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종복배’의정치학
:피지배집단의하부정치,그리고‘정치적전율’의순간
“통치자앞에서기탄없이말씀드리기가두렵습니다.”
_에우리피데스,『박코스여신도들』
“강렬한증오는공포에서시작되는데,공포는침묵을강요하고맹렬한기세를몰아복수심을일으키며혐오하는대상을상상속에서소멸한다.박해받은자들은이처럼은밀한보복의식을통해서자신의분노를발산할은밀한배출구를마련하고고통을달래침묵시킨다.”
_조지엘리엇,『다니엘데론다』
인간사회에서권력만큼본질적이고지속적인것도없다.정도나방식의차이만있을뿐지배와복종관계로부터완전히자유로운사회란존재하지않기때문이다.『지배,그리고저항의예술』이다루는주제도바로권력과지배의문제이다.스콧이보기에권력은결코일방적인것이아니다.또한지배가늘성공적이거나안정적이지도않다.저자의문제의식은“지배의관계는동시에저항의관계”라는사실,즉저항없는지배는없다는명제이다.저항은눈에보일수도있고그렇지않을수도있지만,중요한것은언제어디서든늘존재한다는점이다.따라서이책에서주목하고강조하는것은권력관계의“표면아래에숨어있는그무엇”인‘은닉대본’이다.은닉대본은권력자의직접적감시범위를피해장외나막후에서형성되는언어나몸짓,관행등으로서,지배권력에대한비판과반대그리고저항의의미를담고있다.역사상모든피지배계급은각자의고된시련을바탕으로나름의은닉대본을생산하고지배계급으로부터이를지켜왔다.지배와저항을동전의양면처럼이해하는스콧은지배권력의은닉대본보다피지배집단의은닉대본을집중적으로분석한다.이런종류의저항은지금까지“감히스스로이름조차가질수없는것들”이었고,기존의사회과학이무지했거나외면해온정치영역이었기때문이다.
“‘모든여인들중에서가장죄없는그녀가가장영광스러운행위때문에가장비참하게죽어야하다니!’
이런소문이어둠속에서은밀히떠돌아다니고있습니다.”
_소포클레스,『안티고네』
“그것이카바레가민중들의의회인이유다.”
_오노레드발자크,『농민』
“사자입속에다머리를처박고살아야한다.예,예하면서상대방을사로잡고,웃으면서그놈들의발밑을파는거지.놈들에게죽고파멸당할때까지도복종하는척하라는말이야.그러고는놈들이토하거나창자가터질때까지너를씹어삼키라고해.”
_랠프엘리슨,『보이지않는인간』
이책에서새롭게제시되는‘하부정치’라는개념을통해,우리가볼수있는세계는한층넓어진다.스콧에게지금까지의사회과학은자유민주주의처럼비교적공개된정치,아니면항의나시위,반란등언론의헤드라인을소란스레장식하는비일상적정치현상을다루기일쑤였다.반면에저자는“적외선처럼,스펙트럼의가시적범위를넘어서”있는하부정치는,쉽게눈에드러나는정치적행위의,잘드러나지않는문화적·구조적기반(그는이를산업의인프라스트럭처에빗댄다)이라고주장하는한편,근무시간이후선술집이나카바레등비공식적인장소에서힘없는자들끼리나누는소문이나남얘기,험담,설화,노래,몸짓,농담,극무대등을권력에대한비난을암암리에풍자하는매개물로해석할수있다고제안한다.대개익명성뒤에숨거나그런행위에대한악의없는생각뒤에숨어서권력을넌지시비판함으로써이데올로기적불복종을은폐하는이와같은방식들은,농민과노예를비롯한피지배집단들이자신의노동,생산물,자산을통째빼앗기는일을당하지않기위해자신들의성과를위장하는방식과도비슷하다.남의토지에대한불법침입,늑장대응,좀도둑질,시치미떼기,도주등의형태를띤불복종또한힘없는자들의하부정치에포함된다.모든권력관계의이면에는하부정치의“‘미시적’밀고당기기”과정이작동하고있으며,권력균형에대한사려깊은자각에서비롯한전술적선택의결과라는점에서피지배집단이지배에맞서는저항양식으로서‘하부정치’는그자체로‘예술’의경지라고할만하다.
“이렇게속이시원하기는내평생처음이네요.코르크마개로속마음에서하고싶은말들을꼭누르면서도,물이새는통처럼딴데에서속내를비열하게살살드러내고산다면사는재미가뭐가있겠어요.내가앞으로지주어른만큼오래산다해도지금이렇게퍼부었던것을절대로후회하지는않을거예요.”
_조지엘리엇,『아담비드』
“왕의자식이왕이되네.탑청소부자식은바니안나무잎을어떻게닦는지를알뿐이네.사람들이들고일어나게되면,자리를빼앗긴왕의자식은탑을청소하게될지니.”
