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긴박한 위기의 시대, 한국 정치의 갈 길을 따져 묻는다
김종욱은 2007년 「북한의 관료체제와 지배구조의 변동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다. 그러나 그의 관심과 열정은 서재와 강의실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는 정치학자이면서 우리 정치의 숨 가쁜 현장, 즉 국회, 정당, 행정부, 그리고 대통령 직속 기관인 청와대(대통령비서실)에서 두루 활동한 드문 이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이번에 펴내는 두 번째 단독 저서 『폭정에 맞서는 공감의 정치 - 따뜻한 세상을 꿈꾸며』는 남다른 경험을 쌓아오는 동안 저자가 세상과 정치에 관해 생각하고 궁리한 바를 소상히 풀어놓은 책이다. 여기에는 정치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넓은 의미의 정치철학적 질문, 그리고 한국에서 정치를 담당하는 세력은 어떤 관점에서 무슨 정책을 펼쳐야 하는가라는 구체적 고민과 구상이 어우러져 있다. 또 이러한 질문과 구상은 책의 마지막에 실린 글 「미래를 위한 정치: 석과불식碩果不食」이 잘 보여주듯이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에 닥친 절멸의 위기에 대한 저자의 성찰과 이어진 까닭에 긴급함과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첫 글 「들어가는 말: 내 삶의 궤적과 생각의 리듬」에 따르면 저자에게 정치란 『논어』에서 말하듯 “백성이 이롭게 여기는 것으로 백성을 이롭게 해주는 것”이다. 즉 백성의 뜻(民心)에 따르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정치를 업으로 삼은 자는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고 더불어 걱정해야 하며, 백성의 눈만큼 보고 백성의 귀만큼 듣는 민시민청民視民聽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예로부터 사람들이 이상적인 정치라고 여겨온 ‘사랑(仁)과 정의(義)의 정치’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정치의 이상이 끊임없이 배반당해온 과정이 인류의 역사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을 배반하는 정치, 곧 폭정을 저지르는 정치권력을 민중이 나서 부단히 응징하고 갈아 치워왔음도 역사가 증거하는 바다. 동아시아사에 점철된 반정反正과 역성혁명易姓革命, 서구 근대의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이 그 예다. 동양의 『맹자』와 미국의 독립선언문, 18세기 프랑스에서 나온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은 폭정에 대한 시민들의 항거를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규정한 점에서 같은 정신을 나누고 있다. 대한민국의 짧은 헌정사에 눈길을 줄 경우에도 시민들은 민심을 따르지 않는 위정자들에 대해 거듭 단죄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우리가 택한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줄곧 반복된 과오, 즉 친인척이나 측근의 권력형 부정부패, 승자 독식의 권력 구조로 인한 정치 갈등 심화, 경쟁과 타협이 아닌 ‘전쟁 정치’의 만연, 국정 마비와 예산의 낭비 등은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도 진행 중인 문제들이다. 이에 저자는 우리 사회에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비롯한 새로운 시도,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윤석열 정권의 폭정에 맞서 국민의 삶을 지키는 것이 이 시대의 정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처음 가는 길”,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을 다짐한다. 독자는 이러한 다짐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살아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대목 또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2부에 실린 두 편의 글은 한국 사회에 결핍되어 있고 따라서 절실히 필요하다고 저자가 판단하는 ‘공감의 정치’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한다. 「도시의 시민성과 ‘공감의 정치’: ‘유동하는 공포’를 벗어나 ‘행복국가’로」에서 저자가 진단하는 21세기는 “자본주의의 불평등 구조화에 따른 ‘파국’의 가능성과 인간의 지구 파괴에 의한 ‘파멸’의 가능성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시대”다. 이윤과 수익성을 최고 가치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 대다수는 불가피하게 가난해지거나 약자로 전락하며,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미래가 없을 것 같다는 공포, 인간에 의해 파괴당한 자연이 되돌려주는 전염병과 자연재해에 언제 속절없이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이러한 처지는 그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끈다. 세계적으로나 한국 사회 내적으로나 경제의 규모는 커지는데 대다수 인간의 삶은 불행해지는 역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불행할 뿐 아니라 타인들,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공격적이다.
