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근대를 이해하는 키워드로서의 혁명!
마르크스의 ‘역사의 기관차’부터 레닌의 미라까지,
볼셰비키에서 마오쩌둥과 호찌민,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까지,
바리케이드와 붉은 깃발, 파리 코뮌의 변증법적 이미지들로
19세기와 20세기 혁명의 역사를 재해석한다
마르크스의 ‘역사의 기관차’부터 레닌의 미라까지,
볼셰비키에서 마오쩌둥과 호찌민,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까지,
바리케이드와 붉은 깃발, 파리 코뮌의 변증법적 이미지들로
19세기와 20세기 혁명의 역사를 재해석한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1917년 10월 26일(율리우스력 기준) 새벽, 볼셰비키 혁명군이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하지만 혁명의 역사에서 드물게 성공한 러시아 혁명은 그 직후에 드러난 것처럼, 내전과 반혁명 시도, 국제적 개입으로 인해 자기방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789년에 시작된 혁명의 역사는 1917년 세계를 사로잡은 뒤 해방의 잠재력을 스스로 내던지고 어느새 스탈린주의 체제로 화석화되고 말았다. 1989년 소련이 붕괴하자 그나마 제3세계나 탈식민 세계에 남아 있던 혁명의 상상력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혁명’이란 대단히 낯선 개념이다. 이제 당면한 현실적 목표로 ‘혁명’을 생각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혁명에 몰두했던 시기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소련공산당사’가 불티나게 팔렸다. 혁명의 역사를 알기만 한다면, 혁명의 전략과 전술을 배울 수만 있다면, 곧바로 혁명을 일으켜 완전한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하리라고 자신했다. 서유럽에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엥겔스가 “기습공격의 시대, 의식 있는 소수가 의식이 부족한 대중의 선두에 서서 혁명을 수행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선언했건만, 군부독재에 신음하는 한국에서 혁명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펼쳐질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30여 년 전 혁명을 계획하고 실천하려 한 사람들은 과거 혁명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공간적ㆍ시간적 차이를 탐구하기보다는 성공한 혁명 또는 혁명가와 한국 현실 또는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했다. 혁명의 어두운 면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해야 했다.
그런데 과연 혁명은 무엇이었고, 무엇일 수 있을까? 인간의 역사에서 이제 혁명은 과거의 흔적으로 사라진 걸까? 아니, 사라졌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혁명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떻게 되돌아봐야 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은이 엔초 트라베르소는 “순진한 열정이나 도덕적 심판, 이데올로기적 낙인이 비판적 이해를 밀어내는 일이 너무도 잦았”던 혁명에 대해 과거의 교훈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비판적 지식과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1789년에서 1989년에 이르는 혁명의 시대가 마무리되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공산주의를 역사화함으로써 그 거대한 모험의 기억을 보존하고 혁명의 해방적 잠재력을 지킬 방도를 찾고자 한다.
