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먼 길’을 나서다
조동례 시인이 10년 만에 시집을 냈다. 그동안 시인은 먼 알래스카를 포함해 길 위에서 살았다. 삶의 물결에 의한 것이기도 하면서 구도의 행각이기도 한 것이었는데, 시인이 도달한 ‘곳’은 “흔들리고 흔들려도/ 낯설어서 생은 살 만한 것”이라는 지점이다. 이 맹물 같은 의미를 알기 위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길 위에서 있었느냐는 질문은 삶이 거대한 과정이라는 진리보다 삶의 ‘결과’나 또는 전리품에 길들여진 논법이다. 따라서 조동례 시인의 구도는 관념적인 깨달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처처에 존재하는 ‘다른 나’를 만나는 여정에 가깝다.
“마음 붙들 곳 찾아 헤매던 그때/ 절집 기웃거려도 인정 없고/ 처처를 떠돌아도 마음” 아플 때 시인이 만난 것은 “응 무 소 주 이 생 기 심”(應無所住而生其心)인데 이는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뜻은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 내라”(「꿈이 꿈인 줄 알았더라면」)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면 마음껏 아파하고 또 떠날 때는 떠나는 게 삶이라는 깨달음을 안고 이제 시인은 머무는 곳의 사람이 되었다.
월등할매 죽고
오래 비워둔 빈집에 들었더니
이웃들은 나를 월등댁이라 불렀다
(…)
제 무덤 자리에 알 낳는 연어처럼
봄꽃 지면 여름꽃 가을꽃 피어서
이별은 아쉬움이 아니라 설렘이더라
_「먼 길」 부분
“이별은 아쉬움이 아니라 설렘이더라”는 진술은 ‘먼 길’ 이후가 아니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시집에 실린 여러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언제나 ‘먼 길’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머묾도 ‘먼 길’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을 위 시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경이를 찾아서
‘먼 길’이 결국 ‘먼 길’일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통념으로는 ‘길’은 뿌리를 배신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뿌리가 없으면 길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가 없고 당연히 길 위의 삶도 불가능한 법이다. 달리 말하면 ‘길’은 자기 뿌리를 고통스럽게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길을 떠나는 것 자체가 뿌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조동례 시인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더 깊게 뿌리를 자신도 모르게 의식하고 있기에 ‘먼 길’이 가능했을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다 끝이다 하는 순간
받아주는 곳이 만(灣)이라 했다
연어가 짝을 만나려 가는 길
강이 강을 버려 바다를 안고
바다가 바다 버려 강을 안아
반쪽이 반쪽을 채우고 있다
_「만」 부분
“강물이 흘러가다 끝이다 하는 순간”은 강물의 소멸이 아니라 ‘다른 물’이 되는 것이다. 위 시에서 닿은 곳은 “만(灣)”인데, 여기에서는 강이 강을 버리고 바다가 바다를 버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만(灣)”이다. 만(灣)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강이 강을 버리고 바다가 바다를 버리고 난 다음 탄생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다 말하지 않았지만 혹시 만(灣)은 만(卍)이 아닐까?
만(灣)이 ’먼 길‘의 여정 중에 결국 도달한 뿌리라면, 시인의 태생적인 뿌리는 아무래도 고향일 텐데 이제 그 고향은 “뿌리가 반이나 드러난”(「뿌리가 반이나 드러난 당산나무 아래서」) 곳이다. “뿌리가 반이나 드러난”이라는 표현은 뒤집어 읽으면 고향이 자신의 뿌리라는 고백에 다름 아닌데, 이제 그 고향은 “출세한 사람은 바빠서 못 가고/ 실패한 사람은 쪽팔려서 못 가는 고향”(「신귀거래사」)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시인에게 고향은 애당초 돌아가지 못할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먼 길’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고향이 애당초 돌아가지 못할 곳이었다면 거기에는 무슨 사유가 있을 터, 그것에 대해서 조동례 시인은 이 이상 말하고 있지 않지만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만은 여진처럼 울리고 있다.
고향의 사라짐은 경이(驚異)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 경이의 상실에 익숙해진 사람은 길을 떠나지 못한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곧 경이를 찾아가는 일인 반면에 경이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경악과 불안’ 속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먼 길’의 여정에서 만난 존재들이나 또는 불교적 깨달음 등이 결국 ‘경이’였음을 독자들은 여러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이’의 이면에는 ‘맹물’이 출렁이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포터늪 난장」에서 “이 바닥에서 살아남은 것들은/ 민물 짠물 섞일 줄 아는/ 진짜 맹물 맛을 아는 것이다”는 말은 만(灣)/만(卍)에 시인이 도달했음을 가리킨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시인은 “포터늪”이 “순천만을 닮아서”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자신을 “맹물 세수가 화장의 전부인 나”(「다른 안목」)라고 규정하는 것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해설을 쓴 박명순 문학평론가가 시인의 시를 ‘맹물의 시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조동례 시인이 10년 만에 시집을 냈다. 그동안 시인은 먼 알래스카를 포함해 길 위에서 살았다. 삶의 물결에 의한 것이기도 하면서 구도의 행각이기도 한 것이었는데, 시인이 도달한 ‘곳’은 “흔들리고 흔들려도/ 낯설어서 생은 살 만한 것”이라는 지점이다. 이 맹물 같은 의미를 알기 위해서 그 오랜 시간 동안 길 위에서 있었느냐는 질문은 삶이 거대한 과정이라는 진리보다 삶의 ‘결과’나 또는 전리품에 길들여진 논법이다. 따라서 조동례 시인의 구도는 관념적인 깨달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처처에 존재하는 ‘다른 나’를 만나는 여정에 가깝다.
