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19.06
Description
의로운 그들의 이야기를 조망하다
한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던, 이 민족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생각나는 위인들을 이 한 권에 소개하였다. 이 시대의 그 후학들이 다시 한 번 현창하여 공감 확산의 방도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선집(選集)의 제작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평생 대한국인 자존심의 정체와 그 지키기에 대해 생각하고 말해온 역사학자 김동길 교수의 발의로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는 대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역사적 인물(세종대왕, 이순신, 사명당, 정약용, 이상재, 안중근, 안창호, 이승만, 백선엽, 현봉학, 박태준, 함석헌, 김수환, 전형필, 박경리) 열다섯 명을 가려 뽑아 그 업적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최근 국내외 어지러운 사건들로 무너져내리는 국민으로 그리고 개인으로의 자존심 회복의 근거로, 자존심 확대 가능성의 큰 상징으로 새롭게 조명해보려 했다.

대한민국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적어도 통일 신라 이후 민족 ㆍ국가 또는 국민 ㆍ국가의 맥을 이어왔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유사 이래 1천 회 가까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았고, 그 재앙이 국파(國破) 직전에 이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민족국가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선 기록적인 압축 성장에다 민주 정치까지 진척되어 세계적인 자랑이 되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세계에 우뚝 서고 오늘의 정체성 있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어질면서 의로운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가치 있다고 믿는 바 신념을 앞장서서 실천하고 행동해주었다. 그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인물들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대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들이었다. 그런 인물은 열다섯 명보다 훨씬 더 많이 꼽을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기록의 역사가 분명한 시대 이래를 염두에 두어 조선 왕조 이래의 인격을 가려 뽑았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은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인물마다 이미 전기물 또는 평전 등이 적잖이 출판된 바 있다. 그걸 참고하되 올해 구순인 김동길 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이 시대 문사 열 명(김동길 교수 포함)이 그간 그런 인물을 어떻게 알고 무엇을 배우려 했는지를 적어놓았다. 대상 인물들을 역사책으로 만난 필자가 대부분이지만, 현대에서 명멸했던 인물들의 경우 필자들이 직접 마주쳤던 생생한 체험도 담아놓았다.
저자

김동길

저자 김동길(金東吉)은 1928년 평남 맹산 출생. 연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반스빌 대학교 역사학과를 거쳐 보스턴 대학교에서 링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교수, 부총장, 조선일보 논설고문, 14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거쳐, 현재는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명예 이사장이다. 『링컨의 일생』 등 80여 권의 저서를 냈다.

목차

·책을 펴내며: 꿈을 좇았던 한민족의 자존심
·편집자의 말: 한민족의 자부심을 한바탕 외치려는 책을 엮기까지

세종대왕, 한글을 창제하다 최정호
천 년의 인물, 이순신 김형국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안경환
조선 실학의 금자탑, 다산 정약용 김성훈
아! 월남 이상재 김동길
안중근, 동양 평화를 외치다 장석흥
안창호, 무실역행(務實力行)의 통합적 지도자 안경환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최 명
6·25전쟁 하면 생각나는 임, 백선엽 김형국
전쟁터에서 꽃피운 인간 사랑 닥터 현봉학 이성낙
선비의 전형 박태준 송 복
나의 스승 함석헌 김동길
김수환 추기경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봉두완
문화 독립 운동가 전형필 이성낙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 문학 김형국

출판사 서평

[책속으로 이어서]
충무공이 그랬다. 누란의 국난을 만나 결연히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지켜냈다. 이 불멸의 대공을 돌이켜 볼 때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마다 나라와 민족을 지켜준 이를 ‘천 년의 인물’로 받들어왔던 세계사적 선례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 승리로 이끌었던 전시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을, 일본은 무혈로 바쿠후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던 ‘하급 무사’ 출신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867]를 제 나라 ‘천 년의 인물’로 골라서 사랑을 넓혀왔다. 서기 2000년을 맞았을 때 새 천 년을 바라본다면서 여러 나라에서 지난 역사 천 년의 인물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우리도 그런 공론을 폈다면 충무공 이순신이야 말로 그 자리에 제일 먼저 꼽아야 마땅했다. - 66쪽 ‘천 년의 인물, 이순신’ 중에서