이러한 불행 및 불행의식, 공격성의 만연을 관찰하면서 저자는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가 보기에 행복은 소득, 물질적 부의 증가에 연동되는 개념이 아니다. 1인당 GDP가 1만 5천 달러를 넘기면 소득과 행복 간의 연계가 없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인용된다. 저자에 따르면 행복은 오히려 타자(사람만이 아니라 동물과 자연까지 포함하는)에 대한 공감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감정 혹은 상태이며, 타자의 슬픔과 기쁨을 이심전심으로 공유하는 공감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속한다. 타자와 나누는 협력, 상호 신뢰, 존중, 연대, 그리고 여기서 태어나는 타자와의 공감은 행복의 불가결한 존립근거이자 내용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겪는 불행을 넘어서기 위한 출발점은 공감 능력 및 공감장共感場의 회복이 아닐 수 없고, 바로 그것을 통해 행복의 (재)창조를 겨냥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정치의 영역과 관련하여 이를 가능하게 할 수단을 그는 ‘공감의 정치’ 또는 ‘인애仁愛의 정치’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람과 생명을 사랑하는 공감 능력”에 바탕을 두고, 소득과 부가 아니라 행복을 최우선 가치로 놓는 정치다. 그런 정치의 싹을 저자는 공기, 땅, 물처럼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공유자산을 확보하고 늘리는 가운데 사회적 연대를 널리 형성하려는 커먼스(Commons) 운동에서 발견한다.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뒤처진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고 삶의 질을 바꾸기 위해 유럽, 뉴질랜드, 부탄 등에서 실행 중인 각종 행복 정책들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흐름이다. 저자는 한국의 정치가 나아갈 길도 이처럼 ‘공감의 정치’에 기반하여 ‘행복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2부의 또 다른 글 「‘민주화 이후 정치’를 넘어 ‘공감과 행복’의 정치로: ‘87년 체제’의 한계 극복을 위한 정치적 탈주脫走」는 ‘공감의 정치’를 저자가 몸 담았던 사회운동 및 정당이 지난 날 견지해온 ‘정의의 정치’와 대비시키고 있다. ‘정의의 정치’는 자신의 몫에 대한 정당한 분배를 주장하는 점에서 그 몫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과 쟁투를 전제하는데 한국의 ‘진보개혁진영’은 ‘적’과 ‘나’의 쟁투라는 이분법적 시각에 가둬진 나머지 잘못된 관행과 습속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즉 모든 문제점은 ‘적’에게 돌려지고 ‘나’는 도덕적·논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다는 편견과 아집이 구조화되었을 뿐더러, 대중의 구체적 삶의 실상은 충실히 주목받지 못했으며, 그래서 정의와 복지를 내세웠음에도 정작 실천의 결과는 ‘사랑 없는 정의’, ‘행복 없는 복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진보개혁진영’에 대하여 “민심을 알고 대중과 공감·소통하기 위한 전면적인 변화”, 곧 ‘공감의 정치’에 뿌리 내릴 것을 강하게 주문한다. 이전의 잘못을 넘어서는 관건은 “동시대 시민들이 느끼는 문제에 얼마나 공감하고 실천하는가”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의보다 인애가 우선한다는 것, 즉 사랑에 기초한 정의와 복지가 ‘공감의 정치’의 핵심이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과거의 한반도 역사를 다룬 3부의 두 글에서도 이어진다.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여성해방사상과 근대성 - 신분해방과 동학사상의 연계를 중심으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학이 수운 최제우과 해월 최시형이라는 두 교주를 중심으로 주창하고 실행한 신분타파, 인간평등, 여성해방 사상과 운동의 흐름을 다루고 있다. 성리학적 신분질서가 여전히 완강하고 여성들은 멸시받던 그 시절에 “사노비와 역참에서 일하는 사람, 무당의 서방, 백정 등과 같이 천한 사람들”이 양반, 평민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광경을 빚어내고,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한울님일 뿐 아니라 여성에 의해 새로운 시대, 곧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세상이 열릴 것임을 분명히 말한 동학의 선구성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대중의 구체적인 삶, 그들이 나날이 겪는 뼈저린 고통과 간절한 희원에 자신들을 일치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삶의 전망, 새로운 정치를 길어냈다는 점에서 동학 지도자들의 활동상은 저자가 말하는 ‘공감의 정치’의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의 정치’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항일연합항전 - ‘패치워크 역사 접근방법’을 통한 3·1운동의 재해석을 중심으로」의 바탕에도 놓여 있는 역사해석의 준거다. 