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참견하지 않는 마음

슬픔에 참견하지 않는 마음

$16.00
Description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존재의
낯설고도 익숙한 산책

차분함을 소심함으로
고요함을 우울증으로 예단하는 세상에서…
『슬픔에 참견하지 않는 마음』은 플라뇌르(Flaneur, 산책자)로서 시인이 지나온 장소와 그 장소에 스민 사람들, 그 장소가 떠올린 먼 순간들을 담은, 전영관 시인의 산문집이다. 굳건하게 믿어온 가l치관과 기준이 흔들리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일보다도 친구보다도 숙면을 택할 만큼 자기착취에 지친 이 시대에 “인간은 사랑 말고 또 어떤 것을 발명해내야 살아갈 수 있는지” 시인은 질문을 던진다. 비판이나 주장이 아닌, 혼자서 혹은 가까운 이들과 함께한 시간과 공간을 가만 들여다보는 사색의 문장들을 통해. 그 사이에서 비치는 또는 고백된 시인의 자화상은 “세 끼니를 다 챙겨도 허우룩한”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고, “나날의 애달픔이 완화”될 위로를 안기고자 한다.
저자

전영관

저자:전영관

2011년작가세계신인상으로데뷔.저서로시집『미소에서꽃까지』,『슬픔도태도가된다』등이있고산문집『슬퍼할권리』,『좋은말』,『이별과이별하기』등이있다.

목차

작가의말

1부책상의역사
콜드브루/여밈/물멍/속초비가悲歌/답을기대하는인간/너는누구인가/논공행상/일인구급대/월요일/예감/존버정신/태그호이어/역습/비탈에선명품/선풍기뒤에있는것들/책상의역사/의료봉사/플라뇌르/오지랖/칼국수수사학

2부다정과소란
학을떼다/퇴고가최고/기준/웃는염소/소나기/높이와깊이/다정과소란/어제,진관사/청평호물빛과눈빛/선유도공원/다정/시그널/다섯손가락/안녕/인수인계/장르통합/전략/칠푼이

3부안부,호기심
love,like/안부,호기심/기억,추억/예술,기술/공짜,무료/해설,리뷰/매력,매혹/감성,감상/포기,자유/열정,집착/정서,서정/차별,편애/불안,두려움/강박,의무/집착,미련/핑계,원인/후회,반성/표현,설명/죄책감,수치심

4부그시집
『가능주의자』(나희덕|문학동네|2021년12월)
『해바라기밭의리토르넬로』(최문자|민음사|2022년3월)
『그라시재라』(조정|이소노미아|2022년6월)
『바람불고고요한』(김명리|문학동네|2022년9월)
『수건은젖고댄서는마른다』(천수호|문학동네|2020년11월)
『심장보다높이』(신철규|창비|2022년4월)
『생물학적인눈물』(이재훈|문학동네|2021년11월)
『저게저절로붉어질리는없다』(장석주|난다|2021년12월)
『사랑이라는신을계속믿을수있게』(이병철|걷는사람|2021년11월)
『색색의알약들을모아저울에올려놓고』(이지호|걷는사람|2021년8월)
『우리의피는얇아서』(박은영|시인의일요일|2022년4월)
『창』(성은주|시인의일요일|2022년5월)
『사랑의근력』(김안녕|걷는사람|2021년11월)
『나보다더오래내게다가온사람』(이윤학|간드레|2021년4월)
『여름밤위원회』(박해람|시인의일요일|2021년11월)
『나는입버릇처럼가게문을닫고열어요』(박송이|시인의일요일|2022년10월)
『천년동안내리는비』(정한용|여우난골|2021년2월)
『홀연,선잠』(김정수|천년의시작|2020년4월)
『사물어사전』(홍일표|작가|2022년7월)

