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진지함은 익살로,
익살은 진지함으로 허물라
고르기아스
○ 오늘날 인문학은 무엇이며, 철학하기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 시인과 철학자들, 이 두 이야기꾼 사이의 3백여 년 동안 펼쳐지는 ‘설득과 비판’의 이야기 경합
○ 단편적이고 연대기적인 초기 철학사 해설을 넘어선, 현재화된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사 해석을 만난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를 키우는 로고스’가 인간 자신이고 철학이고 인문학이라고 말했다. 인문학은 이렇듯 자기 이야기를 소중히 하고 키워 가는 활동이다. 자기 이야기가 곧 자기이고, 인문학이다.
○ 철학은 즐기는 일이다. 진리가 우리를 즐겁게 하기보다 즐김이 우리를 진리케 한다. 즐김의 세상은 진리의 세상과 다르다. 뭐가 진리인지, 누가 진리를 갖고 있는지 강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철학은 그렇게 즐기면서 의미를 기다리는 거다. 자기 이야기를 절대화하기보다 잠정적인 것으로 제출하면서 의미 있기를, 의미 있게 봐 주기를 기다리는 거다.
1. ‘초기 희랍 철학의 담론 전통’
이 책은 서양의 철학 담론 전통이 어떻게 시작해 어떤 모습으로 정착했고, 또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는가를 살피고 있다. 우리에게는 흔히,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시기, 다시 말해 ‘철학의 탄생기’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 시기의 철학자들, 그리고 또 그 이전 시기의 시인들이라는 구도 아래에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등의 시인과 탈레스로부터 데모크리토스 등과 같은 철학자들 사이의 차이점과 단절, 그리고 또 다시 이들 철학자들과 소크라테스 철학 사이의 차이점과 단절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이와 같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이라는 표현은 처음 출발부터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을 이전 철학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탐구 대상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미리부터 단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 책은 좀 더 중립적인 입장에서, ‘초기 희랍 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런 편견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나아가, 이를 통해, 흔히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명명되는 초기 희랍 철학의 담론 전통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그것이 이후 소크라테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또 다시 계승점과 단절점을 만들어 내는지를 좀 더 세세하고 명확하게 살피며, 또한 이런 자연철학의 여명기에 등장한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사이의 관계는 어떠했는지를, 과연 이들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명명할 수 있는지 등의 문제를 살핀다.
무엇보다, 이 책은 ‘설득과 비판’이 철학 담론 전통을 포괄하고 관통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작업가설을 기조로 삼아, 초기 철학자들이 기성의 문화적 권위와 어떻게 긴장을 이루며 특유의 담론 전통을 개척해 갔는지를 추적하고 조명한다. 여기서, ‘설득과 비판’은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파르메니데스가 인상적으로 사용한 바 있는 표현으로, 먼저 설득이란 담론적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이야기를 제공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통해 듣는 사람에게 자기주장이나 입론을 뒷받침하는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다. 반면, 비판은 이야기를 제공받는 사람이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장이나 입론이 제대로 된 근거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지, 그래서 자신도 그 주장이나 입론을 받아들일 만한지 판가름하는 일을 가리킨다. 훗날, 플라톤은 로고스(합리적 설명의 근거)를 주고받는 일, 즉 대화를 철학 담론의 핵심 사항으로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이 책이 탐색하는 ‘설득과 비판’의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설득과 비판을 기조로, 이 책은 두 가지 수준에서 전개되는 대화를 기반으로 전개되는데, 한편으로는 최초의 철학자들이 이미 자리를 잡아 권위와 영향력을 누리고 있는 시인들이나 작가들과 문화적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 정체성과 차별성 내지 존재 의의를 내외에 천명하고 각인시켜 가는 ‘외적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형성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 있는 신생 문화 전통의 내부에서 부단한 사변적 탐색과 상호 비판을 통해 각 철학자나 학파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 전통을 공고히 해 나가는 ‘내적 대화’가 펼쳐지는 과정이 있다.
