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역사서술은 오롯이 역사가의 몫일까? 시민의 ‘역사하기’를 말하다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Edward H. Carr)는 ‘사실’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가 역사가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과 어제의 대화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것은 역사가의 고유한 권한일까? 역사 연구자가 부여하는 의미만 보편성과 역사성을 갖는 것일까? 카는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를 규정할 정도로 그렇게 편협한 학자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이 땅의 역사학 내지 역사 연구가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카데미즘은 역사를 박제화하고 파편화했으며,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헌상하곤 했다. 이른바 식민사관을 앞장서 정당화했던 것도 이 땅의 주류 역사학자들이었으며,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데 앞장선 이들 역시 역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신화화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이렇듯 역사를 오롯이 역사학자들의 손에만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위험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의 대화이듯이, 역사와의 대화 역시 오늘의 문제를 고민하고 내일을 걱정하며, 더 나은 해결을 모색하는 이들의 진정 어린 대화이다. 사실상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시대의 역류를 막은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4,19혁명이나 6,10항쟁, 2017년 겨울항쟁 등 모든 혁명과 변혁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들이 있었다.
병자호란이 남긴 유적, 현절사(顯節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바로 그런 생활 속에서 ‘역사하기’의 시도이다.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 및 한국전쟁을 소재로 이 땅에서 올바른 역사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진지하게 살펴보고 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 변환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의 거두 김상헌(金尙憲)과 주화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최명길(崔鳴吉)이 걸었던 길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행동이 진정 올바른 역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승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제기한다. 이를 상징하는 유적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절사(顯節祠)이다. 이른바 절의(節義)를 지킨 현인, 즉 남한산성의 의인인 병자호란의 충절을 모셨다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롯이 숭명배청(崇明排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척화 주전론자들의 위패만 안치되어 있다. 즉 김상헌을 비롯,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정온(鄭縕)이 그들이다. 반면에 사직(社稷)을 구한 최명길 등의 위패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향하는 서원조차 하나 없다. 김상헌의 가문인 안동 김씨의 후손은 이후 조선 말기까지 벌족(閥族)으로 세력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후손 가운데 한양에 세거한 ‘장동(壯洞) 김문(金門)’은 세도정치로 망해가는 조선을 등골을 빼먹었다. 이에 비해 최명길의 집안은 손자인 최석정(崔錫鼎) 이후 조정에서 사라졌다.
왜 그럴까? 그리고 현절사를 지은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곧 역사의 승자라는 사실이지, 옳고 그름도 공과(功過)의 문제도 아니라는 데 있다. 이렇듯 권력은 언제든지 시비공과를 휘거나 구부릴 수 있고, 왜곡된 기억은 다시 집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21세기에도 풍문정치와 고변정치는 가짜뉴스와 여론조작으로 되살아나……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똑같이 되풀이된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직결되는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역사 왜곡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들추어내 ‘올바른 역사적 시각’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21세기 지금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풍문정치와 고변정치 등 조선조의 작태가 그 양상만 변했을 뿐 가짜뉴스와 여론조작으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현절사의 신화는 국부(國父)신화로 재현하려 하고, 척화와 숭명의 이념은 오늘날 전쟁불사와 숭미(崇美)의 이념으로 나타났다. ‘숭명’이 자강(自强)의 대책은 외면하고 사대와 맹종을 추구했듯이, ‘숭미’는 군사주권을 영구히 미국에 맡기려 한다. ‘숭명배청’이 ‘숭미반중’(崇美反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저자는 누누이 강조한다. 역사를 역사가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하고, 사초의 수집과 기록도 언론에만 맡기기에는 역시 너무나 중요하다고. 역사적인 비극을 다시금 맞지 않으려면 반드시 깨어 있는 역사의식과 혜안을 갖는 것이 필요함을 저자는 역설한다. 철학을 하고 문학을 하듯이, 시민들이 ‘역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Edward H. Carr)는 ‘사실’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가 역사가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과 어제의 대화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것은 역사가의 고유한 권한일까? 역사 연구자가 부여하는 의미만 보편성과 역사성을 갖는 것일까? 카는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를 규정할 정도로 그렇게 편협한 학자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이 땅의 역사학 내지 역사 연구가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카데미즘은 역사를 박제화하고 파편화했으며,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헌상하곤 했다. 이른바 식민사관을 앞장서 정당화했던 것도 이 땅의 주류 역사학자들이었으며,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데 앞장선 이들 역시 역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신화화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이렇듯 역사를 오롯이 역사학자들의 손에만 맡겨두기에는 너무나 위험할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의 대화이듯이, 역사와의 대화 역시 오늘의 문제를 고민하고 내일을 걱정하며, 더 나은 해결을 모색하는 이들의 진정 어린 대화이다. 사실상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시대의 역류를 막은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4,19혁명이나 6,10항쟁, 2017년 겨울항쟁 등 모든 혁명과 변혁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들이 있었다.