명분에 살고 죽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 승려의 지위는 하잘 것 없었다. 나라를 구한 승려라는 세평이 무색할 정도로 사명당 유정의 행적에 관한 조선 정부의 공적 기록은 극히 소략하다. 반면 민간 설화 속의 사명당은 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왜적의 혼을 제압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사명당에 얽힌 갖가지 도술과 일화들은 한 시대를 사심 없이 앞장서 간 위인에게 민중들이 바치는 애정의 헌사라는 점에서 도리어 ‘민중적 진실’의 일부를 이룬다는 해석도 있다. - 72쪽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중에서

평양성의 탈환에 의승병의 공헌은 혁혁했다. 명의 도독 이여송(李如松)은 서산의 공을 찬양하는 시첩을 보냈다. 평양성 탈환에 이어 도제찰사 류성룡의 지휘 아래 관군과 의승병은 수도 한양의 탈환에 나섰다. 사명당 유정은 1593년 3월 26일 노원평 전투와 3월 27일 ‘수락산 대첩’에서 세운 공으로 일약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승장 유정의 군사들이 매우 정예로워서 적을 참획(斬獲)하는 공을 세웠기에 …… 당상관의 직을 제수하여 원근에 있는 승려들의 분발심을 선도하도록 하라”(『선조실록』 4월 21조). 이 사실을 기록한 사관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승려가 참획의 공을 세웠거늘, 이는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라며 나라의 녹봉을 받는 문무관의 자성을 촉구했다. - 84쪽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중에서

선조실록 37년 2월 24일에는 “일개 승려를 국사로 파견하는 일”에 대한 사관의 탄식이 담겨 있다.
“묘당의 계책이 비루하다. 종묘사직은 원수를 갚지 못하고 하릴 없이 허송세월한다. 적의 사신을 한 번 만나자 서로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하찮은 승려의 손에 맡기고 있으니 …… 나랏일을 꾀할 자가 유정 한 사람뿐이니, 아 개탄할 일이다.”
어정쩡한 지위에 중차대한 사명을 띠고 바다를 건너는 사명당 유정에게 많은 사람이 격려했다.
“성세에 명장은 많지만 기특한 공은 늙은 대사가 독차지했네.”
그 수많은 격문 중에 작가 불명의 절구가 단연 백미다.
“묘당에 삼정승 있다 떠벌이지 말라. 나라의 안위는 한 승려에 달렸노라.” - 88쪽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중에서

국서를 지참하지 않았고, 귀국 시에도 일본의 국서가 없었지만 사명의 외교적 성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조선을 침범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피로인들의 송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나라가 망한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조선의 남녀가 끌려와 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니 모두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국내 세력의 내부 통합이 급선무인 새 권력자는 불승의 간곡한 호소에 응답한 형식으로 피로인들의 송환을 허락했다. 5월초 사명은 일본에 끌려갔던 동포를 배 48척에 나누어 태워 귀국하였다. - 90쪽 ‘나라 구하러 나선 ‘유승(儒僧)’, 사명당‘ 중에서

18년 간 강진 생활은 인간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다산은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 고향으로 곧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끊고서 오로지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말하자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셈이었다. 5백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작이 대부분 이곳에서 집필되었거나 구상되었다. 경전에 대한 방대한 주석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대표적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여기서 집필했고 『흠흠신서』의 얼개도 구상했다. 그는 ‘자찬 묘지명’에서 “내가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어언 20여 년 간 세상길에 빠져 다시 선왕의 대도(大道)를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 여유가 생겼다”라고 하여 운명적으로 주어진 유배 생활을 창조적 분발의 계기로 삼았다. - 110쪽 ‘조선 실학의 금자탑, 다산 정약용’ 중에서

유배 중 강진초당에서 한 편 한 편의 책을 탈고할 때마다 인편으로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형 약전에게 보였다. 그때마다 훈수를 할 만큼 약전의 학문 수준 또한 뛰어났다. 마침내 연구서 232권을 다 읽고 난 약전은 “네가 (신명이 통하고 저절로 깨닫게 되는) 이런 경지에 도달한 것은 너 스스로도 모를 것이다. 도(道)를 잃어버린 지 천 년 동안 백 가지로 가리어 덮여 있었는데 이를 분해해서 확 열어 제꼈으니 어찌 너의 힘만으로 한 것이겠느냐”라며 극찬의 글을 써 보냈다. - 111쪽 ‘조선 실학의 금자탑, 다산 정약용’ 중에서

