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선 것들은 푸르다

스스로 선 것들은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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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땅과 흙에서 싹 틔운 시
이규동 시인의 시는 밭에서 막 싹을 틔우는 새싹 같은 느낌을 준다. 시의 내용도 그렇지만 시의 형식도, 시인이 주되게 사용하는 언어도, 상상력도 그렇다. 하지만 이 작고 여려 보이는 언어들은 우리가 잊고 사는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천둥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이 천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흔치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자본주의 근대가 만든 대도시에서는 그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잘 보이고 잘 들리는 것도 믿기 힘든 세상인데 심지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라면 말해 무엇할 것인가. 하지만 진리는 여전히 진리인 것이다. 은폐되어 있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산 풀

나중 산 풀 거름 되고

나중 산 풀

먼저 산 풀

거름 되는
_「흙에서」 일부

문제는 이 순환이라는 존재의 진리가 오늘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계 없는 성장에 대한 거짓 신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순환의 진리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타기해야 할 것으로까지 인식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여기서 우리가 사는 현실의 비극이 자라는지 모른다. 전쟁과 폭력, 탐욕과 수탈, 원망과 분노, 불신과 조롱 등등으로 점철된 비극이 말이다. 하지만 이규동 시인은 시종일관 ‘흙’과 ‘땅’에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으며 ‘흙’과 ‘땅’에서 꾸려지는 삶에 한없이 겸허하다. 그래서 거짓 없이 소박하고, 꾸밈없이 담백하다.
그리고 순환은 자연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순환의 진리를 받들어 사는 사람들의 관계에도 순환의 진리가 스미기 마련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아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독자들의 마음을 잠깐 멈춰 세운다.


바꿔 먹고
나눠 먹고
같이 먹는

달걀 열 개
_「달걀 열 개」 부분

자본주의의 화폐가 아니라 “달걀 열 개”가 공동체의 물질과 마음을 함께 실어나르는 상황을 짧게 묘사한 이 시는 이규동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가 어느 쪽에 있는지 보여주는 시금석이라 할 만하다.
저자

이규동

1973년충북제천에서났으며현재‘해방글터’동인이다.남원지리산자락에서농사를지으며초등학교어린이들과생활하고있다.2019년『사람의문학』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해방글터동인지『우리의시가무기가될수있을까』(푸른사상,2020),『살아보고싶은날의하늘은무슨색일까』(삶창,2024)등에참여했다.

목차

시인의말ㆍ5

1부

흙밥/12
품다/13
상추잠/14
크고넓은그림자/15
손/16
정남아주머니/18
사람의소리/20
흙꽃/21
흙의시간/22
고수/23
분달이네/24
꾹꾹/25
어머니의텃밭/26
능소화/27


2부

밥상/30
평두둑/31
스스로선것들은푸르다/32
나물값은되게/34
부러진쇠갈퀴자루를다듬었다/35
약속/36
움트다/37
입춘(立春)/38
자루를만들며/40
뿌리를뻗다/42
늦바람/43
오지다/44
똥고집/45
기도/46
장마/47


3부

길고양이로부터/50
백봉이/52
달걀열개/53
풀/54
저항/55
흙에서/56
풀의외침/58
착각/59
한삽의무게/60
푸른가을/61
들깨밭을비우고/62
손이무섭다/63
귀신/64
논/66


4부

마음이오가는길/70
겨울꽃/71
편지/72
도시씀바귀/74
단양쑥부쟁이/75
초록봉숭아이야기/78
봄이오는길/80
세월에게/82
아내의손/84
아내발시리지않게/85
어머니/86
냉잇국/87
버들피리/88



해설
잘빚어진흙의언어(문종필)/91

출판사 서평

낮은곳으로의뿌리내림

순환하는존재의진리는어떻게든우리가사는세계를만들어내는숨은동력이다.그것을자본주의근대가은폐하고억누르고있지만말이다.그럼에도진리는그틈새를통해어떻게든드러나는법이다.그리고그것을알아채서받아적는존재가시인인것이다.다음의구절들을보면이규동시인이꿈꾸는세계가무엇인지헤아려진다.

니땅내땅경계없이
넉넉한밥상을나누던
잠자리,물방개,미꾸라지,장구애비
_「논」부분

삶은
허공에피우는게아니라
낮은곳으로의뿌리내림
_「초록봉숭아이야기」부분

「논」이말하는것은경계없는세계다.오늘날‘경계’는단순한구분선혹은한계선을가리키지않는다.그것은어느새타자에대한배제,조작,버림등의프로세스로경화(硬化)되었다.이규동시인이“논”을통해서품게된세계는이런경계없는세계다.시인에게“논”은단지농사를짓는공간만이아니라여러생명들이어우러져삶을꾸리는경계없는세계인것이다.그래서이작품의마지막은이렇게끝난다.“그모든생(生)의/논”.그런데이런관점혹은삶의태도(관점자체가삶의태도에서나오는것이지만)는어떻게가능한것일까?
「초록봉숭아이야기」는“비탈길콘크리트틈에싹튼/작은봉숭아”에대한관찰기성격의작품이다.그봉숭아가서리가내린후이파리를다떨구고줄기로만남은것을보고시인은“삶은/허공에피우는게아니라/낮은곳으로의뿌리내림”이라는것이라고낮게읊조린다.사실이런의인화는시에서흔한비유방식이다.낯익은의인화를넘어서는것은거기에담긴시인의태도혹은세계관인데,“낮은곳으로의뿌리내림”이진정성있는울림을주는것은시인이꿈꾸는경계없는세계와이어지기때문이다.
이시집전체에서울려퍼지는배경음이사실“낮은곳으로의뿌리내림”이라고할수있으며이것을시인은‘땅’과‘흙’에서배우고이웃과의관계에서실천한다고할수있다.낮은곳을지향하는마음이소박하고,담백하고,꾸밈이없는것은너무도자연스러운드러남이다.마음이그러하니언어도말할수없이투명하다.미세먼지처럼희뿌연의미를갖는도시의시들과이규동시인의시는여기서갈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