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김태홍입니다:내가선택하지않은삶이나를흔들어댈때,어떻게자신을지킬수있을까?
“일본학교에다닌교포학생들은대부분우리말을할줄몰랐다.나도고등학생이될때까지는우리말을몰랐다.하지만내가누구인지는분명히알았다.”
“납치와고문,불법구금,사형구형에무기형선고와확정,무기형에서20년형으로감형,그리고15년만에가석방.보안사갈월동분실과서빙고분실,서울구치소,광주교도소,대구교도소,대전교도소.저시간과저공간을거쳐오는동안,스물다섯청년은어느덧마흔중년이되었다.스물의몇해와서른의전부를꼬박갇혔다가세상으로다시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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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고베에서태어나자랐고,민족의식이강한부모의영향으로일본식성명인통명대신본명으로살아온‘재일교포2세’.스스럼없이어울리던급우가어느날아무렇지않게멸시하듯부른‘조센진’.대학을나오고성실함을인정받아도정작변변한일자리를구하기어려워하던형들과누나를보며일본이아닌곳에서새로운삶을펼치길꿈꾼‘한국인’.불법체포된1981년9월9일부터가석방된1996년8월15일까지약15년,5455일동안조국의교도소에갇혀지낸‘간첩’.2017년11월23일,영장없이체포된지36년2개월만에대법원에서최종무죄가확정된,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조작사건의‘무고한피해자’.스스로선택한적없는여러이름들로불리며살아야했던사람이,자신이누구인지를잊지않기위해오래기억하고기록한책으로고국의독자에게처음건네는말.“나는김태홍입니다.”
기억에서기록으로:15년동안기억해기록하고,다시20여년세월이지나서야꺼낸이야기
“일본에서살면서아무리어려움을겪었어도,한국에서처럼그렇게지독한짓을당하지는않았다.그충격이너무컸다.”
“나는기록하지않고기억했다.감옥에갇힌내게는,기록보다는기억이무난했다.”
“갇힌공간이었지만,그안에서나와다른사람들을만나그들이각자어떤삶의길을걸어왔는지가능한대로기회를만들어이야기를듣고기억하려애썼다.어떤일을잘기억하는방법중하나는,그일을몇번이고거듭생각하는것이다.운동시간에운동장을달릴때나방에서요가운동을할때늘중요한일을생각해내려고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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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지않은죄로기약없는수감생활을하게된사람은어떤선택을할수있을까?김태홍은잊지않는것을선택했다.자신을취조한국군보안사령부수사관들과기소한검사의이름을기억했다.교도소에서만난교도관들의이름을기억했다.같은방에서지내거나통방하며알게된양심수,일반수,도움을주고받은이들의이름을기억했다.그들이한행동,그들과겪은일,그들에게들은사연을기억했다.집필이허가되지않았고,허가된뒤에도검열을피할수없던곳에서는기록보다기억이정확했다.석방되고일본으로돌아가정착한뒤,15년동안기억한시간을2년에걸쳐기록했다.일본어가더익숙한그가,한국어로나누며기억한이야기였기에한글로적었다는원고는그대로20년가까이간직되다가,이후재심변호를맡은조영선변호사의제안과박수정르포작가의정리를거쳐이책으로출간되었다.
옥중기록이대체로필자의주관이강하게드러나는일기,편지글,탄원서등의형태를띠는데반해이책은건조하고담백한관찰기록에가깝다.감정과주장을내세우는대신자신이보고들은사실을주로담았다는점에서,수감생활을하며길어낸성찰과사색에기초해집필된기존출판물과도사뭇다르다.『나는김태홍입니다』는민주화의전망이싹트는동시에(사회는물론저자개인에게도)여전한불안이남아있던1980~90년대한국사회의풍경과교도소안에서마주친인간군상의삶을,부러과장하거나앞서판단하지않고기록한다.이를통해개인의시선에서바라본어떤순간들에는한시대의역사가깃들어있음을새삼깨닫게된다.
늘기다려야했지만,나는이기다림에지지않는다:그리고또다른‘김태홍들’
“오전9시30분.교도관이왔다.문이열렸다.”
