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
열린물길이만든다양성의터전,내포에대하여
19세기아산만삽교천구만포구를중심으로
대양으로통하는삽교천의수로는나라가번영할때에는새로운문물의유입창구가되었고,위기의시기에는외세의침입로가되었다.
내포는예로부터열린공간이었다.육지와바다,내륙과해안이만나는이땅은지리적특성상외부와의활발한접촉이이루어질수밖에없는자리였다.백제시기부터불교가이곳을통해전래되었고,훗날에는조선후기서학(西學)이라불린천주교도이물길을따라유입되었다.이러한흐름은내포지역이단지변방이아니라,문명교류의관문으로서기능했음을입증한다.
특히삽교천과구만포구일대는내포의개방성과진취성을상징하는수로였다.구만포는서해를향해열린바닷길의거점이자,육지로깊숙이들어온내륙수로의종착점이었다.이수로를따라물산과사상이이동했고,사람들의왕래와정보의소통이끊이지않았다.공세리성당과합덕성당에남아있는서양식건축양식은단지종교의전파에그치지않고,서구문명과미학이이지역에서자리를잡았음을보여주는상징이라할수있다.이성당들은벽돌하나하나,첨탑의선하나하나에시대를앞선내포인의개방성과예술적감수성이깃들어있다.
이러한문화적수용의배경에는내포가지닌관용과다양성이자리하고있었다.조선이중앙의유교적질서속에서폐쇄적으로흐를때,내포는유·불·서학이나란히존재하며사상과신앙,삶의방식이서로영향을주고받던공간이었다.지배층의문화와서민의생활문화가뒤섞이고,외래문물이정착하여스스로의것으로녹아들수있었던것은내포만의포용력과다층적사회구조덕분이었다.
그러나이개방성은이면도지니고있었다.수로가열려있다는것은곧외세의침입에취약하다는의미이기도하다.조선후기내포지역은왜구의침략이잦았던곳이며,바닷길을통해들어온외세는때로는문명을,때로는혼란을함께싣고왔다.그럼에도불구하고내포는닫히지않았다.물길이열려있었기에위기도있었지만,바로그통로를통해새로운가능성도함께들어올수있었다.
내포지역은지리적으로생활자원이풍부하고농업생산력이우수한고장임에도불구하고,역사적으로외부의침입과자연재해에자주시달려야했다.고려말과조선초기부터이지역은왜구의침탈이빈번하였고,때때로해일과지진같은자연재해도겹쳐지역주민들의삶은결코평온하지않았다.특히임진왜란시기에는군량미생산과조달의전략적요충지로기능하면서,전란의소용돌이속에서한층더큰희생을감내해야했다.
이와같은반복되는재앙과불안정한사회적환경은주민들로하여금현실을벗어난이상향을열망하게만들었다.내포지역과그주변에서는정감록을비롯한예언서신앙이유행하였고,19세기들어동학과서학(천주교)도이러한흐름에편승하여전파되었다.
특히천주교는인간평등과내세구원을강조하며,신분질서와성차별에억눌려있던민중의마음을강하게움직였다.외적의침략과자연재해로누적된심리적불안감은공동체적결속과초월적구원을제공하는신앙체계를더욱절실하게만들었으며,내포지역주민들에게천주교는단순한종교를넘어삶의돌파구로다가갔다.
결국내포는천주교가뿌리내릴수있었던토양이되었으며,이는단지교리의전파만이아니라,지역주민들의삶의조건과정서적필요,시대적환경이복합적으로맞물려형성된결과였다.
삽교천물길따라흐른신앙과개방의역사-내포공소문화의형성과전개
조선후기,대규모간척이시작되기전의삽교천하류는오늘날의하천개념으로보기는어렵다.‘범근내포(犯斤乃浦)’또는‘유궁진(由宮浦)’으로불렸던이지역은마치작은만(灣)처럼깊숙이내륙으로파고든수역이었다.삽교천은하구부터약25km상류의구만포까지수로가연결되었고,무한천은20km상류의하평포까지,곡교천은성리까지선박이드나들수있었다.백중사리에는큰해선들이이들포구외에도더상류의포구까지드나들었다.만조시조수가깊숙이밀려들어수심이깊어지고,간조시에는광활한간석지가드러나염생식물군락이무성하게자라나곤했다.이러한지리적조건은내포를‘바다에열린내륙’으로만들었고,외부문물의수용과종교확산의통로역할을하게했다.
