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 양장본 Hardcover)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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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A급 전범 등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들을 독자적으로 인터뷰, 취재하고 태평양전쟁 관계자들의 증언을 기록해 일본 근대사의 실증적 연구를 이어오고 있는 호사카 마사야스는 일본제국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왜 일본이 철저히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쇼와 육군의 병리적 체질이란 관점에서 그 조직과 그들의 역사에 새겨넣은 만행들을 철저히 검증해나간다.

쇼와 육군의 퇴폐적 부분을 고발하는 병사들이 많은 것은 “이 전쟁이 너무도 더러웠”기 때문이다. 고참병 중에는 ‘살인의 프로’, ‘도둑질의 프로’, ‘방화의 프로’를 자칭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모든 결론은 그때그때의 선택지 중에서 최악의 선택을 한 결과물이었다. 이 책은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 같은 쇼와 육군의 핵심 조직을 해부할 뿐만 아니라, 부사관과 일반 사병들의 눈빛, 손짓, 목소리 하나하나까지 담아내고 있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A급 전범 등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 4000여 명을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15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다치바나 다카시, 사노 신이치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꼽힌다. 일본 근대사, 특히 쇼와사昭和史의 실증적 연구에 뜻을 두고, 각종 사건에 관계된 이들을 취재하면서 역사 속에 묻힌 사건과 인물에 관한 르포르타주를 썼다. 1939년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태어나 도시샤대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33세 때 논픽션 작가로 홀로서기를 시도해 그의 출세작이 된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가 나오기까지 6년간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자성自省사관’이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저작은 일본 사회의 치부를 정면으로 파고들어간다.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우익 세력의 군국주의적인 망언이 나올 때면 이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철저히 비판하는 그의 코멘트가 유력 언론에 소개되는 등, 그는 일본 현대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개인 잡지『쇼와사 강좌』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쇼와사 연구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작으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지치부노미야』『요시다 시게루라는 역설』『쇼와사의 일곱 가지 수수께끼』『쇼와: 전쟁과 천황과 미시마 유키오』『저 전쟁은 무엇이었는가』『정치가와 회상록』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 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제1장 장쭤린 폭살 사건과 관동군의 음모
제2장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와 만주사변
제3장 만주국 건국과 육군의 착오
제4장 황도파와 통제파: 2·26 사건의 두 얼굴
제5장 2·26 사건 판결은 어떻게 유도되었는가
제6장 중국 국민당의 눈으로 본 ‘항일 전쟁’
제7장 팔로군에 가담한 일본 병사의 중일전쟁
제8장 일본 병사는 왜 만행으로 치달았는가
제9장 장고봉 사건과 일본인 포로의 인생
제10장 노몬한 사건, 어처구니없는 군사 행동
제11장 트라우트만 공작의 놀라운 이면
제12장 왕자오밍 추대 공작과 그 배경
제13장 일독이추축체제를 향한 무모한 길
제14장 위험한 도박,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제15장 미일 수뇌 회담은 왜 결렬되었는가
제16장 「헐 노트」가 도착한 날의 육군성
제17장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도조 히데키
제18장 워싱턴 해군 주재무관의 회상
제19장 진주만 공격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제20장 싱가포르 공략과 그 뒤틀린 그림자
제21장 어느 사병이 체험한 전쟁의 내실
제22장 과달카날, 병사들의 통곡
제23장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미일 병사들의 현재
제24장 선박포병 제2연대의 끝나지 않은 비극
제25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와 육해군의 대립
제26장 정보 없는 전쟁 지도의 무책임 체제
제27장 레이센 조종사들의 싸움
제28장 제25군 적성국인 억류소의 나날
제29장 뉴기니 전선의 절망과 비극
제30장 참모본부 참모들의 체질과 그 결함
제31장 아직 기록되지 못한 전장 두 곳
제32장 육군대신이 참모총장까지 겸임하는 사태
제33장 사이판 함락과 병사들의 절규
제34장 임팔 작전, 고위급 지휘관과 생존 병사들의 분노
제35장 정보가 경시된 필리핀 결전의 내막
제36장 특공대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제37장 오키나와 전투의 결전 태세와 그 의미
제38장 본토 결전과 최고전쟁지도회의
제39장 비밀리에 진행된 원자폭탄 개발 계획
제40장 시종무관의 일기가 들려주는 패전 전후
제41장 구소련의 자료가 말하는 ‘사실’의 내용
제42장 홋카이도 점령인가, 시베리아 억류인가
제43장 다이쇼 세대 예비역 장교의 눈에 비친 쇼와 육군
제44장 최후의 육군대신이 남긴 수기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제45장 패전 시에 지도자는 어떻게 처신했는가
제46장 참모들의 쇼와 육군 재건 움직임
제47장 스가모 형무소의 군사 지도자들
제48장 전우회라는 조직과 쇼와 육군의 체질
제49장 이상한 군인은급 조작
제50장 시베리아 억류자 보상 요구의 단면
제51장 남겨진 ‘전후 보상’ 문제를 주시하며

후기
문고판 후기
참고문헌
취재 대상 명단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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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500여 명의 증언과 방대한 자료로 밝히는 전후사 연구의 집대성!
어째서 일본은 전 세계를 전화戰火로 몰아넣었는가?

“쇼와 육군은 결국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였습니다.
그 광기에 이제까지 일본의 모든 역사와 제도가 함께 무너졌습니다.”