‘갈림길에 선 남자’와 변증법적 이미지들의 몽타주
표지 그림을 보라. 전간기의 가장 강력한 ‘사유-이미지’로 손꼽히는 디에고 리베라의 〈인간, 우주의 통제자〉(1934년)라는 벽화다. 처음 디에고 리베라와 계약한 록펠러 재단 측에서 벽화에 등장한 레닌을 ‘무명의 사람’으로 대체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고 멕시코시티 예술궁전의 벽화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갈림길에 선 남자는 과거와 미래, 악과 행복, 이기주의와 형제애, 병과 건강, 편견과 계몽, 반계몽주의와 진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거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서 있다. 미래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아는 그는 심각해 보인다. 왼편에는 우아한 숙녀와 신사들이 춤을 추고 담배를 피우고 카드놀이를 하고 칵테일을 홀짝거린다(존 록펠러 주니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 옆에서 노동자들이 벌이는 대규모 시위가 기마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진압된다. 더 왼편에서는 교사가 다윈의 진화론을 설명하고 있으며, 원숭이가 아이에게 손을 내민다. 다윈 옆에 있는 발전소와 방사선 사진이 과학의 도구를 통해 자연을 길들이는 인간의 역량을 보여주는 한편, 다인종으로 구성된 학생 청중은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다. 오른편에는 레닌이 있다. 엄숙한 자세를 한 10월 혁명의 설계자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 병사의 손을 잡음으로써 그들의 동맹을 다짐한다. 더 오른편에는 ‘전 세계의 노동자여 제4 인터내셔널로 단결하라!’ 깃발은 든 레온 트로츠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가 있다. 트로츠키와 마르크스 바로 뒤에 있는 조각상은 목이 잘린 카이사르를 나타낸다. 바닥에 나뒹구는 그의 머리를 의자 삼아 앉은 노동자들이 뭔가를 관람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손에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인 나뭇가지 묶음이 쥐어져 있고, 거기에 나치의 만자 문양이 새겨져 있다. 상징적 가치로 가득한 이 프레스코화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 사회주의의 미래상, 혁명의 패러다임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트라베르소는 혁명의 개념, 경험, 상징, 이미지, 기억 등을 두루 살펴보기 위해 변증법적 이미지들의 몽타주를 그려 보인다. 혁명은 공식적 상징이나 기념물로 고정하기에는 너무도 다채로운 면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의 기관차’에서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으로서의 성해방, 블랑키의 바리케이드와 붉은 깃발 등 혁명의 여러 이미지는 독자에게 풍부한 해석과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 결과 기관차, 신체, 바리케이드, 깃발, 의례, 물질적 장소, 그림, 포스터, 상징적 랜드마크 등 온갖 ‘변증법적 이미지’로 만들어진 매혹적인 역사의 풍경이 펼쳐진다. 현재라는 거친 물결을 헤쳐 나가며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에 연료를 공급하려면 과거를 탐구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얼굴 또는 혁명적 지식인
혁명가의 가장 고전적인 이미지는 아마 아우구스트 잔더의 『우리 시대의 얼굴』(1929)에 실려 있는 사진 〈혁명가들〉(알로이스 린드너, 에리히 뮈잠, 귀도 코프)일 것이다(274쪽의 그림 4-1을 보라). 세 사람의 허름한 옷차림은 가난은 말할 것도 없고 내면의 정신적 동요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그들의 불안정한 현실을 증언한다. 세 사람의 얼굴에 담긴 근엄함은 자기만족 대신 두려움을 드러내며, 한껏 붙어 앉은 모습은 친밀감과 유대만이 아니라 위험 앞에서 서로 도우려는 분위기까지 느끼게 해준다. 그들은 주변부로 몰린 뿌리 뽑힌 음모자들, 선동적 보헤미안 삼인조를 이룬다.
19세기 말에 ‘인텔리겐치아’라는 단어가 러시아에서 서구로 들어왔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는 이미 이 단어가 정치에 몰두하는 문필가를 가리키는 의미로 매우 흔하게 사용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치 복음과도 같은 특정한 삶의 태도를 퍼뜨리는 데 헌신하는 집단, 거의 세속적인 사제단으로 여겼다”. 이 혁명적 지식인들이 아무리 능수능란하더라도 그들 대부분은 국외자로 살았다. 또한 아이작 도이처가 언급한 동유럽과 중유럽의 ‘비유대적 유대인’은 변증법적 인간형으로서 유대교를 거부하는 대신 초월했으며,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전통과 근대, 조국과 서양, 이론과 행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혁명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며, “역병과도 같은 기근으로 서서히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존엄을 획득하는 길이었다.
혁명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간에 그 안에 조상들의 경험을 담고 있다. 우리 시대의 혁명이 자신만의 모델을 발명해야 한다면, 지나간 투쟁과 정복의 기억뿐만 아니라 더 많은 패배의 기억을 소환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트라베르소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베냐민, 그리고 마오쩌둥과 호찌민에서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C. L. R. 제임스를 비롯한 남반구의 반역적 정신들에 이르기까지 혁명을 추구한 지식인들의 삶의 궤적과 이론을 추적하면서 혁명의 이론을 샅샅이 검토한다.