_베트남민요
드물게도은닉대본과공식대본의경계가결정적으로사라지는‘광기의순간’이존재한다.저자는“은닉대본이처음공개적으로선언될때미치는격렬한정치적충격”을“정치적전율(電慄)”(politicalelectricity)이라불렀다.그는전근대사회에서발생한수많은농민반란과민중반란(예컨대독일농민전쟁,영국내전,프랑스혁명,러시아혁명등)에서이와같은정치적전율의순간을읽어낼뿐만아니라,1960년대미국흑인사회의민권운동,1980년폴란드자유노조의출범,1988년칠레피노체트독재의종식,1988년소련고르바초프의글라스노스트캠페인,그리고1989년루마니아차우셰스쿠정부의붕괴등현대사를대표하는극적인순간들또한하부정치의공개적대폭발로예증한다.이처럼기존헤게모니이론을통해봤을때는‘과격한혁명’과‘비굴한침묵’이라는양극단밖에존재하지않았던평면적인역사가,스콧의분석을거침으로써풍성하고연속된결을부여받는다.
제임스C.스콧,인류학적정치학자또는정치학적인류학자
:현장에발딛고서서이야기의힘으로권력과인간의본질을탐구하다
“정치학자는인문학의세계와과장되고왜곡된자연과학의세계사이의지하세계에몸담고있도록일종의유형(流刑)에처해진듯하다.그러나정치학은절대로자연과학처럼될수없다.우리는인간주체의행위를연구하는사람이며,인간은자기반성이가능한존재이기때문이다.……정치학을제대로한다는것은설문지를돌리거나정치학서적을읽어서되는일이아니다.정치의세계는매순간우리주변에있고,소설속에도있다.그러니정치학을제대로하려면,매순간해야하고,왜이런일이일어나게되었는지또왜저런일이벌어지게되었는지를끊임없이질문해야한다.”
_스콧과의인터뷰(『그들은어떻게최고의정치학자가되었나2』)
정치학자로서는이례적으로주요저서대부분이국내에도소개되어있을만큼스콧은폭넓은독자층을지닌석학이다.이는정치학을비롯해(문화)인류학,(농촌)사회학,역사학등을포괄하는빼어난학제적연구역량을갖춘그의매력에힘입은바크다.애당초가난한말레이시아농민들이자신들에게구조적으로불리한벼농사방식을바꾸고자했던저항의정치를이해하려는저자의오랜노력끝에집필되었던이책『지배,그리고저항의예술』은특히나정치학이외분야의독자들에게까지널리읽힌것으로유명하다(실제로이책은텍스트의이면을두텁게읽는훈련에도움이된다고여겨져문학연구교재로쓰이기도한다).‘강자와약자사이의공적인기록만으로는권력관계에대해알아야할모든것을이야기할수없다’는간명한주장을뒷받침하기위해,스콧은자신의전공분야이기도한노예제,농노제,카스트제도등에대한기존연구는물론,가부장제나식민주의,인종주의를비롯해교도소나포로수용소와같은총체적통제시설과공산주의국가들에서의공적생활경험들을망라해소개한다.
특수한사례에서길어낸연구가보편적인호소력을얻기까지는,추상적이론에매몰되지않고현장에바탕을둔이야기의가치를충분히활용하는스콧의오랜연구기조가한몫했다.스콧은문학작품을참고문헌으로삼고는하는데,이책에서는오노레드발자크나조지엘리엇,밀란쿤데라의소설및조지오웰의에세이등이곧잘인용되고있다.탄탄한이야기가사회과학적논증에서도중요한역할을한다고여기는스콧은정치학을제대로연구하고싶다면손에잡는책가운데적어도셋에하나는반드시정치학이외분야의책이어야한다고말하기도했다.권력,계급,이데올로기,헤게모니,빈곤,저항등의추상적개념을다루면서도그내용이독자에게생생하고구체적으로가닿는것은,“정치학의추상적개념을현실세계로끌어와실제인간들에게적용해보는것의재미와가치”를평생에걸쳐추구해온결실이기도하다.권력문제의본질을고민하는정치학자이자연구대상지역의문화·문학·역사·언어에대한풍부한지식을얻기위해분투하는인류학자,또무엇보다인간에대해더깊이이해하고자애쓰는학자및작가로서그의면모가이책곳곳에서잘드러난다.
“말레이농부가가난하고토지도갖고있지않다는사실을아는것만으로는그들에대해우리가진짜아는것은별로없다.우리가그의가난에내포된문화적의미를잘이해하려면,라마단기간에손님들에게식사대접을하지못해특히비참해진다든가,마을길가에서마주친부자들이인사를받지않고그냥지나간다든가,부모의유해를제대로안장하지못한다든가,지참금이없다는이유만으로딸의결혼을미루게된다든가,자식을붙잡아둘만한재산이집안에없어아들을외지로일찍떠나보내야한다든가,부유한이웃에게일감이나먹거리를얻기위해비굴하게행동하지않으면안된다든가하는등의사실을알아야만하는것이다.이런식으로빈곤의문화적의미를인지할때만그가경험하는치욕의형태를알게되고그런만큼분노의강도를잴수있게된다.그는가난하며땅도없다고말하는정도에그친다면그것은단지그에게소득과생산수단이별로없다는사실을말해줄뿐이다.우리가언급했듯이,어떤가난한사람이역사의어떤특정한순간에특정한의례적체면을중시하는특정한문화속에서과연어떤느낌으로살아가고있는지에대해훨씬많은것을말해주는것은자신의계급적위치로말미암아비롯되는모든일상적치욕이다.자신이처한조건과자신의의식사이를교량처럼잇는것은이처럼실제로경험된모욕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