출판사 서평

만물이살아움직이는,사유로서유동하는세계

봄이다가와옷장을정리하며겨울외투에인사를건넨다.11월에다시꺼내들때를기약하면서.오랫동안사용해온우리집선풍기에는어떤정령이깃들어있나궁금해하기도한다.우리집이라는공간에스민식구들의수런거림과탄식과애틋함을선풍기도집에들어오는순간읽고,경청했을것이다.이런집이구나,다른냉방기가없으니고장나지말아야겠다면서다짐했을테고.이러한활유活喩의세계가있다고,그곳은만물이살아움직이는,사유로서유동하는곳이라고시인은말한다.“만물을사람으로본다거나사람에견주어서표현하는의인擬人과는대각선방향에있다.유喩는깨우침,끄덕거림의뜻이고의擬는본뜨고흉내내는뜻이라서격자체가다르다.”단순한물건이새로운의미로다가오게되고우리는‘사용자’가아닌‘관계자’로거듭나게된다.무엇을보느냐의문제가아니라어떻게보느냐의차이가새로움을만들고,그렇게생각이바뀌면세상은이미이전의세상이아니다.

세게당기면떨어질것같이아슬아슬하면서도단단히감싸고자세를풀지않는단추같은사람이좋다.단추같이순서가필요하고잘못했는데도바로잡을기회를가진이가좋다.헐거운마음의단추가바로당신이다.(18쪽)

책속에서

산책로에매화가있는데그아래에서면향기에적셔지는것만같았기에향기는날아가는게아니라쏟아지는것이라고생각했다.지나는사람들의표정이보이는3층에산다.창밖매화향기가내게로솟아오르는것같아누군가에게라도감사인사를하고싶다.어림도없는망상이지만천사로채용된다면행인들의슬프고다정함이다보이는3층에근무하고싶다.슬픈사람없도록하겠다는게아니라다독임받지못한사람은없어야한다는소망을세우고싶다.(15-16쪽)

우리식구를길거리에주저앉게한사람이찾아온적있었다.그해열다섯에세상의참혹을다겪었다.아버지동업자인그이의죄책감인지후회인지지금도모른다.아버지는아무말없이마주앉았다가“밥먹고가”하시고는어머니를바라보았다.국졸학력의아버지는성인현자도아니고당신의무력감을절감한것도아닐테다.나이들어서는그이가‘운명의상징’이었다고생각했다.운명이찾아온다면밥이나사주련다.그밥은상가의육개장쯤이나되겠지.(26쪽)

안정제먹고자니까기절한셈이지만언제또쓰러질지몰라겁난다는아내는수면제조차거부하고뜬눈으로지새우는날이많다.안쓰럽고무참해서의존성없는수면유도제라도먹으라고몇번이나권했지만그럴수는없단다.둘다약기운에정신놓고자다가무슨일이라도생기면어떻게깨울거냐고맥놓는다.눈물많은구급대를자처하겠다는심사다.신은자신을흉내내는것같아서지극히선량한사람은싫어할거라고히죽거렸다.그러니당신은영영불러주지않는다고웃어주었다.이도저도아닌인간이라서뇌경색에도살아남았다고으쓱거렸다.(28쪽)

희망을향하는것이아니라
추레함으로부터도망치려는힘이
생을끌고간다
―「임대임차」부분(36쪽)

갈망하던손목시계를책상의잘보이는자리에놓았다.나갈일이없으니벽시계노릇을한다.그런데포장을풀었을때의감흥이사나흘지나면서서서히가라앉는것이다.책읽다가시계도읽으며뿌듯해하고드디어손에넣은나자신을칭찬해주었다.가라앉는감정에대한보상작업이고‘좋아라’했다가시들해진것을합리화하는일이겠지.이게바로소유한것에게소유당하는일이다.일종의역습이다.집착은자신까지도해치는일,애착은그것을보는사람도흐뭇해지는일이겠다.집착도애착도버리기로했다.(39쪽)

전력질주보다는빠르고팔을휘저으며걸어도못미칠속도다.아마조네스전사처럼그녀가전동카트로달려간다.배터리가용량에매인것처럼우리도언젠가는멈춰설것이다.[…]
야쿠르트배급소에모여선전동카트를보며배달구역의넓이와생계의무게가이루는함수관계를짚어보곤한다.제복을입으니차림새의편차가없고마음편하다.겨울이라서그런지관계없는사람이더라도궁색한차림새를보면서늘해진다.없이자란후유증일까.도울생각보다쓰린기억을먼저떠올리니인간은영원히자신에게갇힌존재인것같아다시서늘해진다.(52-53쪽)

