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의 조선여행
Description
오백 년 조선 사람들의 여행기를 생생하게 복원하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일반 대중과 역사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펴낸 「규장각 교양총서」 제7권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과《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에 뒤를 이어 여행을 주제로 조선의 역사를 살펴본 세 번째 책이다. 이번 책에서는 별자리 여행에서부터 온천여행과 득음을 위한 여정까지 오백 년 조선 사람들의 여행기를 담고 있다. 본문은 크게 열세 가지 주제를 나누어 다양한 범주의 여행을 이야기한다. 발로 직접 뛰거나 걷지는 않았지만 그림과 글로 간접 여행하는 ‘와유’, 죄를 얻어 가족과 직업에서 벗어나 먼 곳에 처해졌던 ‘유배’, 지방 행정을 정찰하러 가는 ‘암행어사 길’, 고단한 장돌뱅이 장사꾼의 ‘장사여행 길’ 등 다양한 목적으로 우리 땅을 돌아다닌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우리 강산을 누비며 길 위에서 진정한 삶을 펼쳤던 조선인들의 여행기를 통해 과거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여행이 펼쳐진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조선인이 주체가 되어 우리 땅을 돌아본 기록을 담은 책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고장을 돌아보는 일상적 여행뿐만 아니라, 누워서 노니는 여행인 ‘와유’를 비롯하여 관직 생활이 펼쳐졌던 길을 따라가는 ‘암행어사 길’, ‘유배길’ 그리고 19세기 말 이후의 ‘백두산 여행’, 일제강점기의 ‘수학여행’ 등을 그리고 있다. 또한 소설가 박태원의《소설가 구보씨의 경성 나들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도시화의 모습과 도시생활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저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 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리고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규장각 자료총서> <한국문화연구총서>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한국학 모노그래프> <한국학 연구총서> <한국학 자료총서> 등 900여 책을 펴냈다.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 _ 즐거움의 지혜를 얻는, 조선으로의 시간여행

1장 누워서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
­ 옛사람들이 남긴 와유의 기록들 | 이종묵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2장 정치적 시험의 장이 된 왕세자의 온천여행
­ 조선 왕가의 치병기 |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3장 별자리를 좇아서 거닌 옛사람들의 시, 노래, 과학
­ 조선 사람의 밤하늘 여행 | 전용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4장 깊은 규방에서 나와 신천지를 마주하다
­ 조선 여성들의 산수유람 | 이숙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

5장 “목에서 피가 나고 배가 붓던” 여행길
­ 명인 명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송지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6장 붓 한 자루 쥐고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다
­ 금강산 여행, 화폭에 담기다 | 박은순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7장 서른네 살, 12년의 고행 끝에 본 가문의 영광
­ 영남 양반 노상추가 떠난 과거길 | 정호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8장 착잡한 고통과 짜릿한 쾌락이 엇갈린 길
­ 1822년 평안남도 암행어사 박내겸의 암행길 |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9장 감시 속에서 즐긴 유배인의 여행길
­ 이문건의 유배길과 해인사 유람 | 김경숙 조선대 사학과 교수

10장 돌고 돌았던 순회상인의 길 위에 펼쳐진 삶
­ 장돌림과 장삿길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조영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1장 머리에 천지를 이고 몸에 천하를 두르다
­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를 따라가다 | 윤대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2장 흥분과 기대가 의분과 비통함이 된 까닭
­ 일제강점기에 떠난 수학여행 | 윤소영 독립기념과 연구원

13장 소설가 구보씨의 행복 찾기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타난 1930년대 서울 | 서재길 국민대 국문과 교수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지은이

출판사 서평

길과 산과 바다와 하늘에 펼쳐진 조선의 삶
만난고초와 쾌락과 처절함이 함께했던 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들이
별자리 여행에서부터 온천여행과 득음을 위한 여정까지
식민지 시기의 ‘소풍’부터 식민지 지식인의 ‘경성 산책’까지
오백 년 조선, 한말 사람들의 여행기를 세부적으로 복원했다