이 논문은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망국을 가져온 장본인이라는 통념, 또 뇌일혈로 사망했다는 연구에 정면으로 맞서는 관점을 밝힌다. 즉 고종은 1910년 병탄 이전에도 국권 망실을 막으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했”고, 병탄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1919년 파리강화회의 밀사 파견, 북경 망명정부 설립을 추진하다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고종의 장례 직전에 발발한 3·1운동은 고종의 죽음에 공분한 백성들의 공감대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행동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 고종의 활동과 죽음이 ‘이심전심’이라는 ‘공감의 정치’ 작동법에 따라 3·1운동의 강력한 추진력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가 ‘공감의 정치’ 관점에서 이해하는 대중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네그리와 하트의 분석처럼, 대중은 권력에 묵묵히 따르는 것 같아도 그저 수동적인 수신자들이나 소비자들이 아니라 지배적인 메시지에 저항하며 새로운 표현 양식들을 개발해내는 존재들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지배질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 질서에 균열과 틈새를 만들고 더 나아가 체제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 책의 4부에 실린 「북한 주민과 관료의 ‘메티스’와 체제전환의 동학: 앙리 르페브르의 ‘대안공간’을 중심으로」는 이런 시각에서 핵 능력의 고도화, 시장의 확산, 일부 기업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던 2018년 북한의 주민들이 체제의 빈틈과 맹점을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활용하여 ‘대안공간’을 만들어내고, 이로써 체제를 변화시키는 양상을 살핀 글이다. 여기 제시된 시장화, 사유화, 사익 추구를 위한 주민과 관료의 담합 및 공모 같은 움직임이 북한을 어떻게, 얼마만큼 변화시킬지는 집필 당시의 저자에게 “희뿌연 파노라마”처럼 불확실한 것이었고, 몇 년이 지난 오늘의 독자들에게는 불투명·불가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해야 할 문제다. 저자는 2023년 12월, 이 책 머리글에 다만 이렇게 적었다. “북한 사회의 변화도 독재와 압제에 맞선 공감의 연대가 그 원동력이 될 것이다.”
첫 글 「들어가는 말: 내 삶의 궤적과 생각의 리듬」에 따르면 저자에게 정치란 『논어』에서 말하듯 “백성이 이롭게 여기는 것으로 백성을 이롭게 해주는 것”이다. 즉 백성의 뜻(民心)에 따르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정치를 업으로 삼은 자는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고 더불어 걱정해야 하며, 백성의 눈만큼 보고 백성의 귀만큼 듣는 민시민청民視民聽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예로부터 사람들이 이상적인 정치라고 여겨온 ‘사랑(仁)과 정의(義)의 정치’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정치의 이상이 끊임없이 배반당해온 과정이 인류의 역사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을 배반하는 정치, 곧 폭정을 저지르는 정치권력을 민중이 나서 부단히 응징하고 갈아 치워왔음도 역사가 증거하는 바다. 동아시아사에 점철된 반정反正과 역성혁명易姓革命, 서구 근대의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이 그 예다. 동양의 『맹자』와 미국의 독립선언문, 18세기 프랑스에서 나온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은 폭정에 대한 시민들의 항거를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규정한 점에서 같은 정신을 나누고 있다. 대한민국의 짧은 헌정사에 눈길을 줄 경우에도 시민들은 민심을 따르지 않는 위정자들에 대해 거듭 단죄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우리가 택한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줄곧 반복된 과오, 즉 친인척이나 측근의 권력형 부정부패, 승자 독식의 권력 구조로 인한 정치 갈등 심화, 경쟁과 타협이 아닌 ‘전쟁 정치’의 만연, 국정 마비와 예산의 낭비 등은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도 진행 중인 문제들이다. 