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틀비 혹은 우연성에 관하여

바틀비 혹은 우연성에 관하여

$13.00
Description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의 역설!
창조는 쓰는 순간이 아니라 쓰기를 멈춘 손끝에서 시작된다!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으로 존재의 윤곽을 다시 그리는 탈창조의 철학!
바틀비가 말한다.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 아감벤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반복해서 말하는 이 문장을 고전적인 저항 이야기로 읽지 않는다. 아감벤은 이 단 한 문장에서 창조와 자유를 다시 묻는다. 우리는 늘 더 많이 하고, 더 잘하고, 더 빨리 하라고 요구받는다. 그래서 ‘~해야만 하는’ 필연성에 갇히고 만다. 그런데 필사하지 않기를 선호한다거나 사무실을 떠나지 않기를 선호한다는 식으로 필연성을 거부하는 바틀비의 기이한 선택에서 아감벤은 다른 가능성을 불러낸다. 바틀비가 고집스럽게 반복하는 저 정식은 단순한 거부나 게으름이 아니라 실험임을. 하기를 멈추고, 가능한 것을 되돌아보는 시도라는 것을. 무수히 많은 잠재성이 실현되지 않은 채 묻혀버린 지금 여기의 삶을 다시 배치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아감벤은 다른 문학적 필경사들의 성좌에 견주어 바틀비를 철학적 성좌로 배치하면서 이 책의 첫 장을 연다. 그런 다음에 사유나 정신을 둘러싼 서양 사유의 오래된 은유, 즉 사유=잉크/잉크병, 지성(잠재적 사유)=빈 서판이라는 은유를 소환해 잠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잠재적 사유)을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서판으로, 그리고 모든 잠재성에는 본질적으로 ‘할 수 있음’과 ‘하지 않을 수 있음’이라는 양의성이 있다고 본 점에서 잠재성은 결핍이 아니라, 고유한 존재 양식이라고 아감벤은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 잠재성을 행위로 현실화하여 ‘~하지 않을 잠재성’을 소진시키도록 강요하는 ‘필연성’의 압제 아래 놓여 있다.
바틀비가 반복하는 문장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는, 아감벤이 보기에, 단순한 무기력이나 거절을 넘어, 서구 형이상학의 근간을 해체하는 가장 강력한 철학적 정식이다. 바틀비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필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잠재력’을 행사하는 데 사용해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의 의무로부터 영원히 보호한다. 그리하여 바틀비는 필사를 하지 않는 무위(無爲), 곧 “~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는데요”라는 제스처로 자신의 존재를 필연성에 구속시키지 않고 완전한 잠재성을 보존하는 필경사, 우연성과 비잠재성의 임계에서 창조의 존재론을 드러내는 극한의 형상, 곧 가장 강력한 자기 해방의 형상이자, 모든 강요와 의무에 맞서는 가장 고독하고도 전복적인 자유의 형상으로 떠오른다. 아감벤은 우리의 윤리적 전통이 ‘할 수 있는가’보다는 ‘무엇을 원하는가’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잠재성의 문제를 회피해 왔다고 지적한다. 바틀비는 이 짧지만 밀도 있는 소책자에서 철학이 제대로 말하지 못한 잠재성과 우연성의 편에 서서, 그래서 필연성과 현실화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제2의 창조 혹은 탈창조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저자

조르조아감벤

저자:조르조아감벤GiorgioAgamben
1942년로마에서태어났다.시몬베유의정치철학에관한박사논문을썼고,마르틴하이데거의토르세미나(1966,1968)에참가했다.바르부르크연구소(TheWarburgInstitute)에서연구했고,이탈리아벤야민전집편집에관여했으며,파리국제철학학교에서세미나를진행하면서동시대프랑스철학자들과교유했다.하이데거,발터벤야민,미셸푸코,질들뢰즈등의문제틀을이어받은동시에고대헬라스철학과중세철학에대한문헌학적연구를바탕으로차별화된글쓰기를보여준다.1995년부터2014년까지장장20년동안『호모사케르(HomoSacer)』(1995-2014)프로젝트를완성했다.그밖에도『내용없는인간(L’uomosenzacontenuto)』(1970),『언어활동과죽음(Illinguaggioelamorte)』(1982),『도래하는공동체(Lacomunitacheviene)』(1990),『목적없는수단(Mezzisenzafine)』(1996),『열림(L‘aperto)』(2002),『사유의능력(Lapotenzadelpensiero』(2005),『철학이란무엇인가?(Checos’elafilosofia?)』(2016),『창조와아나키(Creazioneeanarchia)』(2017)등의저서를펴냈다.

역자:양창렬
1995년부터2014년까지장장20년동안『호모사케르(HomoSacer)』(1995-2014)프로젝트를완성했다.고대철학과유럽현대철학의(비)동시대성에관심을두고책을읽고번역하고있다.주로미셸푸코,조르조아감벤,자크랑시에르의저서들을우리말로옮겼다.『현대정치철학의모험』에아감벤에관한글을수록했고,아감벤의『목적없는수단』(공역),『장치란무엇인가?장치학을위한서론』,『사물의표시』를옮겼다.

목차


I.필경사,혹은창조에관하여
II.정식,혹은잠재성에관하여
III.실험,혹은탈창조에관하여

옮긴이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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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거기서조금떨어진곳에는소행성대帶처럼카프카의법정에나오는이름없는서기관들이있다.그러나바틀비의철학적성좌도존재하는바,이성좌만이다른별자리〔문학적별자리〕가단지윤곽만그리고있는인물의핵심을담고있을가능성이있다.(12쪽)

서양철학전통의중요인물을필경사라는볼품없는신분으로소개하고,사유를그에못지않게색다른글쓰기활동으로소개하는이정의는도대체어디서유래하는것일까?(14쪽)

민감한밀랍층이필경사의첨필로갑자기긁히게되듯이,사유의능력은,그자체로는어떤것이아니지만,지성의활동이일어날수있게한다.(19쪽)

이것이필경사바틀비가속하는철학적성좌이다.쓰기를멈춘필경사바틀비는모든창조가그로부터나오는무의극단적형상이며,동시에순수하고절대적인잠재성〔능력〕인이무에대한가장집요한주장이다.(49쪽)

의지가능력〔잠재성〕에대해힘을갖는다고믿는것,활동〔현실성〕으로의이행이능력의양의성(그것은늘할수있는능력과하지않을수있는능력이다)을종식시키는결단의결과라고믿는것―이것이바로도덕이품고있는영원한환상이다.(51쪽)

바틀비는바로의지가능력〔잠재성〕보다우위에있다는이런생각을의문에부친다.신이(적어도규정된능력에의해서는)그자신이원하는것만을진정으로할수있다면,바틀비는〔그자신이〕원하지않고서만할수있다.(52쪽)

바틀비는동의하지않지만그렇다고단순히거부하지도않는다.영웅적인부정의파토스만큼그에게서낯선것도없다.서구문화사에서긍정과부정사이,수락과거부사이,넣기와빼기사이에서이토록단호하게평형상태를유지하는정식은하나밖에없다.(57쪽)

바틀비가제집으로삼는금욕적인낙원에서는모든이유에서완전히해방된오히려더(piuttosto)만있다.그것은선호와잠재성같은것으로서,더는무에대한존재의우위를보증하는데쓰이지않고,존재와무의무차별속에서이유없이존재한다.(68쪽)

진리와의관계,혹은사물상태의존속이나비존속과의관계를모조리끊어버린실험에서만,바틀비의“하지않는편이더좋겠는데요”는그것의완전한의미(혹은그것의무의미)를획득한다.(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