규장각 교양총서 제7권 기획의도

이 책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펴내는 총서의 일곱 번째 권이다. 지난 3년여 간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창문처럼 몇 가지 개념이나 범주를 통해 조선의 역사를 드러내려 했던 기획이 벌써 일곱 번째 매듭을 짓게 되었다. 그중 두 번째 시리즈는 ‘여행’이라는 창을 통해 조선시대를 들여다보려 했는데,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과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에 이어 이번 책에선 조선인들이 주체가 되어 우리 땅을 돌아본 기록들을 들여다본다.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은 조선인들이 자신의 강토를 다니면서 경험한 이야기다. 비록 ‘여행’을 앞세웠지만, 여기서 다뤄지는 이야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고장을 돌아보는 일상적 여행 범주에 들지 않는 이야기도 여럿 있다. 방 안에 앉아서 그림과 글로 다른 곳을 여행하는 와유臥遊와 나라로부터 죄를 얻어 가족과 직업으로부터 벗어나 먼 곳에 처해졌던 유배, 그리고 지방 행정을 정찰하러 가는 암행어사의 길도 여행길로 보았다. 지금껏 익숙한 때나 장소와는 다른 시공간을 경험하는 것으로 여행을 넓게 정의하고, 이를 통해 과거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여행이 벌어진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며, 나아가서는 오늘날 우리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지혜를 얻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익숙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시공간으로 진입해 경험하는 일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하나하나씩 알게 되는 새로운 여행 경험을 할 것이다. 나아가 책을 덮는 순간 조선 사람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조그마한 지혜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의 구성과 내용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열세 가지다. 첫 이야기들은 시대적인 색채가 그리 강하게 배어 있지 않는 주제들이다. 발로 직접 뛰거나 걷진 않았지만 그림과 글로써 간접 여행하는 와유를 다룬 ‘누워서 노니는 여행’, 온천여행이라지만 치료를 위한 고통과 더불어 사실은 아버지의 정치적 시험 무대였던 ‘사도세자의 온천여행’, 옛사람들의 별자리와 별에 대한 기원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를 파헤쳐본 ‘조선 사람의 별자리 여행’, 조선에서 사회적 관습과 법을 넘어서면서까지 떠났던 ‘조선 여성들의 산수유람’, 예인들의 수련과 득음의 과정을 조명한 ‘조선 사람의 음악여행’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의 중반을 향해 달려가면 양반 남성들, 특히 관직생활이 펼쳐졌던 길을 따라가는 여행기가 펼쳐진다. ‘암행어사 길’은 어사 출도처럼 낭만적 측면만 부각되어온 길이 실은 고난의 길이자 출세의 길이기도 했다는 뜻밖의 사실을 드러내며, 과거 합격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무관武官 노상추의 과거길은 길 위의 고단한 삶으로 그려진다. 반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성주로 유배를 간 이문건을 통해서는 유배길이 우리가 그렸던 죽음을 겨우 비껴간 험난한 인생길만이 아닌, 지방 관리들의 배려 속에서 즐거운 유람을 떠났던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야기의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이 책은 19세기 말 이후로 시대를 옮겨간다. ‘장돌림과 장삿길’에서는 오늘날의 폭력조직과도 닮았던 보부상단의 뒷이야기와 더불어 고단한 장돌뱅이 장사꾼의 장사여행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울분을 단군의 실재를 증명하는 백두산 여행으로 극복하려 했던 최남선의 이야기도 근대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들여다보게 한다. 일제강점기의 수학여행은 그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수학여행’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이런 여행이 일제의 교육정책의 하나로 등장한 여행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소설가 박태원이 경험하고 기록한 도시화의 모습과 도시생활의 단면을 ‘소설가 구보씨의 경성 나들이’에서 볼 수 있다.