책소개

이 책은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는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부터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일본 군부의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뿐 아니라 중국과 대만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자의 증언과 일기, 기록 등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때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의 잔재를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70~8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장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쇼와 육군의 체질이라는 것
청년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시베리아에서 5년간 포로생활, 중국으로 이송돼 전범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된 바 있는 우노 신타로. 전쟁 후 무역회사 회사원이 되어 처자식과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1945년 3월, 사사 신노스케 전 중장 휘하에서 후베이성 마을의 주민 90여 명을 살해하는 데 가담한 전력이 있다. 이들 부대는 또 난장 현 우안옌 부근에서는 부인, 어린이, 노인 등 20명을 잔혹하게 교살했다. 나아가 샹양 성 부근 왕자잉 촌에서는 주민 18명을 손바닥에 철사를 꿰어 줄줄이 묶은 다음 판청의 교회당 옆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샹양 시에서도 주민 30여 명을 철사로 묶은 다음 강으로 밀어넣었다. 그 가운데 후자오샹 등 5명은 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저우광짜오 등 20여 명은 전부 익사했다. 더욱이 샹양 시에서는 부하가 부인을 강간하는 것을 방임하고 심지어는 윤간 끝에 죽임에 이르게 했다. 1990년 도쿄에서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사실을 털어놓은 우노는 당시 자신이 중국에서 저지른 것은 학살이나 만행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행위인 줄로만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노 신타로) “하나는 일본 육군의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뭔지를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쇼와 육군의 지도부에 속한 고위급 군인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종종 ‘대선大善’과 ‘소선小善’으로 표현했다. 1882년 메이지 천황이 군에 하사한 「군인칙유」만 좇는 것은 ‘소선’이며, 천황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적 기정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대선’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서없는 논리에 감춰져 있는 독선적 주관주의로 지탱되었던 조직이 바로 쇼와 육군이다. 그리하여 부녀자와 노인, 소년, 유아를 반쯤은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수단으로 살해할 만큼 망가졌던 쇼와 육군 지배하의 병사들 중 자신들의 퇴폐적인 경험을 고발하는 이가 많이 나오는 것은 “이 전쟁이 너무나 더러웠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은 대개 메이지 10년대(1877~1886) 중기부터 20년대 후기에 걸쳐 태어났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등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정원이 50명인 육군대학의 졸업생이라는 것만 해도 이미 엘리트임을 인정받은 것인데, 그중 상위 10퍼센트는 군 지도부에 들어가 행정과 작전 계획을 담당했다. 문제는 성적지상주의의 기관들에서 우등생이었던 이들은 실전 체험이 드물었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의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란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즉 근대 일본 부국강병 정책의 충실한 자식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인물들은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지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 육군이 일본에 초청되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했다. 더욱이 육군유년학교에서는 독일어, 러시아어 등이 중심이 되고 영어 교육은 철저히 경시되었다. 나아가,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었다. 철학적·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기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모토 군은 심신이 모두 불가사의할 정도로 유연하고 강인하며 굴신자재屈伸自在할 뿐만 아니라 결코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면서도 아주 대담하며, 세밀하게 생각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 운운.”

이 글의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라는 표현에 쇼와 초년대 군인의 성격이 응축되어 있다. ‘대의(천황의 뜻)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관계없다는 심정과 패턴이야말로 쇼와 육군과 그 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것은 병사를 무기질無機質의 병기로 육성하는 데 결사적이었다는 것, 보급과 병참 사상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병사들에게 옥쇄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충절이라는 명분 아래 죽음을 명령했던 것)를 명하고, 그것에 대한 자기반성도 없이 잇달아 그런 종류의 작전을 명한 것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장교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쇼와 육군의 체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우노 신타로는 연대본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의 소장을 겸한 바 있는데, 그는 이곳의 중국인 포로들이 죽어나갈 때 특별히 인간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만약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광스런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장교에게는 식사도 충분히 제공되었고 게다가 위안시설까지 있었다. 그곳에서 울적함을 풀었다. 반면 일반 병사에게는 조악한 식사에다 위안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토벌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종종 농촌을 습격했다. 장교가 병사들의 강간을 묵인하고 약탈을 눈감아준 것도 그러한 일본군의 ‘장교 주도의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군 관료들은 하급 병사를 동원하는 데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로지 서로를 감싸는 체질만을 드러냈다. 노몬한 사건을 지도하여 2만 명에 가까운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고 전상자나 전병자로 만든 관동군 참모인 쓰지 마사노부나 주임참모 핫토리 다쿠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요직에 복귀했고, 태평양전쟁 개전 때에는 가장 과격한 개전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때도 과달카날에 과도한 병력을 투입하고 싱가포르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등 그들은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든 책임을 지지 않고 전쟁의 과오를 계속해서 반복해갔다.

도조 히데키, 쇼와 육군 패망의 상징적 존재
쇼와 육군 붕괴의 원인이 된 태평양전쟁은 지도자의 체질이나 전략에 따라 수행되었다. 거기에는 붕괴하는 것이 당연한 조직 체계, 인간사상, 전쟁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3년 9개월 중 2년 9개월 동안 수상, 육군상, 참모총장까지 겸하고서 전쟁을 지도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이러한 공통점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었다. 가령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의 법정을 묘사하며 당시 일본 지도부의 무능함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헐 노트」에 관한 일본의 입장을 확인하며 도조 히데키를 신문했다. 「헐 노트」는 1941년 11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작성한, 일본의 제안에 대한 미국의 답변이었다. 사실상 일본이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지를 점령하며 벌인 정치 공작을 중단할 것과 삼국동맹의 백지화를 주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아울러 「헐 노트」에는 교섭의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일본 측은 이를 묵인했다. 도리어 승산이 낮더라도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여 메이지 시대 이래 육군 선배들이 중시해온 ‘의義’를 지켜야 한다는 강경 노선을 택하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헐 노트」에 담긴 기본 방침을 무시하지 않고는 미국과 전쟁을 벌일 명분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취재 중 입수한 ‘도조 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일본을 움직인 도조 히데키의 생각을 최초로 공개한다. 도조는 “「헐 노트」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