반죽하는아줌마손등에서표고를떠올렸다.테이블다섯개노포老鋪라서인지손님은후루룩거리고주인은옆에서반죽한다.만두는성격눅진한,가슴속에잔뜩품고있는총각이고칼국수는공부많이한처녀다.만두는좋은데말도못하는숙맥이고칼국수는이래도내맘모르겠냐며허리를뒤트는깍쟁이다.그러나일단허리를잡히면후루룩,입안으로안긴다.밀고당기기는당기는쪽이이긴다.사정없이밀다간엎어진다.숙맥이라서만두시키고깍두기마냥단정한당신은칼국수시켰다.만두빚는쥔장허리가당신두배는된다고힐끔거리다가사레들렸다.쥔장하고계산할때저만치떨어져있었다.(59-60쪽)

노모에게어떻게든더보여드리려는딸의뒷모습이애잔했다.일방통행으로만갈수있을정도로좁고혼잡한길을찰싹붙어나란히가는청춘들이부러웠다.질서보다사랑이우선한다는그런치기가또부러웠다.모자와선글라스로얼굴절반을감추고하나같은포즈로손가락하트를날리는중년여인들이카메라앞에서야단이다.멍때리기가특기여서비켜달라는소릴못들어서몇번이나눈총받았다.손가락하트,브이같은저런상투적인손짓들이추억을깊이새겨주는연장아닐까생각했다.대략7,000명이오글거리는잔도에상투와지극함과깔깔거림이물소리와뒤섞이고있었다.(75-76쪽)

비유는사실관계를반박못하게피해가는기술이다.경전이비유로가득찼다는것은신을논리측면으로몰박는무신론자를대비한장치아니었을까.시인은이룰것도없으면서허깨비만들이대는도박중독자에가깝다.제시집이출판되면세상이뒤집힐것만같은설렘을가졌으니도박이고그걸평생반복하니중독이다.그도박중독을낭만으로과장한다면낭인浪人에가깝다.(95쪽)

50명에게강의한다면,핵심적인한마디를강조한다면그중누가그걸뼈저리게실감할것인지의문이다.어떤공통사항이라도범위는있다.구멍가게지만몇년강의한경험으로그최대치는다섯명이라생각했다.다섯명정도면선생이하는말을전원이실감할거아닌가.가르쳐서향상되면‘기술’,애써가르쳐도나아지는걸모를정도로내부에서변화한다면‘예술’이다.자유로운몸짓인춤은예술이고일정한순서와반복이반복되는율동이기술이다.시는춤,산문은행진이라는말라르메의비유와도상통한다.
부언하건대가르쳐서나아지면기술,스스로뛰어들어해낼수있어야이룬다면예술이다.진정시아니면죽을것같은분들께한말씀올린다.물이바위를뚫는것은물의힘이아니라물이바위를두드린횟수라는것을잊지마시라.(106쪽)

어휘몇개로젊음을도금鍍金한시중의시편들보다그자체가세월에녹슬지않는스테인리스강이라서편편이자연스럽다.과장이아니라청춘의걸음걸이와버금간다.문장보다시선의탄력이부럽다못해존경스럽다.나는겨우환갑을지났는데문장이늙을까봐스스로를경계하는깜냥이다.시인을부러워하다가질투하게되었다.시에대해과문하지만이렇게정밀하게쓰고싶다는소망을가지게되었다.가공加工도도금鍍金도화장化粧도아닌최문자시인본질의시편들이우리들앞에도착했다.그책상곁에앉아연필깎아드리고싶다.
누구에게나리토르넬로(일상반복)는있으니최문자시인의『해바라기밭의리토르넬로』를펼쳐볼일이다.싫증나는데친근해지고미워하다가닮아버린사람은지금어디있는지.진달래는저를펼치느라분주한이시절에목련은하많은사연을참았는지아무도모르게벙그는삼월스무날즈음에『해바라기밭의리토르넬로』를―.(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