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우리는 왜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가?”
욕망하는 어떤 대상이 오히려 더 나은 삶에 걸림돌이 될 때 바로 거기에 잔인한 낙관의 관계가 있다. 그 대상은 먹을 것일 수도 있고 사랑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좋은 삶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으며 정치적 기획일 수도 있다. … 이런 부류의 낙관적 관계가 본래부터 잔인한 것은 아니다. 낙관적 관계가 잔인해지는 건 애착의 대상이 애당초 그 애착을 형성하게 만든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방해가 되는 경우이다.
이 책은, 계층 상승과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나 장면에서부터 정치적인 것 자체에 대한 욕망에 이르기까지, 잔인한 낙관의 여러 관계들을 살펴본다.
**장별 주요 내용 소개
1장. 잔인한 낙관
애착의 대상 자체가 더 이상 좋은 삶을 보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됨에도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정동의 상태를 잔인한 낙관으로 규정한다. 사람들이 이런 모순적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급변하는 위기의 일상 속에서 일정한 삶의 형식을 유지하고 그로써 안정감이라는 일종의 환상에 기대기 때문이다. 위기 속 답보 상태에 이렇게 적응하는 삶은 나름의 리듬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1장에서 벌랜트는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2장. 직관주의자들
만족을 제공하는 동시에 가로막는 역설적 환상에 구속되고 또 그 환상이 대변하는 낙관에 구속되는 “이중 구속”은 일상 자체가 위기가 된 현재의 특성이다. 일상화된 위기 속에서는 익숙한 세계의 현상 유지가 그 자체만으로도 애착의 대상이 되므로, 일상을 유지하는 여러 방식들이 위기 속에서 주체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습관과 직관은 주권적일 수 없는 주체가 세계와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으로서 중요하다. 2장에서는 훈련된 것, 역사를 반영하는 것으로서의 습관과 직관에 대한 미학적 숙고가 기존의 비평에서 부족했음을 지적하고, 여러 텍스트들이 위기 속 주체의 정동적 (재)구성 및 발현을 재현하는 양상을 추적하며, 답보 상태와 위기에 대한 낙관과 그 문제점을 살펴본다.
3장. 더딘 죽음
자유주의적 주체성과 실천적 주권성이라는 전통적 개념이 내포하는 자율성과 통제권에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일상화된 위기 속, 삶을 재생산하기 위한 활동으로 인해 주체가 도리어 소진되고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이 마모되는, 일상화된 위기 속의 삶을 벌랜트는 “더딘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심화되는 더딘 죽음 속 주권성의 정동적 조건들을 정치적으로 해부한다. 1980년대 이후 노동조건의 악화와 비만의 확산에 대한 미국 사회의 대응은, 일종의 더딘 죽음으로서의 비만과 그것을 둘러싼 신자유주의의 이해관계를 보여 주는 사례가 된다. 더딘 죽음의 장면에서 주체의 행위성은, 자아와 삶의 발전이라는 목표 지향과는 관계없이 현상을 겨우 유지하면서 익숙한 일상을 연장하는 일견 자기 중단적 혹은 자기 훼방적 활동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벌랜트는 이를 자율적 주권의 행사라는 차원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측면적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측면적 주체성”은 일반적으로 규범화되는 실천적 주권성의 목적 지향적·직선적·단선적 움직임과 구분되는 옆걸음질, 엇나가기, 샛길로 빠지기 등 자기 방해 행위와도 같은 일종의 측면적 움직임으로 기술되는 행위 주체성에 대한 설명이다.
4장. 두 소녀, 뚱뚱이와 마른이
게이츠킬의 소설 『두 소녀, 뚱뚱이와 마른이』를 사례로 삼아 성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생존하는 정동을 신자유주의 초기 시절의 역사가 준 상처로 논의한다. 『두 소녀, 뚱뚱이와 마른이』의 주인공들이 드러내는 트라우마 이후의 정동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비개인적인 사회성의 형식과 양상을 띤다는 것이 벌랜트의 주요 논지이다. 맺는말에서 벌랜트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두 소녀가 서로의 품에 안겨 마침내 누리는 휴식)을 역사화한다. 트라우마를 경험하며 형성된 두 소녀의 삶과 내면, 그들이 발견하는 임시적 휴식에 대한 벌랜트의 분석은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개인의 내면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넘어서) 미국의 경제변동과 중산층 가정의 와해라는 맥락에서, 상처를 주는 역사를 읽어 내는 방식을 제시한다.