2. 뮈토스 대 로고스: 신화에서 철학으로
흔히, 서양 고대 철학의 흐름은, 신에 대해 이야기한 시인들의 전통, 신에서 자연으로 탐구의 대상을 옮긴 자연 철학자들, 그리고 탐구의 대상으로 인간과 그 사회를 조명한 소크라테스의 시대로 요약되곤 한다. 이런 흐름에서 철학자들 혹은 철학사가들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단순히 ‘원시적’primitive이고 비이성적이며 미신적인 사유 단계를 보여 주고 있다고 전제하거나, 거꾸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에 이미 이후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이나 사유의 밑그림이 상당히 그려져 있다고 보기도 한다. 자연철학과 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 사이의 관계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 속에서 다뤄지곤 한다. 하지만, 단절과 연속, 혁신과 계승이 긴장을 이루며 역동적인 발전을 겪었던 초기 철학사의 진면목에 다가가려면, 이런 도식적인 접근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균형감 있는 조망과 통찰이 필요하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입장에서 출발하여, 설득과 비판의 전통이 초기 철학자들의 자연철학 담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갖춰 가다가 파르메니데스를 거치면서 변증술과 수사학의 전통으로 발전해 결국 소피스트들의 안틸로기아 전통으로 확립되기까지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을 추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초기 철학의 첫 국면은 시인들이 일구어 놓은 신화적 ‘설득’ 담론의 전통에 맞서, 초기 철학자들이 합리적, 자연주의적 ‘비판’ 담론의 전통을 맞세우는 과정이었다. 이들 초기 자연철학자들은 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이야기(신화적 설득)가 적절하지 못한지를 때로는 무의식적으로(1기 철학자들, 즉 밀레코스학파와 피타고라스학파), 때로는 의식적으로(2기 철학자들, 즉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비판’하면서 세상 이야기를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호메로스)가 아닌 자연(퓌시스)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세상의 근원도 신들의 계보 추적(헤시오도스)이 아니라 아르케, 즉 물질적 기원과 구성 원리를 찾아 해결하려 했다. 다양한 현상 세계의 변전을 하나의 단순한 원리로 해명하려는 일원적 설명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와 같은 설득과 비판의 과정은, 파르메니데스에 와서 통합이 되는데,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이 도달한 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합리적, 논리적 설득력을 담아내는 ‘비판’적 담론만이 아니라 시인들에게서 이어져 내려온 그럴듯한 이야기의 설득력을 담아내는 ‘설득’적 담론을 통합해 ‘논변’이라는 담론의 방법적 성과를 일구어 낸다.
이후, 파르메니데스의 후계자들은 파르메니데스 철학 담론의 유산을 다시 비판과 설득의 측면으로 나누어 발전시키게 되는데, 제논과 멜리소스 등으로 대변되는 제2세대 엘레아주의자들에게서 비판의 담론은 상대방의 논변에 반론을 제시해 상대방 입장이 어려움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 줌으로써 논의의 부담을 상대 논변자에게 되돌려 주는 변증적 담론으로 발전했다. 반면, 엠페도클레스는 합리성과 신화성을 종합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을 이어받다 시로 철학하면서 대중적 설득력에 부응하는 담론을 산출했는데, 이는 설득적 담론이 수사학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렇듯, 파르메니데스적 담론 전통은 제논적인 변증술 전통과 엠페도클레스적인 수사학 전통으로, 각각 비판적 담론과 설득적 담론을 대변하는 전통으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며, 민주주의가 꽃핀 새로운 경쟁의 시대를 반영해 새로운 지성 운동을 일으킨 소피스트들에 의해 계승된다. 요약하자면, 초기 희랍의 철학 담론 전통은 이렇게 설득과 비판, 수사와 변증이라는 계가가 맞물려 끊임없이 상호 긴장하고 보완하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3.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살펴본 초기 희랍 철학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초기 희랍 철학의 담론 전통을 되살피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시인들의 담론 전통이 당대 희랍인들의 상상력과 사유 세계를 지배하던 상황에서 철학자로 불리게 되는 일군의 지식인 그룹이 자신들의 새로운 담론 전통을 세우고 다져 가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철학의 시작’을 출발로, 그 전통이 파르메니데스라는 거대한 산을 만나기 전까지 철학자들이 서로서로 (그리고 시 담론과도)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어떤 진전과 성취를 얻어 내는지를 탐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기존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국내외 연구자들의 광범위한 연구를 솜씨 있게 정리해 내면서도, 그간 간과되어 왔던(말하자면,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인 ‘서시’, ‘진리편’, ‘의견편’ 가운데 ‘진리편’에만 집중해 왔던) 파르메니데스의 진면목과 각 단편들 사이의 연결 고리들을 새롭게 발굴해 내고 있다. 이를 통해, 초기 희랍 철학의 대표적인 아곤의 주제들이었던, 필연과 설득, 설득(이야기)과 비판, 자기 반성과 대화의 종합을 파르메니데스가 어떻게 성취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1부(1장과 2장)는 새로운 필연의 발견과 개발이 파르메니데스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진전되는 과정을, 2부(3장과 4장)는 파르메니데스에 와서 그 필연이 설득으로 종합되는 과정을 탐색하며, 3부(5장과 6장)는 그런 종합의 의의와 성과가 비판적으로 승계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셈이다. 그런 종합 내지 승화는 마침내 이런 유형의 아곤(즉 필연과 설득의 아곤)에 대한 반성을 통해 설득을 정치의 장에 실천적으로 적용한 아테네 민주주의 전통으로 연결되는데, 이 책의 끝에서 다루는 소피스트 전통이 이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다.
4. 아곤의 ‘구경’으로서의 철학
너무나 진부한 풀이지만, 철학, 즉 필로소피아는 ‘필로스(지혜) + 소피아(사랑)’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나 진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