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 도착했다

낯선 곳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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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오래된 것’의 귀환
오늘날 한국 시에서 새로운 사물 또는 새로운 사건에 대한 호명은 이제 낯설지 않은 현상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것들은 사물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상품의 이름 즉 새로운 제품명에 가깝다. 그래서 시나 시집의 제목에서 구체적인 물성이 담긴 경우는 점점 희소해져 간다. 물론 작품 자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인 자신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어떤 혼종의 화자가 등장해서 새로운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동의 언어를 읊조린다. 이에 반해 김영서의 새 시집 『낯선 곳에 도착했다』에서는 ‘오래된 것’이 대세를 이룬다. 표제작인 「낯선 곳에 도착했다」에서도 “집 안으로 낙엽이 따라 들어”오는 순간에 발생하는 감각이 두드러진다. 낙엽이 집 안으로 들어온 사건은 화자에게서 통념적인 시간 의식마저 지워버리는데 화자의 감각은 그 이유를 묻지도 않고 무방비로 개방된다. 감각의 기억은 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드디어 자신이 사실 “오랫동안” 그리 살아왔다는 고해를 이끌어 낸다. 물론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후각을 자극하는 “오래된 와인”이 감각의 구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시인이 ‘오래된 것’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단순하게 열거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오래된 와인”, “오래된 레코드 음반”, “오래된 나무”, “오래된 집”, “오래된 소주병”, “오래된 농기구” 등. 그런데 왜 시인의 마음 안에는 이런 ‘오래된 것’으로 가득 차 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시인이 처한 삶의 조건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혹은 시인 자신이 점점 ‘오래된 것’이 되어 가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어르신이 한자리를 계속 쓸어 내고 있다
쓰레받기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희미해진 노안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자다
그림자도 턱이 있고 굴곡이 있다
_「당신의 그림자」 부분

이사 온 지 20년 넘었다
철제 현관문은 삐그덕거리고
화장실은 스위치를 두 번 눌러야 불이 들어온다
_「오래된 집」 부분

일차적으로 화자가 만나는 사람들이나 화자 자신이 ‘오래된’ 존재이기도 하고, 화자가 살고 있는 집, 화자 주위의 사물이 ‘오래된’ 것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확실히 ‘오래된 것’의 귀환이지만 그것은 생성이지 복고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저자

김영서

1964년충남예산에서태어나서지금까지예산에서살고있다.2005년계간『시로여는세상』신인상으로등단하고2006년아르코창작기금을받았다.시집으로는『언제였을까사람을앞에세웠던일이』『그늘을베고눕다』『우리는새로만난사이가되었다』가있다

목차

시인의말5

1부마리아주

식구·12
고립에대하여·14
하느님궁둥이·15
마늘쪽엉덩이·16
낯선곳에도착했다·18
모닝커피·20
늦은점심·22
꼬리자르기·24
완두콩이사라졌다·26
달력을여러번접었다·28
그림자밖으로밀려났다·30

2부따뜻한밤

따뜻한방·34
당신의그림자·37
비린내풍기는손·38
돌아갈곳이있었다·40
볼록렌즈·42
2021년12월·44
참늙기힘들다·46
호박차·48
아침마다딱따구리다·50
오래된집·52
염력·54
빈병·56
벽돌한장·58

3부식구

삽질·62
출판기념식·64
가족사진·66
소꿉친구·68
고향·70
상사화·71
노인일자리1·72
노인일자리2·74
이사·75
빗살무늬토기·76
손가락이아프다·78

4부흔들리는정원

마스크·80
꽃진자리·82
단풍들겠다·84
고요했으면·85
환청·86
꽃반지·88
미용실에서단잠·89
흔들리는정원·90
음복·92
아름다운눈물·94
들들볶아서맛을찾아낸다·96
바스락거리는귀·98
똥싸러간다·100
죽부인·102
예산장날·104

해설

꽃진자리에서피어나는,그리운감각(오홍진)·107

출판사 서평

과거는재탄생한다

왜냐하면,이미‘오래된것’을통해김영서시인은기억을다시살고있기때문이다.기억의소환은재현으로서의상기(想起)라고인식돼왔고한편으로기억을사실의일정한왜곡으로말해져왔지만,우리의삶은기억을다시살면서기억을변화시킨다고말해야옳다.기억은데이터가아니기때문이다.즉사람이과거의기억으로돌아가는것은기억의변용으로봐야하며중요한것은기억을얼마나현재화하는가하는점이다.

살아가는이야기끝에이웃에서김장김치한통얻었다
김치통을들고북극을한바퀴돌았다
집으로오는동안김치통이얼었다
사람도김치처럼익거나쉬거나하는데
살얼음낀동치미같았으면좋겠다흔들림으로대꾸하는
_「돌아갈곳이있었다」부분

십년도안된세탁기를한번고장으로버렸는데
사용한지삼십년넘어선나는어찌될까
버려진벽돌을집안으로들이는것을보고
작아지고단단해지자고
이불로달빛을덮는다
_「벽돌한장」부분

표제작인「낯선곳에도착했다」에서이미집안으로들어온“낙엽”따라시를쓰는(현재의)화자의모습을생성시키고있듯이,「돌아갈곳이있었다」에서도현재의“한파경보”를통해서과거의“그양반”을상기하고이미지의연쇄끝에“김장김치한통”에이른다.그리고“김장김치한통”처럼자기삶이“살얼음낀동치미같았으면좋겠다”고한다.‘현재-과거-현재′’의구조를가지고있는이작품에서‘현재′’는‘현재’와는다른상태임이확인된다.「벽돌한장」도동일한구조를가지고있으며“버려진벽돌”을통해“작아지고단단해지자”는결의를보여주고있다.
김영서의시는일반적인서정시의문법에충실한편이다.조우한사람과사물,사건을통해서자신을비춰보면서서정을변화시킨다는차원에서말이다.하지만대상에대책없이끌려가지는않는다.대상에끌려가는서정시에는자아의변화가있는것이아니라자아의소멸이있기마련인데,이것은대상에대한비판적인식이없는경우일것이다.대상에대한인식은결국자기인식이다.그리고이자기인식이있는서정시야말로‘현대성’을확보한다.김영서의서정시는자기인식에서더나아가이웃과의‘관계’까지돌아본다는점에서든든한믿음을주는데바로이지점에서새로운시간이생성한다는점을눈여겨볼일이다.
다음의시가그실증이다.

그러다가젖이마르면
날개를내려놓고쉰다는거
마침내들판이조용해진다는거
뿌리까지삭아없어져도
꽃이진자리에봄마다
어김없이꽃이핀다는거
다시세상이시끌벅적해진다는거
_「꽃진자리」부분

추천사

김영서는지금은시간저편으로흘러간사물들을애타게그리워하며시를쓴다.‘그리움’이라는말로는채표현될수없는장소에서그사물들은꿈틀대고있다.(…)시인이그리워하는사물이란달리말하면시간을견디고끝내살아남은사물이라고할수있다.별이쏟아지는곳은어딘가에분명있을것이다.하지만시인은그곳에쉬이가지못하리라는걸분명히알고있다.그곳에가는순간별이쏟아지는기억은더이상시간속에서살아남을수없기때문이다(오홍진,문힉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