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긴 겨울, 다양한 세상 사이의 줄타기
한국전쟁의 판도가 뒤바뀌던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부산으로 향하는 마지막 열차의 지붕에 올라탔다. 군인, 병자 그리고 부상자로 가득 찬 피난 열차에 뼈를 파고드는 바람이 몰아쳤다. 피난 열차는 기적 소리를 내며 밤새 이동했다. 그날 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운이 좋지는 못했다. 어린아이 몇 명이 밤사이 사고로 떨어져 죽었다. 긴 여행 내내 내 허리에 묶인 밧줄을 움켜쥐고 나를 지켜준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꼬집어 깨웠다. 북한에서 태어난 아이가 고향을 떠나와 미국의 이민자로 살아가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먼저 어수선한 부산에서 빠져나와 작은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뉴욕에서 도쿄로 돌아온 아버지를 그곳에서 재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물네 시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직후, 우리는 불법 입국 혐의로 체포되었다. 감옥, 수용소, 병원에서 두 달을 보낸 후에야 보석으로 풀려나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었다.
196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나는 흥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미주리대학이 있는 미주리주 컬럼비아로 향했다. 미국과의 만남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사람이 자기 의사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는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미국인 가정 교사에게 영어를 배운 덕분에 나는 대부분의 이민자와는 달리 언어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다. 미국의 중견 신문사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몇 안 되는 한인 기자였던 내게 미 전역에 있는 한인들로부터 전화와 편지가 쇄도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20세기 초부터 한국인들은 사탕수수·쌀·오렌지 등을 재배하고 수확하면서 미국에서 살아왔다. 때로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열심히 일했다. 고된 노동의 대가로 힘겹게 손에 쥔 몇 푼의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이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5년 내린 중대한 결정으로부터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 그는 일본과의 비밀 조약에서 미국이 필리핀에 주둔하는 것과 관련해 일본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대가로 한국과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50년간 계속된 외세의 개입은 나와 우리 가족의 인생만이 아니라 전 세계 7천5백만 동포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나의 선조 가운데 한 사람인 이동휘 장군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집을 떠나야 했던 것도 결과적으로 루스벨트의 결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강명환 또한 독립군으로 일하기 위해 고향 마을인 단천을 떠나 장군을 따라갔다.
이것은 ‘한국인 디아스포라’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아침의 나라’라 부르는 나의 고국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20세기의 격동적인 변화 가운데 내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증조할아버지 강봉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강씨 집안을 서구화의 길로 이끌면서 시작된 나의 미국으로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전쟁의 판도가 뒤바뀌던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부산으로 향하는 마지막 열차의 지붕에 올라탔다. 군인, 병자 그리고 부상자로 가득 찬 피난 열차에 뼈를 파고드는 바람이 몰아쳤다. 피난 열차는 기적 소리를 내며 밤새 이동했다. 그날 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운이 좋지는 못했다. 어린아이 몇 명이 밤사이 사고로 떨어져 죽었다. 긴 여행 내내 내 허리에 묶인 밧줄을 움켜쥐고 나를 지켜준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꼬집어 깨웠다. 북한에서 태어난 아이가 고향을 떠나와 미국의 이민자로 살아가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먼저 어수선한 부산에서 빠져나와 작은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뉴욕에서 도쿄로 돌아온 아버지를 그곳에서 재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물네 시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직후, 우리는 불법 입국 혐의로 체포되었다. 감옥, 수용소, 병원에서 두 달을 보낸 후에야 보석으로 풀려나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었다.
196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나는 흥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미주리대학이 있는 미주리주 컬럼비아로 향했다. 미국과의 만남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사람이 자기 의사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는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미국인 가정 교사에게 영어를 배운 덕분에 나는 대부분의 이민자와는 달리 언어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다. 미국의 중견 신문사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몇 안 되는 한인 기자였던 내게 미 전역에 있는 한인들로부터 전화와 편지가 쇄도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20세기 초부터 한국인들은 사탕수수·쌀·오렌지 등을 재배하고 수확하면서 미국에서 살아왔다. 때로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열심히 일했다. 고된 노동의 대가로 힘겹게 손에 쥔 몇 푼의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이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5년 내린 중대한 결정으로부터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 그는 일본과의 비밀 조약에서 미국이 필리핀에 주둔하는 것과 관련해 일본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대가로 한국과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50년간 계속된 외세의 개입은 나와 우리 가족의 인생만이 아니라 전 세계 7천5백만 동포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나의 선조 가운데 한 사람인 이동휘 장군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집을 떠나야 했던 것도 결과적으로 루스벨트의 결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강명환 또한 독립군으로 일하기 위해 고향 마을인 단천을 떠나 장군을 따라갔다.
이것은 ‘한국인 디아스포라’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아침의 나라’라 부르는 나의 고국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20세기의 격동적인 변화 가운데 내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증조할아버지 강봉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강씨 집안을 서구화의 길로 이끌면서 시작된 나의 미국으로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의 살던 고향,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인 디아스포라 이야기)
$3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