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에‘운동권물’좀먹어봤다면
1970~80년대권위주의정권때대학을다니면서‘언더서클(지하동아리)’을기웃거려본50~60대들이라면,마르크시즘서적을함께읽고토론하는자리에서반문이허용되지않는분위기에답답함과당혹감을느껴본적이한두번쯤있을것이다.『사상의거장들』은바로그런분위기에그럴만한이유가있었음을속시원히설명해주는책이다.
논리학에‘크레타사람의역설’이라는것이있다.크레타사람이말했다.“크레타사람은거짓말쟁이다.”이말이참이라면,이것을말한그크레타사람은거짓말쟁이가아니므로이문장은동시에거짓이어야한다.이말이거짓이라면,그크레타사람은거짓말을했으므로이문장은동시에참이어야한다.
사회주의중국의문화대혁명기(‘문혁’,1966~76),마오쩌둥(모택동)이내건문혁의금과옥조는‘반항함이옳다(조반유리造反有理)’였다(320쪽그림참조).그렇다면,이구호를내건마오이즘과문혁에대해서도이의를제기하거나저항해도좋은가?누구나다아는얘기지만,이는어림도없는일이었다.
논리적으로거짓인구호,현실적으로비참한중국인민의현실앞에,프랑스공산주의자들을비롯한서유럽의신좌파(NewLeft)지식인들은침묵했다.일찍이저자글뤽스만은“철학자는성밖의진실을소리높여외치는카산드라가되어야한다”고했다.전체주의의인권탄압현실을대놓고비판하지못하는철학은직무유기를하는것이고,이는그들이지적으로무뎌져있기때문이라고글뤽스만은지적한다.『사상의거장들』은이러한지적둔감성의근원에,피히테헤겔마르크스니체등이름만으로도사람을주눅들게하는‘사상의거장들’(!)이있다며직격탄을날린다.그리고이러한통렬한비판이결국1980년대이후동독과소련을비롯한동유럽사회주의블록의몰락을촉발하는기폭제가되었으니,글뤽스만은그자신의말대로‘철학의카산드라’가된셈이다.
『사상의거장들』은1977년에프랑스어초판,1980년에영역판(MasterThinkers)이나왔다.번역자박정자교수는영역판이나오기전인1978년에이책국역을『주간조선』에연재한바있다.한국어완역단행본으로나오는것은이번이처음이다.프랑스어원저에는주석(미주)에번호와정확한위치가없으나,국역판은일일이주석자리를표시하고번호를매겼다.원저에없는도판들을책내용의흐름을따라적소에첨가해이해를높였다.유럽,특히독일과프랑스의근현대사와지적전통이버거울독자들을위해책머리에35쪽분량을역자해제(‘옮긴이의말’,7~35쪽)를마련했다.
‘이념의사기꾼들’이된독일사상의거인들
책앞표지에찍힌네사람의얼굴에,공부좀해본사람이라면가슴부터뛰기시작할지도모른다.피히테,헤겔,마르크스,니체?게다가책제목,‘사상의거장들’이라니!
그러나제목바로아래찍힌부제와뒤표지헤드라인들은,미안하지만이러한순진한기대를깡그리배반한다.“그들은어떻게유럽과세계를속였는가”,“그들은이념의사기꾼들이었다.”
이책이‘네사람의에이스(A’s)’(제2부해당타이틀,153쪽.기초적전기사항은435~437쪽)라고부르는이들에대한비판을이해하려면당연히이네사상가에대한기본적인이해는필수다.각사상가에할애한절들의제목은그들사상의요지를뽑아효과적으로비꼬고있다.“왜나는혁명적인가”(피히테),“왜나는박식한가”(헤겔),“나는어떻게숙명이되었는가”(마르크스),“나는어디를통해모든것위에올라가게되었는가”(니체).네사람모두독일(정확히는,1870년에이르러서야독일로통일되는지역)인인것이우연의일치인것만은아니다.책은독일을서슴없이‘파시즘의본거지’(84)라고단정하는가하면,19세기독일관념론이라는지적전통을‘독일병(病)’(166쪽~)이라며싸잡아비난하고있으니말이다.
그렇다고이책이유대계프랑스인의민족감정섞인반(反)독일론인것만도아니다.자국프랑스혁명기의대학살들(예를들어9월학살,414~416쪽),심지어혁명의부산물인나폴레옹의대두와부르주아독재(420쪽~)까지도파시즘적현상으로여지없이비판하고있으니말이다(거꾸로,독일인인헤겔이예나에입성하는나폴레옹을보며“저기세계정신이지나간다!”며찬탄했던것과비교해보라!?194쪽그림).
결국문제는파시즘,전체주의이다.나치와공산주의는현실에서견원지간이었지만,글뤽스만의돋보기아래히틀러와스탈린과마오쩌둥(그리고역사상의수많은식민주의와독재정권들)은‘파시즘’이라는이름아래하나다.더욱경계할것은,파시즘의이모든광기가이성,발전,법이라는이름아래행해질때이다(417쪽).반인륜적인광기또는광신이이성의탈을뒤집어씌운원죄가바로이들네명‘사상의거장들’에있으며,이성의탈을썼기에역시이성을등대로표방하는지식인그룹들이동시대파시즘의만행을고발하는데머뭇거릴수밖에,차라리둔감할수밖에없었다는것.
