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유리천장 깨기 (미국 대선에 도전한 세 여성의 이야기)

가장 높은 유리천장 깨기 (미국 대선에 도전한 세 여성의 이야기)

$15.70
Description
유리천장을 깨고자 했던 여성 대권 도전자들, 그 도전의 역사!
2008년 초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뉴햄프셔에서 강연할 때 보스턴의 한 라디오 방송국 직원 두 명은 피켓을 들고 외쳤다. “내 셔츠나 다려라! 내 셔츠나 다려!” 이런 난관에도 당시 힐러리의 선거운동은 선구적인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힐러리보다 앞서 그 길을 닦은, 더 큰 역사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없었다. 러리가 가장 성공한 여성 대통령 후보일진 모르나, 그 뒤엔 더 오랜 투쟁이 숨어 있다. 『가장 높은 유리천장 깨기』는 바로 가장 높은 유리천장에 금을 낸 세 명의 도전자에 대해 다룬 책이다.
저자

엘런피츠패트릭

저자엘런피츠패트릭은뉴햄프셔대학역사학과교수.현대미국정치사와지성사연구자로『뉴욕타임스』『월스트리트저널』『로스앤젤레스타임스』『USA투데이』『보스턴글로브』『워싱턴포스트』,CBS의「페이스더네이션FacetheNation」,NPR등과인터뷰를진행했고,PBS의「뉴스아워」에출연하기도했다.학계와저널리즘분야에서활동하며미국정치이슈를다룬여덟권의책을저술하고편집했다.베스트셀러『재키에게보낸편지LetterstoJackie』는빌쿠튀리에감독의다큐멘터리영화「재키에게보낸편지:케네디대통령을추모하며」의원작이며,영화는큰호평을받았다.피츠패트릭은영화의협력프로듀서로참여하기도했다.여성사회학자와그들이추구한점진적개혁을다룬『끝나지않는운동EndlessCrusade』과미국에서의여성인권운동을다룬공저『투쟁의세기CenturyofStruggle』등미국정치사에서페미니즘과의접점에천착해왔으며,그밖에미국현대정치사를다룬『역사의기억History’sMemory』과미국정치저널리즘에획을그은세가지사건을심층분석한『사생활캐기Muckraking』등을썼다.이같은성과로공공서비스부문우수상을수상하며그공로를인정받았다.

목차

프롤로그_2008년뉴햄프셔
제1장빅토리아?우드헐_“모두가?주목하는?자리”
제2장마거릿체이스스미스_“공화당의매력적인얼굴”
제3장셜리치점_“뒤집어엎어”
에필로그_2016

출판사 서평

150년동안시도된가장높고단단한유리천장깨기!
이번에는과연깨질것인가?
하수구란하수구는다끌려다녔던여성대권도전자들
그도전의역사는길었고?야망과실패,?의구심과가능성으로점철됐다


미국민주주의역사에서가장높은유리천장은깨진적이없다.지난150년동안수많은여성이도전해온까닭에그천장에금이간것은분명하다.그런데그처럼단단한유리천장을깨려했던여성들은해진대걸레처럼온갖구정물에몸을담궈야만했다.“얼마나낯두꺼운창부면대통령이되겠다고나서겠어요?”저유명한『톰아저씨의오두막』을쓴해리엇비처스토의발언이다.1972년대권에도전했던셜리치점에게사람들은대놓고으름장을놓았다.“여기말고집에나붙어있으시죠.”비하발언은수십년이흘러서도수그러들지않았다.2008년초대통령후보힐러리클린턴이뉴햄프셔에서강연할때보스턴의한라디오방송국직원두명은피켓을들고외쳤다.“내셔츠나다려라!내셔츠나다려!”이런난관에도당시힐러리의선거운동은선구적인기록을세웠다.하지만힐러리보다앞서그길을닦은,더큰역사에주의를기울인사람은없었다.힐러리가가장성공한여성대통령후보일진모르나,그뒤엔더오랜투쟁이숨어있다.이책은바로가장높은유리천장에금을낸세명의도전자에대해다룬다.