각 장별 주요 내용
1장 ‘와유’는 상상의 여행길이다. 와유라는 말은 송宋나라의 종병宗炳이라는 사람이 늙고 병들면 명산을 두루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노년에 누워서 보기 위하여 유람했던 곳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었다는 『송사宋史』 「종병전宗炳傳」의 일화에 연원을 두고 있다. 도연명陶淵明의 은거를 꿈꾸는 사람은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걸어놓았고, 왕유王維와 같은 별서別墅를 꾸미고 살고자 하면 「망천도輞川圖」를 걸어놓았으며, 왕희지王羲之처럼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시를 짓고 싶으면 난정蘭亭을 그린 그림을 구해 완상하였다. 이익은 그림이 상상력을 촉발하는 매개물이라 하였다.
물론 와유의 매개물로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선비들은 와유의 개념을 더욱 확장하여 그림 외에도 산수를 유람한 기행문을 읽으면서 와유를 했고 놀이판에 전국의 명승지를 그려놓고 와유를 했으며, 돌로 만든 인공 산, 곧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어두고 와유를 했다. 이것도 어려우면 집 이름을 통해 먼 바다와 강을 끌어들이는 와유의 방식도 택하였다.
집에 인공의 산 가산假山을 만들어놓는 것은 와유의 대표적 형태다. 조선 초기 석가산으로는 채수蔡壽의 집에 있던 것이 가장 교묘했던 듯하다. 채수의 석가산은 높이가 5척이고 둘레가 7척이며 폭포는 2척 남짓이고 나무는 4~5촌이었다.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석가산에 손바닥만 한 조그만 나무를 심었다. 특히 대통을 이용해 물길을 땅속으로 끌어와서 갑자기 연못 한가운데 있는 석가산 꼭대기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게 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석가산을 만든 이유를 대면서 채수는 사람이 늙으면 직접 산을 오를 근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깊은 산중에서 짐승들로부터 다칠 위험이 없다는 점도 내세웠다. 더욱 중요한 점은, 석가산은 그림과 달리 작지만 산을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림이 줄 수 없는 생동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비록 가산이 작지만 상상력으로써 큰 산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채수는 가산 앞에서 시를 짓고 즐기노라면 자신의 마음이 그곳과 어우러져 태산이 크고 가산이 작다는 것도, 못이 작고 바다가 크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옛사람의 위트와 익살과 자족의 정신이 어우러진 와유는 우리를 상상의 달콤한 세계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2장 ‘온천행’는 사도세자의 정치적 시험대였다. 사도세자의 온행은 단순히 다리에 난 창질을 치료하는 목적에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왕세자 행차시에 얼마나 많은 백성이 몰려들어 구경했는지 궁금해하면서, 사도세자에 대한 민심의 향배를 알고 싶어했다. (…)한 차례 소동 끝에 한강을 건넌 왕세자 일행은 과천으로 향했다. 사도세자는 “농사철에 부득이 수레를 움직이게 되었으니 벼를 상하게 할까 염려된다. 선상군先廂軍과 후상군後廂軍은 대열을 짓지 말고 길 하나로 행군하도록 하라. 그리고 관광 나온 백성들도 길 좌우에 가지런히 서서 밭둑 사이를 짓밟지 않도록 알리는 게 좋겠다”고 명령하였다. 이에 많은 백성이 사도세자의 성덕을 감축하며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렀다. (…) 영조는 사도세자 온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받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온천에 목욕하러 가서 돌아오기까지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도신道臣(관찰사)으로 하여금 장계로 알리도록 하명한 것이다. 영조는 특히 민간을 침학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온행시 사도세자를 맞이하러 온 관광 백성의 숫자가 많았는지 자주 물었다. 당시 사도세자의 행차는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와 바람을 확인하는 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조의 질문에 사도세자의 선행을 알리는 관료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군병들이 조심하지 않아 말이 전토를 함부로 밟아서 농부와 아이들이 농사를 망쳐 막막해하자 사도세자가 콩 한 섬을 지급하라고 했다는 보고, 한 늙은이가 떡을 팔려다가 진중의 병마에게 차여 떡을 모두 망치게 되자 사도세자가 팥 한 섬을 주었다는 내용, 한 노파가 병들어 누워 여러 날 밥을 먹지 못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사도세자가 쌀 몇 말과 돈 몇 꿰미를 주자 사도세자의 밝은 덕을 군병과 백성들이 다투어 칭송하였다는 보고, 산과 들에 가득한 아낙네와 아이들이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가까이 다가와 사랑하고 떠받드는 것이 마치 아기가 엄마를 보는 것보다 더했으며, 심지어 무엄한 줄 모르고 손으로 옷자락을 잡는 이도 있었다는 보고, 모두 영조가 듣고 싶어했던 내용들이었다.

3장 ‘밤하늘 여행’은 시와 과학의 하모니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밤하늘 별자리는 필수교양이었다. 술 한 잔 걸치고 시 한수 지을 때 쏟아지는 별들은 상상력을 이끌어가는 길이 되었다. 동아시아 별자리에 대한 관념은 서양의 것과 몇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우선 현대 서양의 별자리가 88개인 것과 달리 동아시아의 별자리는 300여 개나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별자리는 서양에 비해 그 수가 월등히 많다. 밤하늘에서 인간이
맨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은 대략 2000개 내외인데, 별자리의 수가 많다면 한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들의 개수가 적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의 별자리는 한 개의 별로 이루어진 것이 여러 개 있다. 또한 두 개 혹은 세 개로 이루어진 별자리도 많다. 드물게 수십 개의 별로 구성된 별자리도 있다. 북방칠수 가운데 실室근처에 있는 우림군羽林軍이라는 별자리는 45개의 별로 구성되었고, 남방칠수 가운데 진軫 근처에 있는 기부器府라는 별자리는 32개의 별로 구성되었다.
동아시아의 별자리 관념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밝은 별이라고 해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히파르코스가 여섯 단계의 등급으로 항성의 밝기를 구분했는데, 이후 계속해서 별의 밝기 등급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하나의 별자리를 구성하는 여러 별 중에서 밝은 별들은 따로 의미 있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