다산 스스로 말하기를 “6경 4서로써 자기 마음과 몸을 닦게 하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그리고 『흠흠신서』, 곧 ‘1표 2서(一表二書)’로써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하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이 구비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
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天命)이 허락해 주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여 불 속에 처넣어 불살라 태워버려도 좋다”라고 적었다.
수많은 저술에서 일관하는 다산의 생각은 무엇이었던가. 한마디로 ‘개혁’이 사상의 요체였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조선 봉건 사회의 해체기로서 누적된 봉건적 병폐가 도처에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총체적 위기의 상황에서 그는 나라를 구하고 바로 세우는 길은 개혁밖에 없다고 깊이 통찰한 것이다. 그 시작은 모름지기 관료와 정치 지도자들의 마음과 몸가짐의 쇄신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믿고, 구체적인 개혁 대안서인 『경세유표』의 완성에 이어 『목민심서』를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 116쪽 ‘조선 실학의 금자탑, 다산 정약용’ 중에서

우정국에서 물러난 이상재는 낙향하여 시골에 있었는데 1887년 박정양의 요청으로 다시 상경하여 군 본부의 매우 낮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이 해 6월에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박 공사의 추천으로 월남은 서기관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가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하루는 박 공사 일행이 행차하는데 워싱턴의 어린이들이 그 행렬을 뒤따라가며 돌멩이를 던지는 등 장난을 쳤다. 재래의 도포를 입고 행차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그 행차를 호위하던 미국 경찰은 돌멩이 던지는 아이들을 다 잡아서 경찰서에 보냈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월남이 워싱턴DC의 경찰서장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월남은 경찰서장에게 “어느 나라에서나 아이들은 신기한 것을 보면 돌을 던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것들을 잡아 가두면 되겠습니까? 즉시 석방하시오”라고 말했다. 어두워지면 경찰은 아이들을 부모들에게 다 돌려보내겠지만 체면상 잠시 잡아 가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남의 그런 요청을 들은 경찰뿐 아니라 시민들도 크게 감탄하였다. 그 날 저녁 워싱턴 신문 석간에 ‘Gentleman from Korea(한국에서 오신 신사)’라는 주제로 한국의 사절단을 칭찬하는 기사가 대서특필 되었다고 전해진다. - 132쪽 ‘아! 월남 이상재’ 중에서

박정양 공사의 미국 내에서의 활동은 크게 성공하였고 귀국한 일행은 고종의 마음을 매우 흐뭇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이홍장은 한국 정부의 외교 활동이 크게 성공한 사실에 분개하여 고종 황제를 못살게 굴었다. 고종은 견디다 못해 공사 박정양을 잠시 옥에 가두었는데 이는 이홍장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종은 월남을 불러서 그 노고를 치하하며 “이번에 수고가 많았어. 차제에 벼슬을 한 자리 하지”라고 하셨다. 월남 이상재가 고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가 모시고 갔던 어른은 죄를 입어 옥중에 있는데 모시고 갔던 놈이 벼슬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아뢰오”라고 말했다. 그 말에 감동한 고종이 “그럼 자네 아들이 있지 않나. 이번 기회에 벼슬을 한 자리 주면 어떨까”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은 월남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 아들놈이 배운 게 없어 시골서 농사나 짓고 있는 터에 벼슬이 웬 말이옵니까. 안 될 말씀인줄 아뢰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벼슬을 사양하고 어전을 물러나는 월남을 보고 고종 황제가 입속말처럼 “저런 신하만 있으면 나라가 되겠는데”라고 하셨다고 전해진다. 벼슬을 한 자리 주겠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거늘 그 벼슬자리를 끝까지 사양한 월남은 과연 위대한 한국인이었다. - 133쪽 ‘아! 월남 이상재’ 중에서

안중근은 “세계의 대세를 짐작하고 해외에서 ‘신호흡’을 하는 자 어찌 무모하게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을 것인가. 이토의 정책이 동양 평화에 지대한 해를 끼치는 일임에 일신일가(一身一家)를 돌볼 여지가 없이 결행한 것”이라며, 의거의 명분과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이토와 개인적 원한이 없으며, 만약 개인적 원한으로 처단했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세계 대세를 짐작하는’ 그가 이토를 처단한 것은 한국 독립만이 아니라 이토의 조국인 일제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의거의 진실은 당장에 어렵다고 한다면 훗날에라도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 확신했다. - 149쪽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