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제는 모두가 잊어버린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정낙추 시인의 시집에는 이제는 다 떠나버린 농촌과 바닷가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존재의 쓸쓸한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물론 2부에서는 시인이 나고 자란 고향, 충청도 내포 지방인 태안과 서산 지역의 특색이 도드라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낙추 시인이 고향인 태안에서 읊조리는 노래는 어쩌면 만가(挽歌) 같기도 한데, 쇠락을 넘어 이제 마지막에 다다른 듯한 농촌에 대한 만가 또한 누군가는 남겨야 할 시적 기록이다. 물론 마지막에 다다랐다는 판단이 잘못된 것이어서 누군가 다시 신생의 노래를 불러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농촌에 대한 만가일지도 모르는 것은 이 시집의 표제작의 제목에서도 암시된다. ‘돌배나무꽃은 피었는데’에서부터 뭔가 큰 슬픔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작품의 말미는 다음과 같다.
이런 봄날
돌배나무집 얼굴 고운 형수
배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
다시 들었으면 좋겠는데
봄바람이 하얀 빨래 다 걷어가도
돌아오지 않네
돌아올 기미 없네
_「돌배나무꽃은 피었는데」 부분
“빚에 쪼들려/ 배처럼 누렇게 뜬 얼굴로 몰래 이사 간/ 돌배나무집 형”이 돌아와서 마당에 빨래를 하얗게 넌 줄 알았는데, 그것은 빨래가 아니라 돌배나무꽃이었다. 하얗게 핀 돌배나무꽃이 “빨아 넌 빨래”로 보인 것은 색깔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의 화자가 “돌배나무집 형”을 그리워하거나 기다려서이기도 하다. 작품에서는 왜 그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지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독자들은 그 이유를 충분히 느끼고도 남는다. 그것은 “벼 그루터기만/ 훈련소 병졸들처럼” 남아서 “허공을 향해 흔드는”(「빈들에서」) 곳이 되어버린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다르게 보면 시의 화자 자신마저 고향을 상실해버렸다는 마음 깊은 곳의 상념 때문이다.
지금 농촌은 “산비탈 억새밭 가운데/ 납작한 무덤”(「무덤」)만 남은 곳이 되어버렸다. 무덤마저 납작해진 것은 이제 죽음마저 잊혔다는 시인의 인식 때문일 것이다. 납작해져버린 상황에서도 그 무덤은 “소나무로 자라고/ 억새로 흔들리다가/ 등 굽은 할미꽃으로 핀다”. 왜? “어느 곳에 사는지 모를/고달픈 자손들 소식”이 걱정되고 궁금하기 때문이다.(이상 「무덤」) 납작해진 무덤이 자손들이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는 것은, 무덤 자체가 망각된 것을 가리키는 동시에 농촌을 떠난 자손들의 사는 곳이 실존적으로 불분명한 데라는 것을 암시한다. 도대체 땅을 떠난 인간이란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래도 삶의 바탕은 실재한다
땅을 떠난 납작한 무덤들의 자손들, 즉 현대인들은 “도시에서 머슴살이하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흰 쌀밥을 먹고 있다”. 그게 “제 어미 아비 살”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 진술에는 참으로 많은 뜻이 모아져 있다. 당연히 근대의 당당한 주체이자 권리의 현현인 도시인들은 그 자신이 머슴이라는 것을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도시인들을 근원적으로 생존케 하는 것은 “흰 쌀밥”이다. 그런데 그 “흰 쌀밥”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모른 척한다. 왜냐면 그것을 몰라도 “흰 쌀밥”은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이상 (「쌀 죽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인이 적적하고 외로운 상황을 시로 짓고 또 그에 맞는 언어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4부에 실린 시편들이 대체로 그러한 작품들인데, 「이팝나무를 심다」에서 “우두커니 혼자 서서/ 이팝나무 쌀밥나무/ 맥없이 중얼거려” 보는 거나, 「목련꽃 독백」에서 “할머니,/ 설마 먼 곳으로 가신 건 아니겠지요?”하며 무담시 할머니를 불러보는 것도 시인의 정서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현실에서 나오는 자기 위안일 것이다. 물론 「이팝나무를 심다」는 “해마다 고루고루 곡식을 심었던 그 땅에” 묘목을 심는 정황이며, 분명 아버지는 “하루 종일 못마땅하신” 게 분명하지만 바람은 “네 탓이 아니라고 위로”한다.
마지막에 다다른 농촌에 대한 이런 비극적 인식은 도리어 농촌 생활에 대한 정낙추 시인의 긍정적인 마음 자세 때문에 더 도드라지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보기에 도시에서 머슴살이하는 것과는 달리 농촌에서의 삶은 보다 더 자유롭고 주체적이기까지 하다.