1871년첫번째도전자,빅토리아우드헐
미국역사에서는그간200명을웃도는여성이대통령후보에도전해왔는데,그시발점은빅토리아우드헐이다.1871년7월,뜻밖의후보가갓출범한정당대표로대선출마에동의하는수락서를쓰는일이일어났다.아직여성에게투표권이주어지기도전이라그녀는범상치않은여성임에분명했다.당시미국은재건시대로남북분리와전쟁,노예해방의결과를받아들이면서민주주의에대한격론이펼쳐졌다.“오늘날의시대정신은?무한?해방입니다.?노예제의?저주가?이?땅을?뒤덮었을?때는?주춤했지만?끝없는전투로?노예제가?폐지되고정의의?목소리가들리기?시작했습니다.?이제는?흑인과?평등해지고?싶어하는?미국?여성들의?열망을?비웃도록?놔둡시다.”
전국정치무대에서본여성들중빅토리아우드헐만큼파란만장한길을걸은사람도없다.1838년오하이오농촌마을에서태어난그녀는사기꾼아버지를두었고,어머니록사나는“한번도제정신인적이없는”,조증과울증을널뛰는여성이었다.우드헐이받은교육은길어야3년이다.열다섯에결혼해순탄치못한부부관계로우드헐은혼자힘으로사는법을배웠고그러던중‘심령치료사’로서재능을인정받아큰돈을손에쥐게되었다.즉미대선의첫여성도전자는‘영적능력’이풍부한(?)사람이었다.특히이때만난제임스블러드대령은훗날그녀의두번째남편이되면서대권가도를열어주는조력자가된다.심령술로부와명성을얻은우드헐(그리고그동생클래플린)은영매능력으로주식정보까지내다봤고,금과채권을사들이면서엄청난부를모았다.
곧이어우드헐은여성참정권운동계에서도두각을나타내기시작했다.참정권운동가들은우드헐자매에게마음을빼앗았다.그들은우드헐자매의‘용기,에너지,진취성,외모,매너,여성스러운행동’을높이샀다.특히한기자가썼듯이“수려한용모와기품있는모습,햇빛에반짝이는보석같은광채,정신을아득하게만드는아름다운얼굴과몸매”로인해‘높은자리에오를여성’이란평가를받았다.더욱이우드헐이큰부를바탕으로야망을이루는데는두명의급진주의자남성뮤즈가있었다.한명은그녀의두번째남편블러드대령으로그는철학에조예가깊고공산주의자를자처하는인물이었다.다른한사람은유토피아주의철학자이자급진적노동운동가인스티븐앤드루스였다.두사람이힘을합쳐우드헐의대선출마를도왔다.우드헐의?대통령?출마는?두?단계로진행됐다.?우선?1870년?봄?『뉴욕?헤럴드』에?편지를?보내?출마?의사를밝혔다.?그녀가특이한후보인것은단지?투표권이없는?여자라거나?헌법에?명시된?대통령출마?최소?연령(35세)에?못미쳐서만은아니었다.?그녀가‘자기지명후보’인까닭도있었다.
우드헐이1870년출마선언을한주목적은“여성이남성과정치적평등을누릴권리에관심을모으는것”이었다.즉상징적인출마선언이었다.19세기에여러사람이택했던길이다.하지만그녀가여느후보들과차별적이었던점은,다른대통령후보들이미덕·겸손·청렴을앞세웠던데비해,그녀는사회운동의화신으로서자기자신을적극적으로홍보했다는점이다(이는당시흔치않은일이었다).그녀는특히다수당인공화당과민주당후보들이싸움을붙이기위해‘흑인평등’문제를들고나오자“한물간쟁점일뿐”이라고잘라말했다.남북전쟁과재건으로흑인평등이어느정도실현됐기때문이다.몇몇언론은우드헐의이런도전을높이사면서‘진취적’이라고평가했던반면,다른많은언론은그녀를“뇌쇄적인우드헐”“어여쁜환전상”“무당벌레”라불렀다.
이후1871년1월워싱턴DC에서전국참정권대회가열리던날우드헐은여성최초로하원법사위원회에서연설을하는새로운역사를썼다.수많은언론이우드헐을사냥감으로여겨물어뜯으려했지만,우드헐은“우드헐과언론의개들”이라는헤드라인기사를내는등강고하게대응해나갔다.하지만1871년5월우드헐의공적인삶과사적인삶모두위태로운운명에놓이게된다.우드헐의어머니가“우드헐은현남편과전남편둘다와동거중”이라는폭탄발언을한것이다.우드헐이몸져누운전남편을돌보기위해동거중이었던것은맞지만,“난잡한행태”로악의적으로보도돼우드헐의품성이도마에오르면서그녀의모든업적은무용지물이되고말았다.대선이얼마남지않은시점에서우드헐이도덕성을회복하기에는이미늦었었다.어머니가사위를고소하고가정사를폭로한지일주일만에우드헐의삶은끝났다는기사가전국신문을도배했다.“딱걸렸다.”당시『애틀랜타컨스티튜션』의헤드라인이다.
우드헐의대선출마는대체로경솔했다는평가를받으며그녀는역사의뒤안길로사라졌지만,이출사표는그녀의삶에서나미국역사에서나중요한사건으로기록된다.