99개의 도판을 통해 혁명의 이미지들을 다룬 탁월한 에세이
발터 베냐민은 혁명을 핵분열에 비유했다. 과거 안에 담긴 온갖 에너지를 해방시키고 증식시킬 수 있는 폭발이라는 의미였다. 이 책은 시대순으로 혁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대신 기성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기대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집단적 분출로 혁명을 해석한다. 혁명은 갖가지 유토피아의 공장이다. 트라베르소는 우리가 사는 근대를 이해하는 열쇠로 혁명 개념을 복원한다. 혁명의 사회적ㆍ정치적 구조만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과 집단적 상상, 심지어 미학적 형태까지, 다시 말해 텍스트와 이미지, 이론과 경험, 물질적 유산과 집단적 기억에 담긴 혁명의 지적ㆍ정서적 차원을 파악하고자 한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막을 내린 이후 자본주의는 ‘야만적’ 얼굴을 되찾고 곳곳에서 복지국가를 해체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인간의 얼굴을 강요하는 현실적 위협으로서 힘을 잃고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사회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로 변신했다. “자본주의적 자유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하는 것은 19세기 내내 좌파 급진주의의 주요한 주제”(392쪽)였다. 자본주의가 모든 인간에게 자유와 평등, 존엄을 부여하는 완전무결한 체제가 아니라고 할 때, 누군가는 반대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제어되지 않는 자본주의 아래서 우리는 기후변화에서부터 불평등, 혐오와 극우 포퓰리즘, 초강대국 간 극한 경쟁, 전쟁과 학살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지나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가 진행되면서 인류 문명의 존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다. 그 폐허 위에서 파국으로 달려가는 역사에 비상 브레이크를 당길 수 있을까? 19세기와 20세기의 혁명의 역사에서 우리는 유의미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21세기에 혁명은 과연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당대의 가장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 손꼽히는 트라베르소의 「혁명의 지성사」는 도판 99개의 혁명의 이미지들과 함께 두 세기의 자료를 수많은 선명한 행위자, 사상가와 나란히 엮어 풍부한 태피스트리를 펼쳐 보인다. 마르크스는 근대의 혁명은 “과거로부터 시詩”를 끌어낼 수 없다고 말한 반면, 베냐민은 패배자들을 구원하려는 열망 속에서 혁명의 숨은 동력, 즉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의 비밀 협정”을 탐지했다. 혁명은 두 시간대를 가르는 칼날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를 발명함으로써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다.
1917년 10월 26일(율리우스력 기준) 새벽, 볼셰비키 혁명군이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하지만 혁명의 역사에서 드물게 성공한 러시아 혁명은 그 직후에 드러난 것처럼, 내전과 반혁명 시도, 국제적 개입으로 인해 자기방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789년에 시작된 혁명의 역사는 1917년 세계를 사로잡은 뒤 해방의 잠재력을 스스로 내던지고 어느새 스탈린주의 체제로 화석화되고 말았다. 1989년 소련이 붕괴하자 그나마 제3세계나 탈식민 세계에 남아 있던 혁명의 상상력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혁명’이란 대단히 낯선 개념이다. 이제 당면한 현실적 목표로 ‘혁명’을 생각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혁명에 몰두했던 시기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소련공산당사’가 불티나게 팔렸다. 혁명의 역사를 알기만 한다면, 혁명의 전략과 전술을 배울 수만 있다면, 곧바로 혁명을 일으켜 완전한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하리라고 자신했다. 서유럽에서는 이미 한 세기 전에 엥겔스가 “기습공격의 시대, 의식 있는 소수가 의식이 부족한 대중의 선두에 서서 혁명을 수행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선언했건만, 군부독재에 신음하는 한국에서 혁명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펼쳐질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30여 년 전 혁명을 계획하고 실천하려 한 사람들은 과거 혁명의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공간적ㆍ시간적 차이를 탐구하기보다는 성공한 혁명 또는 혁명가와 한국 현실 또는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했다. 혁명의 어두운 면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해야 했다.