병자호란이 남긴 유적, 현절사(顯節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바로 그런 생활 속에서 ‘역사하기’의 시도이다.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 및 한국전쟁을 소재로 이 땅에서 올바른 역사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진지하게 살펴보고 있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 변환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의 거두 김상헌(金尙憲)과 주화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최명길(崔鳴吉)이 걸었던 길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행동이 진정 올바른 역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승해야 하는가의 문제까지 제기한다. 이를 상징하는 유적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절사(顯節祠)이다. 이른바 절의(節義)를 지킨 현인, 즉 남한산성의 의인인 병자호란의 충절을 모셨다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롯이 숭명배청(崇明排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척화 주전론자들의 위패만 안치되어 있다. 즉 김상헌을 비롯,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정온(鄭縕)이 그들이다. 반면에 사직(社稷)을 구한 최명길 등의 위패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향하는 서원조차 하나 없다. 김상헌의 가문인 안동 김씨의 후손은 이후 조선 말기까지 벌족(閥族)으로 세력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후손 가운데 한양에 세거한 ‘장동(壯洞) 김문(金門)’은 세도정치로 망해가는 조선을 등골을 빼먹었다. 이에 비해 최명길의 집안은 손자인 최석정(崔錫鼎) 이후 조정에서 사라졌다.
왜 그럴까? 그리고 현절사를 지은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기억을 지배하는 자가 곧 역사의 승자라는 사실이지, 옳고 그름도 공과(功過)의 문제도 아니라는 데 있다. 이렇듯 권력은 언제든지 시비공과를 휘거나 구부릴 수 있고, 왜곡된 기억은 다시 집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21세기에도 풍문정치와 고변정치는 가짜뉴스와 여론조작으로 되살아나……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똑같이 되풀이된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직결되는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역사 왜곡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들추어내 ‘올바른 역사적 시각’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21세기 지금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풍문정치와 고변정치 등 조선조의 작태가 그 양상만 변했을 뿐 가짜뉴스와 여론조작으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현절사의 신화는 국부(國父)신화로 재현하려 하고, 척화와 숭명의 이념은 오늘날 전쟁불사와 숭미(崇美)의 이념으로 나타났다. ‘숭명’이 자강(自强)의 대책은 외면하고 사대와 맹종을 추구했듯이, ‘숭미’는 군사주권을 영구히 미국에 맡기려 한다. ‘숭명배청’이 ‘숭미반중’(崇美反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저자는 누누이 강조한다. 역사를 역사가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하고, 사초의 수집과 기록도 언론에만 맡기기에는 역시 너무나 중요하다고. 역사적인 비극을 다시금 맞지 않으려면 반드시 깨어 있는 역사의식과 혜안을 갖는 것이 필요함을 저자는 역설한다. 철학을 하고 문학을 하듯이, 시민들이 ‘역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역사, 오늘이 묻고 어제가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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