“공화당의강적”,마거릿체이스스미스
존F.케네디대통령은죽음을맞기일주일전마지막기자회견에서기자들로부터마거릿체이스스미스후보가뉴햄프셔선거에영향을미칠걸로점치냐는질문을받았다.케네디의답변은다음과같았다.“스미스의원은강적입니다.제가공화당후보라면그녀를경쟁자로만나지않길바랄겁니다.”당시만해도여성이대선에입후보한다면기자들조차웃음을터뜨렸던시대이건만스미스상원의원의입후보는웃을일이아니었다.사실스미스야말로예측하기도,손쓰기도힘든‘진정한무소속’의원이었다.그녀가이뤄낸수많은‘최초’는업적과고립을동시에보여준다.여성최초로혼자힘으로상원의원이된스미스는또한여성최초로상하원의원모두를지냈다.20세기여성중가장오랜기간상원의원을지낸경력을보유하며,1963년에이르기까지총4명의대통령을거쳤다.
용기와자립심을타고난권리로여긴스미스는남편을통해상원의원직에올랐다.상원의원이었던남편이재임중사망하자‘미망인승계관례’에따라자리를물려받았던것이다.그녀의출생배경도우드헐처럼그리좋지못했다.메인주스코히건이라는공업도시에서술에찌들어지내는이발사의딸로태어났다.맏딸로서어머니를도왔던그녀에게서는일찍부터책임감,추진력,야망의싹이엿보였다.가장먼저가진직업은고등학생때의전화교환수직이었다.그일을하면서15년동안관계를이어갈마흔살경의이혼남클라이드를만나게됐다.여성편력의기미가조금엿보이는클라이드와관계를맺으면서마거릿은원룸스쿨교사생활을잠시했다.그리고2년뒤스코히건의주간신문사『인디펜던트-리포터』에온갖잡무를도맡는여사원으로취직해보급부장자리까지승승장구했다.1920년대에그녀는여성클럽에서활발히활동하게되며,넘치는열정으로클럽내에서단기간에주목을받았다.
이전에이미정치적경력이있었던스미스의남편클라이드가먼저선거에도전했고,스미스역시지방과카운티의공화당활동에적극적으로참여했다.시작은스코히건공화당의원회비서직이었다.이후윌러드커밍스가운영하는방직공장일을하면서주차원의정당정치에몸을담았다.이때커밍스는스미스에게정계입문을권했다.스미스는남편클라이드가의원생활을할때남편과유권자들사이에서다리노릇을하기도했다.워싱턴과메인주를정신없이오가며남편의자리를메웠다.1938년남편의재선운동기간에는남편의대변자역할에그치지않고그와반대되는목소리를내기도했다.가령남편클라이드는고립주의자로국방비지출확대에반대했다면,스미스는미국군대의전쟁대비가시급하다고주장했던것이다.
1940년봄,남편은아내스미스를자신의승계인으로지목하며사망했다.이로써‘고양이구멍’으로공직에앉게된스미스는스스로의추진력과야망에운명적우연이덧붙여지면서연방정치에뛰어들었다.보궐선거로그녀에게주어진임기는딱6개월.곧바로공화당의원네명과맞붙는1940년6월예비선거에뛰어들어야했다.이때함께출마한공화당의원존마셜은메인주가여자에게대표자리를맡기는것은위험부담이너무크다고주장했다.“손목한번까딱흔들며웃는다고되는일이아닙니다.”즉전형적으로‘능력’보다는‘성별’다툼으로선거를몰고갔다.