5장. 거의 유토피아, 거의 정상
왜 사람들은 현재의 나쁜 삶을 거부하지 않는가? 5장은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정동을 분석함으로써 이 질문을 탐구한다. 이 장은 1990년대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변동으로 인해 악화 중인 삶에 자녀 세대가 정동적으로 적응하는 양상(“아이들이 세계를 일구어 내는 측면적 양상”)을 논의한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로제타〉와 〈약속〉을 사례로 삼아 벌랜트는 아이들이 지구화, 이주, 노동 착취 등 포스트포디즘 단계의 신자유주의적 변동의 분석에서 핵심이라고 본다. 두 영화의 주인공이 보이는 정동적 반응은 위태로운 신자유주의적 삶의 조건하에서, 이제는 거의 불가능해진 “정상적” 삶의 규범이 열망의 대상으로 작동함을 드러낸다. 벌랜트는 규범적 세계에 대해 아이들이 품는 열정적 애착심이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의 생존 기제라고 논의한다.
6장. 좋은 삶 이후, 답보 상태
로랑 캉테의 영화 〈인력자원부〉와 〈타임 아웃〉을 사례로 삼아 중산층이 경험하는 신자유주의적 위태로움을 논의한다. 5장에서 노동계급과 빈곤층 청년이 좋은 삶이라는 환상의 마모에 대해 보이는 정동적 반응이 정상성의 규범에 근접해 있기를 열망하는 애착심이라고 논의한다면, 6장은 아감벤이 “지구의 프티부르주아”라고 부른 중산층이 뉴노멀에 대처하는 정동적 반응을 분석한다. 뉴노멀에서는 좋은 삶이 이제 환상일 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벌랜트는 현재의 역사적 순간을 상황으로 접근하여 답보 상태로 개념화한다. 상황이란 마음이 동요하는 상태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상태이다. 현재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명령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이전과는 새로운 공론장을 만들어 낸다. 이 공론장을 벌랜트는 적응의 명령에 적응하려는 몸(새로운 몸짓, 태도, 표정)을 초점으로 살펴본다.
7장. 정치적인 것을 향한 욕망에 대해
최근의 다양한 모더니즘 무정부주의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들을 논의하면서, 위기가 일상화된 우리 시대에 정서, 소음, 침묵이 저항의 움직임과 만날 때 형성되는 측면성의 정치를 탐구한다. 벌랜트는 이 정치를 “주변 분위기로 형성되는 시민성”으로 개념화하고, 주류 대중 정치가 내는 소음과 그 소음을 선별적으로 확장·축소하거나 걸러 내는 미디어의 “필터”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리, 침묵을 동원하는 몇몇 사회운동과 예술운동을 개괄한다. 이 장에서 논의하는 사례들은 전통적인 공적 발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인 것을 수행하며 역사적 현재에 개입하는 작품들이다. 이처럼 잔인한 낙관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욕망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벌랜트는 정치적으로 우울한 입장을 측면성의 정치로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 책은, 계층 상승과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나 장면에서부터 정치적인 것 자체에 대한 욕망에 이르기까지, 잔인한 낙관의 여러 관계들을 살펴본다.
**장별 주요 내용 소개
1장. 잔인한 낙관
애착의 대상 자체가 더 이상 좋은 삶을 보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됨에도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정동의 상태를 잔인한 낙관으로 규정한다. 사람들이 이런 모순적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급변하는 위기의 일상 속에서 일정한 삶의 형식을 유지하고 그로써 안정감이라는 일종의 환상에 기대기 때문이다. 위기 속 답보 상태에 이렇게 적응하는 삶은 나름의 리듬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1장에서 벌랜트는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2장. 직관주의자들
만족을 제공하는 동시에 가로막는 역설적 환상에 구속되고 또 그 환상이 대변하는 낙관에 구속되는 “이중 구속”은 일상 자체가 위기가 된 현재의 특성이다. 일상화된 위기 속에서는 익숙한 세계의 현상 유지가 그 자체만으로도 애착의 대상이 되므로, 일상을 유지하는 여러 방식들이 위기 속에서 주체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습관과 직관은 주권적일 수 없는 주체가 세계와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으로서 중요하다. 2장에서는 훈련된 것, 역사를 반영하는 것으로서의 습관과 직관에 대한 미학적 숙고가 기존의 비평에서 부족했음을 지적하고, 여러 텍스트들이 위기 속 주체의 정동적 (재)구성 및 발현을 재현하는 양상을 추적하며, 답보 상태와 위기에 대한 낙관과 그 문제점을 살펴본다.