그런데 과연 혁명은 무엇이었고, 무엇일 수 있을까? 인간의 역사에서 이제 혁명은 과거의 흔적으로 사라진 걸까? 아니, 사라졌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혁명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떻게 되돌아봐야 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은이 엔초 트라베르소는 “순진한 열정이나 도덕적 심판, 이데올로기적 낙인이 비판적 이해를 밀어내는 일이 너무도 잦았”던 혁명에 대해 과거의 교훈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비판적 지식과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1789년에서 1989년에 이르는 혁명의 시대가 마무리되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공산주의를 역사화함으로써 그 거대한 모험의 기억을 보존하고 혁명의 해방적 잠재력을 지킬 방도를 찾고자 한다.
‘갈림길에 선 남자’와 변증법적 이미지들의 몽타주
표지 그림을 보라. 전간기의 가장 강력한 ‘사유-이미지’로 손꼽히는 디에고 리베라의 〈인간, 우주의 통제자〉(1934년)라는 벽화다. 처음 디에고 리베라와 계약한 록펠러 재단 측에서 벽화에 등장한 레닌을 ‘무명의 사람’으로 대체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고 멕시코시티 예술궁전의 벽화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갈림길에 선 남자는 과거와 미래, 악과 행복, 이기주의와 형제애, 병과 건강, 편견과 계몽, 반계몽주의와 진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거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서 있다. 미래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아는 그는 심각해 보인다. 왼편에는 우아한 숙녀와 신사들이 춤을 추고 담배를 피우고 카드놀이를 하고 칵테일을 홀짝거린다(존 록펠러 주니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 옆에서 노동자들이 벌이는 대규모 시위가 기마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진압된다. 더 왼편에서는 교사가 다윈의 진화론을 설명하고 있으며, 원숭이가 아이에게 손을 내민다. 다윈 옆에 있는 발전소와 방사선 사진이 과학의 도구를 통해 자연을 길들이는 인간의 역량을 보여주는 한편, 다인종으로 구성된 학생 청중은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다. 오른편에는 레닌이 있다. 엄숙한 자세를 한 10월 혁명의 설계자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 병사의 손을 잡음으로써 그들의 동맹을 다짐한다. 더 오른편에는 ‘전 세계의 노동자여 제4 인터내셔널로 단결하라!’ 깃발은 든 레온 트로츠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가 있다. 트로츠키와 마르크스 바로 뒤에 있는 조각상은 목이 잘린 카이사르를 나타낸다. 바닥에 나뒹구는 그의 머리를 의자 삼아 앉은 노동자들이 뭔가를 관람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손에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인 나뭇가지 묶음이 쥐어져 있고, 거기에 나치의 만자 문양이 새겨져 있다. 상징적 가치로 가득한 이 프레스코화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 사회주의의 미래상, 혁명의 패러다임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트라베르소는 혁명의 개념, 경험, 상징, 이미지, 기억 등을 두루 살펴보기 위해 변증법적 이미지들의 몽타주를 그려 보인다. 혁명은 공식적 상징이나 기념물로 고정하기에는 너무도 다채로운 면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의 기관차’에서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으로서의 성해방, 블랑키의 바리케이드와 붉은 깃발 등 혁명의 여러 이미지는 독자에게 풍부한 해석과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 결과 기관차, 신체, 바리케이드, 깃발, 의례, 물질적 장소, 그림, 포스터, 상징적 랜드마크 등 온갖 ‘변증법적 이미지’로 만들어진 매혹적인 역사의 풍경이 펼쳐진다. 현재라는 거친 물결을 헤쳐 나가며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에 연료를 공급하려면 과거를 탐구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얼굴 또는 혁명적 지식인
혁명가의 가장 고전적인 이미지는 아마 아우구스트 잔더의 『우리 시대의 얼굴』(1929)에 실려 있는 사진 〈혁명가들〉(알로이스 린드너, 에리히 뮈잠, 귀도 코프)일 것이다(274쪽의 그림 4-1을 보라). 세 사람의 허름한 옷차림은 가난은 말할 것도 없고 내면의 정신적 동요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그들의 불안정한 현실을 증언한다. 세 사람의 얼굴에 담긴 근엄함은 자기만족 대신 두려움을 드러내며, 한껏 붙어 앉은 모습은 친밀감과 유대만이 아니라 위험 앞에서 서로 도우려는 분위기까지 느끼게 해준다. 그들은 주변부로 몰린 뿌리 뽑힌 음모자들, 선동적 보헤미안 삼인조를 이룬다.