아무렇게나 자랐어도
장미보다 더 예쁘다
푸른 잎
안으로 서로 겹겹이 껴안으면
따뜻한 마음들이
연노란색으로 피어나서
된서리 내린 날도
춥지 않다
_「배추」 전문
이것은 섣부른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연(self-so)이 주는 긍지인 동시에 너도나도 버려버린 유일한 삶의 실재인 것이다. 바탕을 잃어버린 삶이야말로 머슴살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농촌에 대한 만가일지도 모르는 것은 이 시집의 표제작의 제목에서도 암시된다. ‘돌배나무꽃은 피었는데’에서부터 뭔가 큰 슬픔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작품의 말미는 다음과 같다.
이런 봄날
돌배나무집 얼굴 고운 형수
배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
다시 들었으면 좋겠는데
봄바람이 하얀 빨래 다 걷어가도
돌아오지 않네
돌아올 기미 없네
_「돌배나무꽃은 피었는데」 부분
“빚에 쪼들려/ 배처럼 누렇게 뜬 얼굴로 몰래 이사 간/ 돌배나무집 형”이 돌아와서 마당에 빨래를 하얗게 넌 줄 알았는데, 그것은 빨래가 아니라 돌배나무꽃이었다. 하얗게 핀 돌배나무꽃이 “빨아 넌 빨래”로 보인 것은 색깔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의 화자가 “돌배나무집 형”을 그리워하거나 기다려서이기도 하다. 작품에서는 왜 그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지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독자들은 그 이유를 충분히 느끼고도 남는다. 그것은 “벼 그루터기만/ 훈련소 병졸들처럼” 남아서 “허공을 향해 흔드는”(「빈들에서」) 곳이 되어버린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다르게 보면 시의 화자 자신마저 고향을 상실해버렸다는 마음 깊은 곳의 상념 때문이다.
지금 농촌은 “산비탈 억새밭 가운데/ 납작한 무덤”(「무덤」)만 남은 곳이 되어버렸다. 무덤마저 납작해진 것은 이제 죽음마저 잊혔다는 시인의 인식 때문일 것이다. 납작해져버린 상황에서도 그 무덤은 “소나무로 자라고/ 억새로 흔들리다가/ 등 굽은 할미꽃으로 핀다”. 왜? “어느 곳에 사는지 모를/고달픈 자손들 소식”이 걱정되고 궁금하기 때문이다.(이상 「무덤」) 납작해진 무덤이 자손들이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는 것은, 무덤 자체가 망각된 것을 가리키는 동시에 농촌을 떠난 자손들의 사는 곳이 실존적으로 불분명한 데라는 것을 암시한다. 도대체 땅을 떠난 인간이란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래도 삶의 바탕은 실재한다
땅을 떠난 납작한 무덤들의 자손들, 즉 현대인들은 “도시에서 머슴살이하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흰 쌀밥을 먹고 있다”. 그게 “제 어미 아비 살”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 진술에는 참으로 많은 뜻이 모아져 있다. 당연히 근대의 당당한 주체이자 권리의 현현인 도시인들은 그 자신이 머슴이라는 것을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도시인들을 근원적으로 생존케 하는 것은 “흰 쌀밥”이다. 그런데 그 “흰 쌀밥”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모른 척한다. 왜냐면 그것을 몰라도 “흰 쌀밥”은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이상 (「쌀 죽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시인이 적적하고 외로운 상황을 시로 짓고 또 그에 맞는 언어를 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4부에 실린 시편들이 대체로 그러한 작품들인데, 「이팝나무를 심다」에서 “우두커니 혼자 서서/ 이팝나무 쌀밥나무/ 맥없이 중얼거려” 보는 거나, 「목련꽃 독백」에서 “할머니,/ 설마 먼 곳으로 가신 건 아니겠지요?”하며 무담시 할머니를 불러보는 것도 시인의 정서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현실에서 나오는 자기 위안일 것이다. 물론 「이팝나무를 심다」는 “해마다 고루고루 곡식을 심었던 그 땅에” 묘목을 심는 정황이며, 분명 아버지는 “하루 종일 못마땅하신” 게 분명하지만 바람은 “네 탓이 아니라고 위로”한다.
마지막에 다다른 농촌에 대한 이런 비극적 인식은 도리어 농촌 생활에 대한 정낙추 시인의 긍정적인 마음 자세 때문에 더 도드라지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보기에 도시에서 머슴살이하는 것과는 달리 농촌에서의 삶은 보다 더 자유롭고 주체적이기까지 하다.
아무렇게나 자랐어도
장미보다 더 예쁘다
푸른 잎
안으로 서로 겹겹이 껴안으면
따뜻한 마음들이
연노란색으로 피어나서
된서리 내린 날도
춥지 않다
_「배추」 전문
이것은 섣부른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연(self-so)이 주는 긍지인 동시에 너도나도 버려버린 유일한 삶의 실재인 것이다. 바탕을 잃어버린 삶이야말로 머슴살이 아니겠는가!
돌배나무꽃은 피었는데 (정낙추 시집)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