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 삶창시선 76

너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 삶창시선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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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수수하게 뒷자리에 앉으려는 시
이은택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읽는 방법은 시에 대한 어떠한 기성 관념과 편견을 먼저 내려놓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시에 대한 ‘지식’도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시가 원래 지식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시인에게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식마저 시의 용광로 안으로 들어오며 그 형태가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현대시 특유의, 자아가 너무 괴로워서 못 살겠다는 투의 엄살도 이은택 시인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자신의 살아온 시간과 현재 대면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담담한 읊조림이 있는데, 시인은 여기에서도 대단한 통찰을 보여주겠다고 덤비지 않는다.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전할 뿐이다. 이 과정에 자의식의 겸허가 있으니 언어는 어쩔 수 없이 투명해진다. 하지만 그 투명함은 한 잔 마셔도 좋을 것 같은 건강한 빛이 어리고 있다.

동네 친구들과 늦도록 쏘다니다
슬며시 대문 열고 들어서면
안방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

얘야, 동생 안 들어왔다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아라
_「지그린다는 것」 부분


그런데 행복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진짜 있다면 사회에도 적용될 터
우리 가족의 행복 총량을 끌어올리려면 결국은
다른 가족의 행복 총량을 뺏어 와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_「행복 총량의 법칙」 부분

인용한 「지그린다는 것」는 너무도 당연한 사람 살이의 상식 또는 기본적인 도덕을 말하지만 그것이 강요되거나 규범화되어 있지 않다. 동생이 아직 안 들어왔으니 문을 “잠그지 말고 지그려 놓”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뒤에 들어오는 동생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는 동시에 누군가 우리 집으로 들어올 존재가 있는 한 문을 잠그지 말라는 전언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혜 아닌 지혜일 터, 시인은 이 작품의 말미에서 이것을 아이들에게 전달해 주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말씀도 그 말씀이지만 “내가 들어오는 줄을 어떻게 아셨을까”라고 말이다. 눈치 못 채게 “슬며시” 들어왔는데 말이다. 얼핏 보면 시적 눙침 같지만 가만히 음미해 보면 어머니가 가졌던 생(生)의 기미에 대한 감각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 총량의 법칙」에서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마음의 밑자락에 꼭 간직해야 할 것을 일상적인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엊그제는 드디어 내가 우리 클럽 월례회에서 우승했다/ 크게 기뻤으나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이 심심한 마무리의 속뜻은 무엇일까. 이은택 시인은 학생들을 오래 가르친 교사지만 최소한 시에서는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적 자아를 독자의 앞에 두려고도 하지 않고 어느새 뒷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앞에서 말했던 ‘시적 눙침’은 사실 뒷자리에 앉으려는 시인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말없이 뒷자리에 앉으려는 시인의 태도는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대할 때도 변함없이 드러난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5ㆍ18 민주묘역”에서 시인은 아주 사소한 경험, 즉 화장실에 들어온 “날것”에게 드는 연민의 감정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의 유사성(analogy)으로 퉁치지 않는다. 도리어 낮고 준열하게 자신을 역사의 뒷자리에 앉힌다.

그런데 그 날것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닫힌 유리창만 쫓아다니며
한사코 머리를 부딪고 있다

평생 갚아도 못 갚을 큰 빚을
이렇게 푼돈 갚듯 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_「빚」 부분

이런 시인의 태도가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에 어떤 투명함을 준다. 이 투명함은 ‘발문’에서 최은숙 시인이 말했듯이 “시인이 자기 성찰을 놓지 않기 때문”인데 여기서 “성찰이란 배움과 짝을 이루는 말”이다. 언제나 대상보다 낮아지려는 이 배움의 자세가 시 전체에 투명함을 주고 무겁지 않은 깊이를 부여한다. 은근한 유머는 바로 이 무겁지 않은 깊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은택 시인의 이번 시집은 확실히 지난 시집인 『벚꽃은 왜 빨리 지는가』에 비해 진일보했다. 미학적으로? 아니 반미학적으로! 시의 아름다움이 대상을 지배하거나 또는 진실과 도덕을 은폐하는 쪽으로 진화하는 시대에 이은택 시인은 명백하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시들이 언어의 화려함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자연 선택이 아닌) 사회 선택 때문에 그럴 것이다. 너도나도 돋보이려는 외형적, 언어적 독특함에 이은택 시인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그는 자신의 경험과 생활에 맞는 옷을 걸쳐 입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 옷이 너무 익숙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자신의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대신 수수하고 담백한 차림새는 그 욕망이 생명의 본능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임을 말없이 비춰준다.
저자

이은택

1958년공주에서태어났다.39년동안여럿의중고등학교에서국어와문학을가르치다2020년부여여고에서퇴임했다.시집『벚꽃은왜빨리지는가』가있다.