3장. 더딘 죽음
자유주의적 주체성과 실천적 주권성이라는 전통적 개념이 내포하는 자율성과 통제권에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일상화된 위기 속, 삶을 재생산하기 위한 활동으로 인해 주체가 도리어 소진되고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이 마모되는, 일상화된 위기 속의 삶을 벌랜트는 “더딘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심화되는 더딘 죽음 속 주권성의 정동적 조건들을 정치적으로 해부한다. 1980년대 이후 노동조건의 악화와 비만의 확산에 대한 미국 사회의 대응은, 일종의 더딘 죽음으로서의 비만과 그것을 둘러싼 신자유주의의 이해관계를 보여 주는 사례가 된다. 더딘 죽음의 장면에서 주체의 행위성은, 자아와 삶의 발전이라는 목표 지향과는 관계없이 현상을 겨우 유지하면서 익숙한 일상을 연장하는 일견 자기 중단적 혹은 자기 훼방적 활동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벌랜트는 이를 자율적 주권의 행사라는 차원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측면적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측면적 주체성”은 일반적으로 규범화되는 실천적 주권성의 목적 지향적·직선적·단선적 움직임과 구분되는 옆걸음질, 엇나가기, 샛길로 빠지기 등 자기 방해 행위와도 같은 일종의 측면적 움직임으로 기술되는 행위 주체성에 대한 설명이다.
4장. 두 소녀, 뚱뚱이와 마른이
게이츠킬의 소설 『두 소녀, 뚱뚱이와 마른이』를 사례로 삼아 성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생존하는 정동을 신자유주의 초기 시절의 역사가 준 상처로 논의한다. 『두 소녀, 뚱뚱이와 마른이』의 주인공들이 드러내는 트라우마 이후의 정동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비개인적인 사회성의 형식과 양상을 띤다는 것이 벌랜트의 주요 논지이다. 맺는말에서 벌랜트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두 소녀가 서로의 품에 안겨 마침내 누리는 휴식)을 역사화한다. 트라우마를 경험하며 형성된 두 소녀의 삶과 내면, 그들이 발견하는 임시적 휴식에 대한 벌랜트의 분석은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개인의 내면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넘어서) 미국의 경제변동과 중산층 가정의 와해라는 맥락에서, 상처를 주는 역사를 읽어 내는 방식을 제시한다.
5장. 거의 유토피아, 거의 정상
왜 사람들은 현재의 나쁜 삶을 거부하지 않는가? 5장은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정동을 분석함으로써 이 질문을 탐구한다. 이 장은 1990년대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변동으로 인해 악화 중인 삶에 자녀 세대가 정동적으로 적응하는 양상(“아이들이 세계를 일구어 내는 측면적 양상”)을 논의한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로제타〉와 〈약속〉을 사례로 삼아 벌랜트는 아이들이 지구화, 이주, 노동 착취 등 포스트포디즘 단계의 신자유주의적 변동의 분석에서 핵심이라고 본다. 두 영화의 주인공이 보이는 정동적 반응은 위태로운 신자유주의적 삶의 조건하에서, 이제는 거의 불가능해진 “정상적” 삶의 규범이 열망의 대상으로 작동함을 드러낸다. 벌랜트는 규범적 세계에 대해 아이들이 품는 열정적 애착심이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의 생존 기제라고 논의한다.
6장. 좋은 삶 이후, 답보 상태
로랑 캉테의 영화 〈인력자원부〉와 〈타임 아웃〉을 사례로 삼아 중산층이 경험하는 신자유주의적 위태로움을 논의한다. 5장에서 노동계급과 빈곤층 청년이 좋은 삶이라는 환상의 마모에 대해 보이는 정동적 반응이 정상성의 규범에 근접해 있기를 열망하는 애착심이라고 논의한다면, 6장은 아감벤이 “지구의 프티부르주아”라고 부른 중산층이 뉴노멀에 대처하는 정동적 반응을 분석한다. 뉴노멀에서는 좋은 삶이 이제 환상일 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벌랜트는 현재의 역사적 순간을 상황으로 접근하여 답보 상태로 개념화한다. 상황이란 마음이 동요하는 상태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상태이다. 현재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명령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이전과는 새로운 공론장을 만들어 낸다. 이 공론장을 벌랜트는 적응의 명령에 적응하려는 몸(새로운 몸짓, 태도, 표정)을 초점으로 살펴본다.
7장. 정치적인 것을 향한 욕망에 대해
최근의 다양한 모더니즘 무정부주의 아방가르드 예술 작품들을 논의하면서, 위기가 일상화된 우리 시대에 정서, 소음, 침묵이 저항의 움직임과 만날 때 형성되는 측면성의 정치를 탐구한다. 벌랜트는 이 정치를 “주변 분위기로 형성되는 시민성”으로 개념화하고, 주류 대중 정치가 내는 소음과 그 소음을 선별적으로 확장·축소하거나 걸러 내는 미디어의 “필터”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리, 침묵을 동원하는 몇몇 사회운동과 예술운동을 개괄한다. 이 장에서 논의하는 사례들은 전통적인 공적 발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인 것을 수행하며 역사적 현재에 개입하는 작품들이다. 이처럼 잔인한 낙관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욕망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벌랜트는 정치적으로 우울한 입장을 측면성의 정치로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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