었지만,조선과중국은일본과열강의수탈대상,분할경쟁의대상이되었다.이른바‘강한’일본,‘늙은’중국,‘약한’조선이라는이미지프레임이만들어지게된출발점이었다.
근대이후한일관계는‘지배’와‘피지배’라는부조리한상황이연출되었고,그비대칭적관계는끊임없이그리고새롭게재생산되어왔다.한일관계의재정립을위해역사적체험과기억의차이점을다양한측면에서고찰하지않으면안되는이유도여기에있다.역사적사실과그에대한기억을되살리는작업은이책의대상인청일전쟁과러일전쟁당시의가해자/피해자모두를위해서도필요하다.‘
책속에서
참모본부는1904년부터1907년에걸쳐『일청전사』를총8권으로간행하여이전쟁의정사로여겨져왔다.조선국내에있는청나라병사를몰아내달라는조선정부의요청을받고전쟁을시작했다고기록함으로써,일본이전쟁을일으킨대의명분으로유포되었다.하지만실제로는일본군이서울왕궁을공격해국왕을사로잡고정권을전복시켜강제로얻어낸의뢰였다는것을「결정초안」은명확히기록했다.(p.18)
대본영은최대한빨리공격을시작하고싶었지만,내각은어디까지나“청나라가쳐들어왔으니어쩔수없었다”라는방식으로전쟁을벌이고싶었다.당시에는아직러시아의중재도진행중이어서내각은전쟁을개시하기로정하긴했지만,현지여단장에게직접전달하면전쟁이곧바로시작될것을우려한조치였다는것이다.의문점을애매모호하게하지않고그이유를제대로설명하는것이「결정초안」의기본편집방침이었던것같다.(p.46)
왕궁공격도,아산의청군과의전투내용도,부산항에서의혼란도,그이후의무모한행군도모두불필요한서술로치부한다.이어구체적으로어떻게해야할지그방침도제시한다.…일본은평화를원했지만,호전적인청나라로인해어쩔수없이전쟁이되었다는점을강조할것,실패한군사행동은기록하지말것,직접작전에관한것외에는맨뒤에덧붙이면된다는지시였다.(p.159)
패전당시근위사단장이었던모리다케시중장은전쟁지속을주장하는반란군장교들에게학살당하기전날,“러일전쟁을진지하게분석했더라면태평양전쟁의참화를피할수있었을것”이라고말했다.제71사단장이었던도야마노보루중장은패전직후진행된인터뷰에서“러일전쟁에서배우지않아노몬한에서참패했고,노몬한에서배우지않아대동아전쟁의패배를맞이했다”고말했다.(p.186)
그러나그런문제점들을삭제하고조작하여정사를작성했기때문에사실로기록되거나교훈으로전해지지도않았고,더군다나수정되지도않았다.뿐만아니었다.본래용납되어서는안되는무모한군사행동이내막을감춘결과만을근거로모범이되어야할성공사례나무용담으로받아들여지게되었다.…근대일본이최초로편찬한『일청전사』의이런경험과방침은이후전쟁에서도그대로답습되어전쟁사의정형화가진행되었다.이런전쟁사를바탕으로교육이이루어졌고,‘일본은특별하다’‘일본은패배한적이없다’는생각을국민에게심어주었다.(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