목차

시인의말5

1부
제자리를지키고있는세상의모든것들에게

지그린다는것·12
찬찬한디·14
제사·16
행복총량의법칙·18
나를탓하다·21
오십대의마지막생일전날밤·24
바람의말·26
제자리암·28
가늘고길게·30
체면·32
혼술·34

2부
비웃어도되는세상을비웃지도않으며

거울·38
내젊은날의유적지·40
성장통·43
익환이·44
그는호모사피엔스의선생이다·46
그날칠갑산에오르다·48
설마·50
성자의이름을희롱하다·52
두서없는시·54
당신덕분에·56
일요일·58
한여름밤의꿈·60

3부
그대향한오랜그리움지워낼수있다면

나죽기전에·64
나도꽤괜찮은친구다·65
배포확대술·68
석모도에스며들다·70
악마보다더악마같은관용이·73
진짜사랑이란·76
부소산길2·78
부소산길3·80
부소산길4·82
부소산길5·83
부소산길6·84

4부
이렇게푼돈갚듯해서는안된다는듯이

빚·88
새해다짐·90
너무즐거워견딜수없다는듯·92
참회록·94
낙과·97
막걸리·98
어떤나쁜습관과어떤좋은습관·99
인셉션·102
시·104
죽기좋은날·108
테니스화에대한소회·110

발문

제자리를지키는일상의거룩함에대하여(최은숙)·112

출판사 서평

동네친구들과늦도록쏘다니다
슬며시대문열고들어서면
안방깊은곳에서들려오던
어머니의목소리

얘야,동생안들어왔다
잠그지말고지그려놓아라
_「지그린다는것」부분

그런데행복총량의법칙이라는게진짜있다면사회에도적용될터
우리가족의행복총량을끌어올리려면결국은
다른가족의행복총량을뺏어와야되는것아닌가
하는데까지생각이미치자
_「행복총량의법칙」부분

인용한「지그린다는것」는너무도당연한사람살이의상식또는기본적인도덕을말하지만그것이강요되거나규범화되어있지않다.동생이아직안들어왔으니문을“잠그지말고지그려놓”으라는어머니의말씀은뒤에들어오는동생에대한배려를가르치는동시에누군가우리집으로들어올존재가있는한문을잠그지말라는전언이기도하다.이것은지혜아닌지혜일터,시인은이작품의말미에서이것을아이들에게전달해주면서스스로에게묻는다.그말씀도그말씀이지만“내가들어오는줄을어떻게아셨을까”라고말이다.눈치못채게“슬며시”들어왔는데말이다.얼핏보면시적눙침같지만가만히음미해보면어머니가가졌던생(生)의기미에대한감각이자신에게는없음을말하고있는지도모른다.「행복총량의법칙」에서도우리가함께살아가면서마음의밑자락에꼭간직해야할것을일상적인자신의경험을통해말하고있다.이시의마지막연은이렇게끝난다.“엊그제는드디어내가우리클럽월례회에서우승했다/크게기뻤으나크게기뻐하지않았다”.이심심한마무리의속뜻은무엇일까.이은택시인은학생들을오래가르친교사지만최소한시에서는가르치려하지않는다.그래서시적자아를독자의앞에두려고도하지않고어느새뒷자리로돌아와앉는다.앞에서말했던‘시적눙침’은사실뒷자리에앉으려는시인의태도때문일것이다.

이렇게말없이뒷자리에앉으려는시인의태도는역사적이거나사회적인문제를대할때도변함없이드러난다.“오랜만에다시찾은518민주묘역”에서시인은아주사소한경험,즉화장실에들어온“날것”에게드는연민의감정을역사적사건에대한인식의유사성(analogy)으로퉁치지않는다.도리어낮고준열하게자신을역사의뒷자리에앉힌다.

그런데그날것은내마음을읽었는지
닫힌유리창만쫓아다니며
한사코머리를부딪고있다

평생갚아도못갚을큰빚을
이렇게푼돈갚듯해서는안된다는듯이
_「빚」부분

이런시인의태도가이시집에실린대부분의작품에어떤투명함을준다.이투명함은‘발문’에서최은숙시인이말했듯이“시인이자기성찰을놓지않기때문”인데여기서“성찰이란배움과짝을이루는말”이다.언제나대상보다낮아지려는이배움의자세가시전체에투명함을주고무겁지않은깊이를부여한다.은근한유머는바로이무겁지않은깊이에서연유한것이다.
이은택시인의이번시집은확실히지난시집인『벚꽃은왜빨리지는가』에비해진일보했다.미학적으로?아니반미학적으로!시의아름다움이대상을지배하거나또는진실과도덕을은폐하는쪽으로진화하는시대에이은택시인은명백하게다른길을걷고있는것이다.만약오늘날의시들이언어의화려함쪽으로진화하고있다면그것은일종의(자연선택이아닌)사회선택때문에그럴것이다.너도나도돋보이려는외형적,언어적독특함에이은택시인은관심이없어보인다.대신그는자신의경험과생활에맞는옷을걸쳐입었는데,누군가에게는그옷이너무익숙해보일수도있지만달리생각하면그것은자신의욕망때문일수도있다.대신수수하고담백한차림새는그욕망이생명의본능이아니라외부로부터이식된것임을말없이비춰준다.

추천사

“얘야,동생안들어왔다/잠그지말고지그려놓아라”.늦은밤에들어오는아들에게어머니는대문을잠그지말고‘지그려’놓으라고말씀하셨다.아마도이은택시인은이말을시를쓰는태도로가슴에새겼을것이다.한글모양을보고버스를타는익환이.생일날미역국을끓이는아내,종아리가이불밖으로나온듯추워보이는부소산길.이모두를바라보는시인의마음은지그려놓은대문을닮아있다.그래서시를읽을수록비어있는마음은채워지고,외로움은사라지고,굳어있던얼굴은슬그머니펴진다.더구나그는두서없는시를여기서줄이겠다며고백하는,성찰하는시인이다.(최교진,세종특별자치시교육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