19세기후반,서해특히삽교천의물길을통해서구의문물과사상이집중적으로유입되던시기,삽교천은단순한세곡선이나어선이드나드는수로가아니라문명의통로였다.구만포구,배나드리는그러한흐름의핵심거점이었으며,종교·학문·예술·기술등다양한서구문화가이물길을타고내포깊숙이스며들었다.특히종교분야에서는천주교를비롯하여개신교여러종파,중국의민간신앙,일본불교및시토종파등이유입되었고,천주교는삽교천을따라집중적으로전파되며내포전역에뿌리를내렸다.
이가운데천주교는내포에서가장깊은뿌리를내렸다.실제로1865년프랑스선교사들의보고서에는“전국신자의절반이상이충청도에살고있으며,그중절반은내포지역출신”이라고적혀있다.이시기내포는단지새로운문화와신앙의수용지가아니라‘신앙의요람지’라불릴만큼종교적밀도가높았다.당시내포의천주교공소(公所)는단순한기도공간이나예배처소에그치지않았다.공소는박해를피해흩어진교우들이함께신앙을지키며살아가던생명의거점이자공동체의중심이었다.
1883년부터19세기말까지,내포지역에는무려100개가넘는교우촌과공소가집중적으로형성되었다.삽교천의수로와그지류를따라분포된이들성지는서해안종교사의결정적흔적이자,조선후기를살아낸민중들의믿음의흔적이었다.오늘날에도가장많은천주교성지가이지역에위치해있는것은단지우연이아니다.그것은내포라는공간이지닌개방성과종교적열정,그리고외부에열린자연조건이겹쳐진결과다.
삽교천의여러포구가운데서도구만포는역사적의미가각별한장소다.1868년,프랑스선교사오페르트는덕산지역의천주교신자들의협조를받아삽교천수로를따라내륙으로진입하여이포구에상륙한뒤,덕산가야동에위치한남연군묘소에도달하게된다.이처럼구만포는조선후기에서개항기까지선박이정박할수있었던실질적항만이었으며,사람과물자,정보는물론선교사와신앙서적,교리교육등새로운문물의유입창구역할을했다.아산만에서삽교천을거슬러올라가는수로는단순한교통경로가아니라,새로운문화와신앙이퍼져나가는상징적경로였다.이길을따라교우촌이형성되고공소가세워졌으며,박해속에서도신앙의불씨는꺼지지않았다.
이와같이삽교천을중심으로한내포는그자체로하나의살아있는신앙지도라할수있다.물길은곧생명의길이었고,그위에놓인공소들은시대의파고를버티며신앙의끈을놓지않은민중들의작은성채였다.지리적특성과교통의편리성,그리고시대적위기속에서도문을닫지않았던내포인의개방성과다양성,자립성과관용은,이지역이왜신앙의중심지로우뚝설수있었는지를말없이증명해준다.
내포문화는하나의가치로수렴되기를거부하는문화다.성리학적질서가주류를이루던조선에서도내포는다양성의사유가살아있었고,새로운사상을실험하며자신만의균형을이루어갔다.다름을존중하고외부의것을포용하는이지역의문화는,오늘날다양성과포용이라는시대정신을선도했던선례로평가할수있다.
역사는반복된다.내포의과거는우리에게분명한사실을일깨운다.개방과관용,다름의공존이야말로지속가능한발전의토대였다는점이다.오늘의내포는더이상해상교통의중심지로기능하지않지만,그안에축적된개방의기억과문화적다양성의전통은여전히살아있다.
불교와천주교,성리학과동학,민간신앙,그리고고유의토착문화가공존했던내포는,지금이시대를향해다시묻는다.진정한선진성은무엇에서비롯되는가?우리는이질성과차이를어떻게포용할것인가?
과거내포의경험은말한다.다름을배제하는것이아니라,다름속에서공존의질서를세워나갈때비로소공동체는지속가능해진다.
한때외부세계와활발히소통하던삽교천의물길은이제막혔지만,그자리를대신하듯내포의중심에는두개의철도노선과두개의고속도로가관통하고있다.물길은멈췄으나,길은사라지지않았다.새로운교통망은내포를다시금중부권의심장부로이끌고있으며,충청남도청의이전은이흐름에결정적인전환점을마련하였다.
오늘날의내포는더이상과거의기억에갇힌공간이아니다.오랜침묵의시간을지나,다시사람과활력이모이는땅으로변모하고있다.폐쇄에서개방으로,정체에서재도약으로이어지는이변화의흐름속에서우리는과거의영광만이아니라,내일의가능성을함께본다.
다시길이열리고,다시젊은세대가모여드는내포.그재부상은단순한도시의확장이나행정의이동이아니라,이땅에스며든삶의방식과문화의가치가새롭게피어나는증거다.
이번에흐르는것은물이아니라,사람과뜻의흐름이다.내포는이제,또한번의부활을준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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