19세기 말에 ‘인텔리겐치아’라는 단어가 러시아에서 서구로 들어왔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는 이미 이 단어가 정치에 몰두하는 문필가를 가리키는 의미로 매우 흔하게 사용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치 복음과도 같은 특정한 삶의 태도를 퍼뜨리는 데 헌신하는 집단, 거의 세속적인 사제단으로 여겼다”. 이 혁명적 지식인들이 아무리 능수능란하더라도 그들 대부분은 국외자로 살았다. 또한 아이작 도이처가 언급한 동유럽과 중유럽의 ‘비유대적 유대인’은 변증법적 인간형으로서 유대교를 거부하는 대신 초월했으며,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전통과 근대, 조국과 서양, 이론과 행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혁명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며, “역병과도 같은 기근으로 서서히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존엄을 획득하는 길이었다.
혁명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간에 그 안에 조상들의 경험을 담고 있다. 우리 시대의 혁명이 자신만의 모델을 발명해야 한다면, 지나간 투쟁과 정복의 기억뿐만 아니라 더 많은 패배의 기억을 소환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트라베르소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베냐민, 그리고 마오쩌둥과 호찌민에서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C. L. R. 제임스를 비롯한 남반구의 반역적 정신들에 이르기까지 혁명을 추구한 지식인들의 삶의 궤적과 이론을 추적하면서 혁명의 이론을 샅샅이 검토한다.
99개의 도판을 통해 혁명의 이미지들을 다룬 탁월한 에세이
발터 베냐민은 혁명을 핵분열에 비유했다. 과거 안에 담긴 온갖 에너지를 해방시키고 증식시킬 수 있는 폭발이라는 의미였다. 이 책은 시대순으로 혁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대신 기성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기대의 지평을 열어젖히는 집단적 분출로 혁명을 해석한다. 혁명은 갖가지 유토피아의 공장이다. 트라베르소는 우리가 사는 근대를 이해하는 열쇠로 혁명 개념을 복원한다. 혁명의 사회적ㆍ정치적 구조만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과 집단적 상상, 심지어 미학적 형태까지, 다시 말해 텍스트와 이미지, 이론과 경험, 물질적 유산과 집단적 기억에 담긴 혁명의 지적ㆍ정서적 차원을 파악하고자 한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가 막을 내린 이후 자본주의는 ‘야만적’ 얼굴을 되찾고 곳곳에서 복지국가를 해체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인간의 얼굴을 강요하는 현실적 위협으로서 힘을 잃고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사회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로 변신했다. “자본주의적 자유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하는 것은 19세기 내내 좌파 급진주의의 주요한 주제”(392쪽)였다. 자본주의가 모든 인간에게 자유와 평등, 존엄을 부여하는 완전무결한 체제가 아니라고 할 때, 누군가는 반대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제어되지 않는 자본주의 아래서 우리는 기후변화에서부터 불평등, 혐오와 극우 포퓰리즘, 초강대국 간 극한 경쟁, 전쟁과 학살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지나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가 진행되면서 인류 문명의 존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다. 그 폐허 위에서 파국으로 달려가는 역사에 비상 브레이크를 당길 수 있을까? 19세기와 20세기의 혁명의 역사에서 우리는 유의미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21세기에 혁명은 과연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당대의 가장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 손꼽히는 트라베르소의 「혁명의 지성사」는 도판 99개의 혁명의 이미지들과 함께 두 세기의 자료를 수많은 선명한 행위자, 사상가와 나란히 엮어 풍부한 태피스트리를 펼쳐 보인다. 마르크스는 근대의 혁명은 “과거로부터 시詩”를 끌어낼 수 없다고 말한 반면, 베냐민은 패배자들을 구원하려는 열망 속에서 혁명의 숨은 동력, 즉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의 비밀 협정”을 탐지했다. 혁명은 두 시간대를 가르는 칼날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를 발명함으로써 과거를 구원하는 것이다.
혁명의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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