그런우려는?20세기전쟁상황에서특히여성대통령후보들을힘들게했다.?전통적으로남녀의고유한능력에대해이야기할때남성은힘과공격성,?용기,냉정함을갖춘타고난군사전략가라는점을강조했다.?이러한통념때문에여성이군통수권자역할을잘해낼지에대한의심은더욱커졌다.?여성운동가는곧평화운동가라는역사적인식역시이런염려에무게를실어줬다.?미국공직자중가장유명한여성몇명이평화주의자였다.?
하지만스미스는좀달랐다.그녀는‘전쟁준비’를자신의주요공약으로내세웠다.“국방에지출하는돈은사치가아닙니다.전쟁에대한보험입니다.”그녀는1941년2월무기대여법안을지지한공화당의원24명중한명이었고,11월에는공화당하원의원중유일하게중립법(해외전쟁에대한미국의참전과무기판매등을금지하는법률)폐지에찬성했다.한결같이국방에대한강화를외치는그녀는이미남편을도와유권자들과친숙한덕도있고,(그녀자신은외면했음에도)여성세력의지지를입어공화당경쟁자4명을완파시킬수있었다.스미스는정치인으로서페미니스트이냐고질문을받으면발끈했다.그럼에도양성평등수정조항에는찬성표를던졌다.페미니스트가아니라고부인한이유는그런꼬리표가붙으면여자라는이유로남자보다여자편을든다는느낌을주기때문이라고했다.“저는특혜를요구한적도,받은적도없습니다.”그녀가한말이다.
1948년상원의원재선에도전할때메인주유권자의64퍼센트가여성이라는점이스미스에게는기회가됐다.그녀는자신이‘페미니스트가아니라’‘여성의대변인’임을강조했다.온갖구설수와인신공격속에서도스미스는세남자를물리치고승리했다.1949년1월스미스는상원의원에취임했고,남성의원27명과함께양성평등수정조항을의회에발의했다.스미스는대기업과노동자문제에있어서는공정과평등에목말라하는노동자들문제에주의를기울였지만외교정책에서는여전히‘독수리의발톱’을택했다.베트남전쟁개입도한결같이지지했다.1950년대중반그녀는전국적인유명인사가됐다.비이성적인반공주의자매카시에게맞서고,유일한여성상원의원일뿐아니라,냉전정치가다운면모등으로인해1954년갤럽여론조사에서는세계에서가장존경받는여성4위에뽑혔다.하지만1964년그녀가공화당대통령후보지명전에나가기로결심하자상황은쉽지않았다.
많은언론은스미스를부통령후보로점쳤고,심지어부통령후보가되리라는전망조차조롱거리가되었다.화가난스미스는“제목표는오직대통령선거입니다”라며입장을분명히했다.특히그녀는자신의출마의사를밝히는무대로전국여성언론인클럽을택했다.여론조사가긍정적이었던것과달리언론은부정적인면을보였다.‘사랑스럽고날씬한사람이지만,백악관주인에게필요한강한체력은없어보인다’는것이었다.그런와중에케네디대통령암살사건이터졌고,이것은스미스에게매우불리하게돌아갔다.그리고대중은성별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