라블레,『반지』,소크라테스?만만찮은지적도전
『사상의거장들』의지적도전첫번째.본문은프랑스16세기소설가프랑수아라블레(Fran?oisRablais,1494~1553)의『가르강튀아』이야기로시작한다.루이필리프의왕정복고기를풍자한화가도미에(Honor?Daumier)의그림(1831)속,모든것을먹어치우는거인가르강튀아말이다.『가르강튀아』연작의알레고리를글뤽스만은20세기중국사회주의와효과적으로매칭한다.소설속텔렘(Th?l?me)수도원의모토‘네맘대로하라’는문화대혁명의‘반항함이옳다’의알레고리이다.파뉘르주의수도사는단하나,‘네맘대로하라’라는규율만을받았으나,결국은한사람이제안하면모든사람이일사불란하게똑같은일을하게되는패러독스에다다른다.‘반항함이옳다’고했으나,정작반항하라고명령하는그권력에대해서만은반항이허용되지않는역설말이다.
지적도전두번째.니체비판은당연히바그너비판으로연결된다.나치즘(그리고그만행의하나인홀로코스트)의길을예비한작곡가로흔히지목되는바그너의오페라/악극중에서도『반지』3부작은책의제1부와뒤의니체비판에필수적이다.제1부에서,전체주의(『반지』의보탄Wotan에해당)가힘을얻는세가지방법중하나가,우직하고힘세고선하되무지한사람(즉,지크프리트)을이용하는‘지크프리트의길’이다(115쪽).이아날로지는니체비판에서,『반지』전체(즉,『라인의황금』부터『신들의황혼』까지)를관통하는,‘근대적개인’지크프리트를중심으로전개되는알레고리로되풀이된다(395쪽~).
지적도전세번째.라블레소설중둘(『제3서』,『제4서』)의주인공파뉘르주(Panurge)는철학자소크라테스의알레고리이다.자유롭도록태어난인간이실제로는자유롭지못하게되어가는과정을그사회에서유일하게보고있는사람이파뉘르주/소크라테스이다.공동체구성원중유일하게전체주의를꿰뚫어보고전체주의화(化)에저항하는파뉘르주/소크라테스는어떤의미에서혁명가와도같다(136쪽).레닌이나카스트로같은‘직업혁명가’말고,혁명이라는말의순수한본래뜻에서이다.그러나(마치카산드라의숙명과도같이)아무도이들의말을들어주지않으니소크라테스적혁명은실패할수밖에없고,소크라테스는끝내죽음을맞고,이를의연하게받아들인다(122쪽그림참조).파뉘르적/소크라테스적방법은불가능하다(123쪽~).푸코(MichelFoucault)나사르트르(Jean-PaulSartre)같은사상가들의이름을언뜻언뜻맞닥뜨리는것은덤이다.
『사상의거장들』FAQ와두줄답변
(Q1)사상의거장들,또는불후의고전들에대해너무무례한것아닌가요?
(A)거장들의고전은문장이훌륭하거나이론이정밀하다는등의뛰어난점이확실히있지만,그것들의내용까지모든시대에통용될진리인것은아닙니다.현재(그리고예측가능한미래)의올바른가치를기준으로,배울것은배우되비판할것은비판하는것이고전의참다운현대적수용입니다.
(Q2)‘유대계프랑스인’이라는작가의출신때문에편파적으로독일에적대적인것은아닌가요?
(A)역사적으로프랑스가독일(그리고해협건너영국)과사이가나빴던것은사실입니다.하지만이를테면일본의정한론(征韓論)이나중국의동북공정을한국인이비판한다고해서그것을편파적이라할수있을까요?
(Q3)포퍼『열린사회와그적들』의데자뷔느낌이네요.
(A)역시전체주의비판인카를포퍼(KarlPopper)의이책(1945)은플라톤,헤겔,마르크스를비판하고페리클레스,소크라테스,칸트를옹호하니까,과연세명(헤겔,마르크스,소크라테스)이『사상의거장들』과겹치네요.그만큼그들이비판받거나지지받을이유가있다는뜻이겠지요?
(Q4)하지만피히테는민족주의자였고,마르크스의유물론은헤겔의관념론을전복했고,니체도안티헤겔주의자아닌가요?이들을한통속으로싸잡아비난할수있을까요?
(A)동아시아침략의원흉이토히로부미나2차대전을일으킨도조히데키도일본입장에서는민족주의자였지만인류에게는죄인이지요?청나라와일본은똑같이한반도를놓고전쟁까지했지만,그렇다고한쪽이불의이고다른쪽은정의가되나요?
(Q5)내용도문장이너무어려워요.프랑스책들은다그런가요?
(A)아픈지적이네요.모든책이모든사람들을똑같이만족시킬수는없으니,지적도전의좋은기회로삼으시기를권합니다.
(Q7)그래도배경설명이라든가이런것은좀있어야하잖아요.
(A)미흡하나마꽤많은분량의역주를별색으로넣었습니다.전체적으로는맨뒤‘역사의종말’(401~431쪽)로역사적배경을파악하고,이어서상당히긴옮긴이해제(7~41쪽)를읽은뒤본문에도전해보기를권합니다.
(Q7)200년전사람들에대한40년전의비판이라니,참낡은얘기네요.
(A)첫번째FAQ에서도말했지만,과거의굵직한논쟁에서비판적으로학습할줄알아야미래가밝아지는겁니다.그래서이책을이땅의‘젊은보수’들에게바치고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