이에 저자는 우리 사회에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비롯한 새로운 시도,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윤석열 정권의 폭정에 맞서 국민의 삶을 지키는 것이 이 시대의 정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처음 가는 길”,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을 다짐한다. 독자는 이러한 다짐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살아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대목 또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2부에 실린 두 편의 글은 한국 사회에 결핍되어 있고 따라서 절실히 필요하다고 저자가 판단하는 ‘공감의 정치’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한다. 「도시의 시민성과 ‘공감의 정치’: ‘유동하는 공포’를 벗어나 ‘행복국가’로」에서 저자가 진단하는 21세기는 “자본주의의 불평등 구조화에 따른 ‘파국’의 가능성과 인간의 지구 파괴에 의한 ‘파멸’의 가능성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시대”다. 이윤과 수익성을 최고 가치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 대다수는 불가피하게 가난해지거나 약자로 전락하며,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 미래가 없을 것 같다는 공포, 인간에 의해 파괴당한 자연이 되돌려주는 전염병과 자연재해에 언제 속절없이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이러한 처지는 그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끈다. 세계적으로나 한국 사회 내적으로나 경제의 규모는 커지는데 대다수 인간의 삶은 불행해지는 역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불행할 뿐 아니라 타인들,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공격적이다.
이러한 불행 및 불행의식, 공격성의 만연을 관찰하면서 저자는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가 보기에 행복은 소득, 물질적 부의 증가에 연동되는 개념이 아니다. 1인당 GDP가 1만 5천 달러를 넘기면 소득과 행복 간의 연계가 없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인용된다. 저자에 따르면 행복은 오히려 타자(사람만이 아니라 동물과 자연까지 포함하는)에 대한 공감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감정 혹은 상태이며, 타자의 슬픔과 기쁨을 이심전심으로 공유하는 공감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속한다. 타자와 나누는 협력, 상호 신뢰, 존중, 연대, 그리고 여기서 태어나는 타자와의 공감은 행복의 불가결한 존립근거이자 내용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겪는 불행을 넘어서기 위한 출발점은 공감 능력 및 공감장共感場의 회복이 아닐 수 없고, 바로 그것을 통해 행복의 (재)창조를 겨냥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정치의 영역과 관련하여 이를 가능하게 할 수단을 그는 ‘공감의 정치’ 또는 ‘인애仁愛의 정치’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람과 생명을 사랑하는 공감 능력”에 바탕을 두고, 소득과 부가 아니라 행복을 최우선 가치로 놓는 정치다. 그런 정치의 싹을 저자는 공기, 땅, 물처럼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공유자산을 확보하고 늘리는 가운데 사회적 연대를 널리 형성하려는 커먼스(Commons) 운동에서 발견한다.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뒤처진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고 삶의 질을 바꾸기 위해 유럽, 뉴질랜드, 부탄 등에서 실행 중인 각종 행복 정책들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흐름이다. 저자는 한국의 정치가 나아갈 길도 이처럼 ‘공감의 정치’에 기반하여 ‘행복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2부의 또 다른 글 「‘민주화 이후 정치’를 넘어 ‘공감과 행복’의 정치로: ‘87년 체제’의 한계 극복을 위한 정치적 탈주脫走」는 ‘공감의 정치’를 저자가 몸 담았던 사회운동 및 정당이 지난 날 견지해온 ‘정의의 정치’와 대비시키고 있다. ‘정의의 정치’는 자신의 몫에 대한 정당한 분배를 주장하는 점에서 그 몫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과 쟁투를 전제하는데 한국의 ‘진보개혁진영’은 ‘적’과 ‘나’의 쟁투라는 이분법적 시각에 가둬진 나머지 잘못된 관행과 습속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즉 모든 문제점은 ‘적’에게 돌려지고 ‘나’는 도덕적·논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다는 편견과 아집이 구조화되었을 뿐더러, 대중의 구체적 삶의 실상은 충실히 주목받지 못했으며, 그래서 정의와 복지를 내세웠음에도 정작 실천의 결과는 ‘사랑 없는 정의’, ‘행복 없는 복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진보개혁진영’에 대하여 “민심을 알고 대중과 공감·소통하기 위한 전면적인 변화”, 곧 ‘공감의 정치’에 뿌리 내릴 것을 강하게 주문한다. 