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해방되지않으면,아무도해방될수없다!
퀴어,장애,페미니즘,환경,계급을넘나드는교차성정치의교과서
장애인퀴어페미니스트가써내려간치열한저항의사유
소수자를둘러싼두가지시선이있다.한편에서는소수자의제는‘불필요한소모적논쟁’으로치부된다.주류의시선에서다양한소수자를둘러싼문제는언제나골칫거리혹은‘나중’으로미뤄져도되는것처럼취급되거나아예비가시화되곤한다.다른한편에서는소수자운동의이름으로다른소수자정체성을배척하는경향도존재한다.최근한여대에합격한트랜스젠더를둘러싼논쟁에서명백히드러나듯이,단일한쟁점에갇혀소수자억압을하나의기제로만파악하려하며연대를거부하기도한다.
일라이클레어의『망명과자긍심:교차하는퀴어장애정치학』은이러한상황을넘어서,젠더,계급,인종,장애여부가교차하는지점을복합적으로파악하고각기다른주제로투쟁하는운동사이의연대에기초한‘교차성정치’를구성해야한다고주장한다.저자는연대와제휴가어떻게가능하고왜반드시필요한지를다각도로설득하며,이세상의모든복잡다단함을반영하는정치를구축하는것이왜절대적으로필요한일인지를드러낸다.
특히이책의강점은저자일라이클레어의독특한위치성에서비롯된다.그는노동계급마을출신의선천적뇌병변장애인,친족성폭력생존자,생물학적여성으로태어나젠더퀴어정체성을지닌소수자로서살아왔다.저자는수많은소수자성이교차하는자신의몸에대해성찰한다.이러한다층성은자연스레단일쟁점에매몰되지않는시각을열어주며,연대를통한다중쟁점정치,교차성정치를가능하게하는비전을제시한다.
『망명과자긍심』은1999년초판이발간된이후2009년과2015년에두차례개정을거치면서오랫동안읽혀온책이다.영미권에서는퀴어페미니즘장애학의가장중요한텍스트중하나로평가받고있으며,장애학,퀴어학,여성학,젠더학수업의필독서로쓰이고있다.또「옮긴이후기」에서는‘크립’,‘프릭’,‘트랜스’,‘젠더퀴어’등책에등장하는소수자관련용어에대한자세한설명을덧붙여서독자의이해를돕고자했다.이책은한국에서도다양한운동들간연대의정치를구성하기위한나침반이되어줄것이다.
운동은어떻게서로적대하게되는가?
세상의모든복잡다단함을반영하기위하여
하나의쟁점에만몰두하는정치는때로편협한시각과운동들사이의적대를낳는다.일라이클레어는자본주의,가부장제,비장애중심주의,인종주의,제국주의가서로협력하고있는데,이를보지않고한가지억압에만몰두하는것은문제를해결할길을열지못하고심지어다른억압을강화하는결과를낳을수도있다고비판한다.저자는여러사례를통해특정쟁점에만몰두하는운동이어떻게적개심을부추기고다른차별과착취를무시하게되는지를보여준다.
탐욕적인목재회사에의한산림파괴에저항하는환경운동가들은때때로벌목노동자들을“멍청한짐승”혹은산림을파괴하는“목재산업을방조하는충성스러운짐승”(116쪽)처럼묘사한다.이러한관점은벌목노동자들역시자본주의적착취의대상이자,산림파괴에의해줄어든일자리로생계의위협을받는희생자라는점을인식하지못하게한다.또이는무차별적인자원개발의혜택을누린우리모두가공모자였다는점을지워버리고,마치벌목노동자들에게우리보다더큰책임이있다는양떠넘기게만들며,벌목업경영자들이그러한혐오뒤에숨게돕는다.
성인잡지《플레이보이》화보에등장한하반신마비장애인엘런스톨을둘러싼논쟁은페미니즘과장애문제,여성에대한성적대상화와장애인을무성적인존재로대하는시각사이의간극들을드러낸다.저자는엘런과그를지지하는장애활동가들을비판했던비장애인페미니스트들에게되묻는다.장애인들이“젠더도없고무성적인,욕망할만하지않은존재”(231쪽)로취급받는인식에대해고민해본적은있는지,그들이상정하고있는여성이‘중산층,백인,이성애자,비장애인여성’을의미하고있는건아닌지에대해서말이다.이는여성의성적대상화를옹호하는것이아니라,그들의주장이“계급,인종,성적지향,젠더,장애가엮인그물망”을보지못하고,“트랜스섹슈얼리티와트랜스젠더경험을무시하고트랜스여성을비난하는”(232쪽)시각을드러내는게아닌지묻는것이다.
착취와억압의역사적계보그리기
‘프릭쇼’에서‘의료화’로의이행은과연진보인가?
일라이클레어는착취와억압의더깊은근원을찾기위해역사적탐구로나아간다.예컨대자본주의적환경파괴의근원을들여다보기위해미국개척사의제국주의적성격을읽어내고,오늘날장애를보는편견의시선이어떻게구성되었는지를살펴보기위해‘프릭쇼’와‘의료화’의과정을따라간다.