“석방되었을때기쁨은컸지만,장래를생각하면걱정도들었다.고등학교나대학교에다닐때아르바이트를해봤을뿐이다.그동안크게변화한일본사회에적응해새롭게경제기반을만드는일은꽤어려웠다.하지만긴감옥살이를무사히끝낸나는,그정도의일은충분히해나갈자신이있었다.”
“일본으로벌써돌아왔는데꿈속에서는감옥에갇혀‘아,언제나가나’하며고민하는꿈이었다.꿈에서깨고는‘아이고,집이구나’하고안심했다.이렇게감옥에갇힌꿈을석방되고도5~6년은꾸었다.”
“언제감옥에서나갈지모른채기다린시간이15년이었는데,재심을청구하고다시5년을기다려야했다.늘기다려야했지만,나는이기다림에지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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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만에교도소를나섰고꿈에바라던자유를얻었다.영화나드라마라면여기서끝날수도있지만,삶은이어진다.마흔이되어서야처음직장생활을시작한그는이제,수감된기간보다더오랫동안생계를꾸리며살아온60대중반의생활인이되었다.2018년1월까지일본고베의제화(製靴)업체에서일하다그만두고요새는텃밭에유기농작물을심고돌본다.그사이다른재일교포들에게우리말을가르치기도했고,교도소에있을때부터꾸준히공부하며실천한건강지식을정리해일본에서책도냈다.무너져선안된다고다짐하며수감기간내내운동과건강관리,간헐적단식을한덕분에몸은오히려좋아졌다.그러나여전히마음에는갇힌시간의흔적이남았다.
정치적으로혼란스러웠던1980년대초반에특히간첩단날조사건이많았다.군사쿠데타로장악한정권을유지할방법중하나였다.비교적사상의자유를누리던일본에서조총련과일상적으로관계를맺고북한에간가족을둔재일교포는손쉬운공작대상이었다.보안사수사관들은김태홍의일본집까지찾아가챙겨온‘일본제’추리닝을‘북한에서하사받은’결정적인증거물로법정에제출했고,판사는이를증거로인정했다.재일교포간첩단조작임무에열성을다한공로로2000만원남짓한포상금과수사관두명에게는훈포장(勳褒章)이수여되었다.태어나자란곳임에도‘조센진’이라불리며차별을겪은일본을떠나모국을찾아온김태홍에게,조국대한민국이환대없이제공한집은서울의구치소와광주,대구,대전의교도소였다.
그시절국가가시민을죄인으로만드는과정은수월했고,세월이흐른지금그피해자가자신의죄없음을밝히는일은고달프다.이들이직접결백을입증할자료를찾아무죄를증명해야만비로소국가는잘못을‘시인’했다.가해자한사람한사람은여전히숨김표뒤에감춰진다.2022년현재재일교포간첩단사건피해자가운데34명이재심무죄판결을받았다.그리고이보다많은재일교포피해자들이대한민국에환멸을느껴서,사법과정을불신해서,아직도〈국가보안법〉이남아있어서,그리고무엇보다옛일을다시떠올리기가고통스러워서재심신청을하지않고있다.이책곳곳에언급되는재일교포간첩단사건피해자의이름은,김태홍이교도소에서만난또다른‘김태홍들’이다.
김길욱(1985년6월28일‘일인위장간첩단사건’),김장호(1983년3월11일‘일본우회간첩두개망적발사건’,2017년9월21일재심무죄선고),박영식(1982년5월19일‘재일교포박영식간첩사건’,2013년7월11일재심무죄선고),서성수(1983년10월19일‘재일교포모국유학생사건’,2017년8월27일재심무죄선고),손유형(1981년체포,2014년6월24일심근경색으로사망,2022년1월28일고인의재심무죄선고),이주광(1981년10월9일‘재일교포유학생이주광간첩사건’,2015년9월16일재심무죄선고),이헌치(1981년11월11일‘재일교포전자기술자위장간첩사건’,2012년10월3일재심무죄선고),조신치(1984년10월13일‘간첩여섯개망여섯명검거사건’),조일지(1984년9월1일‘재일동포조일지간첩사건’,2012년재심무죄선고),진이칙(1981년11월6일‘재일교포유학생진이칙간첩사건’)
_이책에서언급된재일교포간첩단조작사건피해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