이전의 잘못을 넘어서는 관건은 “동시대 시민들이 느끼는 문제에 얼마나 공감하고 실천하는가”라고 보기 때문이다. “정의보다 인애가 우선한다는 것, 즉 사랑에 기초한 정의와 복지가 ‘공감의 정치’의 핵심이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과거의 한반도 역사를 다룬 3부의 두 글에서도 이어진다.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여성해방사상과 근대성 - 신분해방과 동학사상의 연계를 중심으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동학이 수운 최제우과 해월 최시형이라는 두 교주를 중심으로 주창하고 실행한 신분타파, 인간평등, 여성해방 사상과 운동의 흐름을 다루고 있다. 성리학적 신분질서가 여전히 완강하고 여성들은 멸시받던 그 시절에 “사노비와 역참에서 일하는 사람, 무당의 서방, 백정 등과 같이 천한 사람들”이 양반, 평민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광경을 빚어내고,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한울님일 뿐 아니라 여성에 의해 새로운 시대, 곧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세상이 열릴 것임을 분명히 말한 동학의 선구성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대중의 구체적인 삶, 그들이 나날이 겪는 뼈저린 고통과 간절한 희원에 자신들을 일치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삶의 전망, 새로운 정치를 길어냈다는 점에서 동학 지도자들의 활동상은 저자가 말하는 ‘공감의 정치’의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의 정치’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항일연합항전 - ‘패치워크 역사 접근방법’을 통한 3·1운동의 재해석을 중심으로」의 바탕에도 놓여 있는 역사해석의 준거다. 이 논문은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이 망국을 가져온 장본인이라는 통념, 또 뇌일혈로 사망했다는 연구에 정면으로 맞서는 관점을 밝힌다. 즉 고종은 1910년 병탄 이전에도 국권 망실을 막으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했”고, 병탄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1919년 파리강화회의 밀사 파견, 북경 망명정부 설립을 추진하다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고종의 장례 직전에 발발한 3·1운동은 고종의 죽음에 공분한 백성들의 공감대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행동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 고종의 활동과 죽음이 ‘이심전심’이라는 ‘공감의 정치’ 작동법에 따라 3·1운동의 강력한 추진력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가 ‘공감의 정치’ 관점에서 이해하는 대중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네그리와 하트의 분석처럼, 대중은 권력에 묵묵히 따르는 것 같아도 그저 수동적인 수신자들이나 소비자들이 아니라 지배적인 메시지에 저항하며 새로운 표현 양식들을 개발해내는 존재들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지배질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 질서에 균열과 틈새를 만들고 더 나아가 체제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 책의 4부에 실린 「북한 주민과 관료의 ‘메티스’와 체제전환의 동학: 앙리 르페브르의 ‘대안공간’을 중심으로」는 이런 시각에서 핵 능력의 고도화, 시장의 확산, 일부 기업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던 2018년 북한의 주민들이 체제의 빈틈과 맹점을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활용하여 ‘대안공간’을 만들어내고, 이로써 체제를 변화시키는 양상을 살핀 글이다. 여기 제시된 시장화, 사유화, 사익 추구를 위한 주민과 관료의 담합 및 공모 같은 움직임이 북한을 어떻게, 얼마만큼 변화시킬지는 집필 당시의 저자에게 “희뿌연 파노라마”처럼 불확실한 것이었고, 몇 년이 지난 오늘의 독자들에게는 불투명·불가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해야 할 문제다. 저자는 2023년 12월, 이 책 머리글에 다만 이렇게 적었다. “북한 사회의 변화도 독재와 압제에 맞선 공감의 연대가 그 원동력이 될 것이다.”
폭정에 맞서는 공감의 정치 : 따뜻한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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