“마음 붙들 곳 찾아 헤매던 그때/ 절집 기웃거려도 인정 없고/ 처처를 떠돌아도 마음” 아플 때 시인이 만난 것은 “응 무 소 주 이 생 기 심”(應無所住而生其心)인데 이는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 뜻은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 내라”(「꿈이 꿈인 줄 알았더라면」)는 것이다. 마음이 아프면 마음껏 아파하고 또 떠날 때는 떠나는 게 삶이라는 깨달음을 안고 이제 시인은 머무는 곳의 사람이 되었다.
월등할매 죽고
오래 비워둔 빈집에 들었더니
이웃들은 나를 월등댁이라 불렀다
(…)
제 무덤 자리에 알 낳는 연어처럼
봄꽃 지면 여름꽃 가을꽃 피어서
이별은 아쉬움이 아니라 설렘이더라
_「먼 길」 부분
“이별은 아쉬움이 아니라 설렘이더라”는 진술은 ‘먼 길’ 이후가 아니면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시집에 실린 여러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언제나 ‘먼 길’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머묾도 ‘먼 길’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을 위 시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경이를 찾아서
‘먼 길’이 결국 ‘먼 길’일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통념으로는 ‘길’은 뿌리를 배신하거나 부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뿌리가 없으면 길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가 없고 당연히 길 위의 삶도 불가능한 법이다. 달리 말하면 ‘길’은 자기 뿌리를 고통스럽게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길을 떠나는 것 자체가 뿌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조동례 시인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더 깊게 뿌리를 자신도 모르게 의식하고 있기에 ‘먼 길’이 가능했을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다 끝이다 하는 순간
받아주는 곳이 만(灣)이라 했다
연어가 짝을 만나려 가는 길
강이 강을 버려 바다를 안고
바다가 바다 버려 강을 안아
반쪽이 반쪽을 채우고 있다
_「만」 부분
“강물이 흘러가다 끝이다 하는 순간”은 강물의 소멸이 아니라 ‘다른 물’이 되는 것이다. 위 시에서 닿은 곳은 “만(灣)”인데, 여기에서는 강이 강을 버리고 바다가 바다를 버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만(灣)”이다. 만(灣)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강이 강을 버리고 바다가 바다를 버리고 난 다음 탄생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다 말하지 않았지만 혹시 만(灣)은 만(卍)이 아닐까?
만(灣)이 ’먼 길‘의 여정 중에 결국 도달한 뿌리라면, 시인의 태생적인 뿌리는 아무래도 고향일 텐데 이제 그 고향은 “뿌리가 반이나 드러난”(「뿌리가 반이나 드러난 당산나무 아래서」) 곳이다. “뿌리가 반이나 드러난”이라는 표현은 뒤집어 읽으면 고향이 자신의 뿌리라는 고백에 다름 아닌데, 이제 그 고향은 “출세한 사람은 바빠서 못 가고/ 실패한 사람은 쪽팔려서 못 가는 고향”(「신귀거래사」)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시인에게 고향은 애당초 돌아가지 못할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먼 길’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고향이 애당초 돌아가지 못할 곳이었다면 거기에는 무슨 사유가 있을 터, 그것에 대해서 조동례 시인은 이 이상 말하고 있지 않지만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만은 여진처럼 울리고 있다.
고향의 사라짐은 경이(驚異)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 경이의 상실에 익숙해진 사람은 길을 떠나지 못한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곧 경이를 찾아가는 일인 반면에 경이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경악과 불안’ 속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먼 길’의 여정에서 만난 존재들이나 또는 불교적 깨달음 등이 결국 ‘경이’였음을 독자들은 여러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이’의 이면에는 ‘맹물’이 출렁이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포터늪 난장」에서 “이 바닥에서 살아남은 것들은/ 민물 짠물 섞일 줄 아는/ 진짜 맹물 맛을 아는 것이다”는 말은 만(灣)/만(卍)에 시인이 도달했음을 가리킨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시인은 “포터늪”이 “순천만을 닮아서”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 자신을 “맹물 세수가 화장의 전부인 나”(「다른 안목」)라고 규정하는 것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해설을 쓴 박명순 문학평론가가 시인의 시를 ‘맹물의 시학’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길을 잃고 일박 (조동례 시집)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