미국자본주의가드러내는탐욕의기원은서부정복과정에서부터찾아볼수있다.유럽계백인미국인은자원에대한탐욕으로가득차미국북서부로몰려들었다.그들은이윤을쫓아모피,농경지,황금,목재를찾아나섰고,그과정에서원주민을학살하고마을을세웠다.이러한과정을가능하게한이면에는특정한세계관,즉자원이무한하다는생각,특정한탐욕을당연시하는시각,인종차별주의등이자리하고있다.일라이클레어는이런세계관이오늘날의자본주의에도여전히남아있다고말한다(이는비단미국뿐만이아닌자본주의전반에뿌리내리고있는세계관이다).따라서근본적인변화를위해서는임시처방이아니라,이와같은자본주의적신념,정책,관행을바꿔야만한다.그리고이러한변화때문에삶의기반이흔들린마을과사람들에대한책임까지도고려해야만한다.
‘프릭쇼’와‘의료화’의역사는장애에대한편견과맹목이역사적으로구성되어온과정을보여주며,오늘날장애인을보는시선이과거에비해정말‘진보’한것인지에대한의문을제기한다.프릭쇼는‘정상성’에서벗어난사람들,즉장애인,유색인,혹은외적으로특이한사람들을돈을받고전시했던것을가리킨다.일라이클레어는프릭쇼가비장애중심주의와인종차별주의와제국주의에기반한끔찍한착취였다는점을부정하지않지만,그렇다고이후에이뤄진것처럼장애인을시설에가두는식의‘의료화’가진보였는가에대해서는의문을제기한다.흥행사와프릭은‘시골뜨기’의돈을뜯어내기위해공모하기도했으며,당시장애인에게프릭쇼는‘유일한’일자리이기도했다.반면오늘날장애를분석하는지배적인모델인의료적모델은장애를병리적인것으로만들고,동정과비극의대상으로만들어버린다.그리고장애인을자립이불가능한무능한존재로여겨,그저시설에모아놓고‘보호’하면된다고생각하게만든다.따라서‘프릭쇼’의대안은‘의료화’가될수없다.일상적억압을끝장내기위한새로운관점이요구되는것이다.
교차하는정체성위의사유
자본주의적억압에둔감한퀴어운동을비판하다
일라이클레어는뇌성마비장애인으로태어나,시골의벌목노동자마을에서자라났다.어릴적아버지와그주변인들에게성적학대를당한성폭력생존자이며,생물학적여성으로태어나젠더퀴어로서살아왔다.저자는이처럼수많은소수성이교차하는독특한위치의당사자로서,흔히소수자들사이에서도간과되곤하는차별과배제의문제에예민하게반응하고,그경계를교차하고넘어서는사유를펼쳐낸다.
그는퀴어운동이지나치게도시적인정체성에사로잡혀있는것은아닌지묻는다.‘시골에서자신을숨기고살던퀴어가도시로나와커밍아웃하고햇살아래살아간다’는전형적인퀴어해방서사는퀴어인프라가도시에집중되는것을허용하게만들고,시골은퀴어혐오의공간으로낙인찍어버린다.이는시골노동계급의가난한퀴어들이고립되게만들고,좀더넓은연대를불가능하게만든다.
또한퀴어운동이자본주의적억압에대해둔감하지않은지,심지어그것에동조하고편입되는걸목표로삼고있는건아닌지도묻는다.일라이클레어는1969년뉴욕맨해튼에서벌어진기념비적인성소수자투쟁인‘스톤월항쟁’25주년행사가원래의저항성을잃은자본주의적“호화쇼”(104쪽)가되어버렸다고비판한다.그리고특정한퀴어운동이중산층과상류층의전유물이되어버리지는않았는지,왜그런햇사에서창출되는돈이가난한노동계급퀴어에게는돌아가지않는지를묻는다.
혐오와동정을넘어
‘집으로서의몸’을되찾기위하여
퀴어정체성과페미니즘,계급과환경을오가는일라이클레어의급진적사유가시작되는곳은다름아닌‘몸’이다.일라이클레어는차별과억압속에서“집으로서의몸”(57~61쪽)을박탈당하고도둑맞았다는“망명”의감각으로부터사유를시작하는것이다.그는정체성에대한오랜탐구끝에자신이자리잡은퀴어공동체역시오롯이‘집’이라고부를수없다고말하며,심지어성적학대의공간이자퀴어에대한억압의공간인시골역시“집으로서의몸”의일부라고고백한다.
수많은소수성이교차하는몸에대한사유는,결코하나의소수성의해방만으로는집과우리몸을되찾을수없다는결론에다다른다.
“젠더는장애에다다른다.장애는계급을둘러싼다.계급은학대에맞서려안간힘을쓴다.학대는섹슈얼리티를향해으르렁댄다.섹슈얼리티는인종위에포개진다……이모든것이결국한사람의몸안에쌓인다.정체성의그어떤측면에대해서든,몸의그어떤측면에대해서든,글을쓴다는것은이런미로전체에대해쓴다는뜻이다.”(248쪽)
해방이란곧특정한억압이아닌모든억압으로부터의해방일수밖에없다.가부장제에대한저항없이동성결혼을통해주류에편입되는것을퀴어해방이라고할수없다.탐욕스러운자본주의에대한근본적인저항이없는환경운동은“치명적인상처에반창고만붙여놓는”(139쪽)임시처방이돼버린다.장애인을무성화하고아이취급하는시선에대한성찰없이는여성대상화에대한페미니즘의비판은반쪽짜리일뿐이다.
따라서결국우리의몸을되찾는일,내면화된억압에맞서“자기혐오를자긍심으로바꾸는”(196쪽)근본적인저항은다양한운동간의연대에기반한교차성정치를통해서가능하다.『망명과자긍심』은우리에게그해방의시작을위한“무모하고대담한이야기”(279쪽)를우리에게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