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지않고성공하는길로는저주가최고다!”
조선왕조의참혹한흑역사이자궁궐의치욕스런민낯,
드러나지않았던궁궐의음지陰地,
권력과암투속궁궐저주사건을낱낱이밝히다
책소개
‘저주사건’을중심으로조선역사를돌아보는이책은궁궐에서발생한아홉건의저주사건을선별해그흐름과의미를집중적으로되짚는다.저자는이능화의『조선무속고』를통해조선시대의저주사건에관심을갖게되었는데,그중특히원인과결과가분명한사건들을이책에서다룬다.성종대저주상자배달사건,중종대작서사건과목패저주사건,광해군대무녀옥사사건,인조대저주사건과번침,효종대조귀인의뼈저주사건,숙종대장희빈의저주사건,영조대무신당의저주사건,정조대존현각자객침입사건이그것이다.지금까지조선역사는궁궐을주요무대로삼아왕과권력가까이에있는사람들이중심인물로조명되어왔다.이책역시궁궐을무대로한다는점에서는같은맥락일지모르나,그핵심에저주사건이있고또역사에서배제되었던무속인들과권력에서밀려났던이들이사건의주동자로등장한다는점에서지금까지와는전혀다른역사를쓰고있다.분명한사실은그늘지고음습한조선왕실의한편에서나라를뒤흔드는저주사건이끊임없이,그것도광범위하게발생했다는점이다.온갖동물사체와뼈가몰래궁궐에묻혔다.효종대에는궐내저주물을청소하기위해3개월에걸쳐대대적인수리공사를벌이기도했다.이렇듯당당하게역사의한페이지를장식하는저주사건은,말하자면욕망과감정의산물이다.예나지금이나권력쟁취의이면은혼탁하고불순하다.특히왕권사회였던조선에서는왕에게기대어권력을좇으려는유혹에빠지기쉬웠는데,그방법중하나가바로‘저주’였다.그리하여은밀한정치와악의적저주는한몸으로결합할가능성이높았다.이처럼우리가잘알지못했던조선궁궐의은밀한저주사건을밝히는일은역사의밝은면만이아닌어두운면까지드러내며‘성찰하는역사’의한단면을보여줄것이다.
저주의방법:벌레를넣는것에서부터사람뼈와동물사체까지
주술적믿음이강했던전근대시기에는저주가반드시주술적행위를동반했다.‘고蠱’는그릇속에벌레를여러마리넣어두고서로잡아먹다가최후까지살아남은벌레를뜻하는데,사람들은이벌레에상대를해칠힘이있다고여겨이를갈아서저주물로만들었다.이것이고독蠱毒이다.이고독을몰래음식이나음료에넣어먹게하면그사람은병들거나죽음에이른다고믿었는데,이러한저주를‘무고巫蠱’라한다.도마뱀,쥐,고양이,개,돼지등동물의사체를이용하여저주하는방식모두무고에해당된다.이처럼사람의뼈나동물사체등을묻는방식의저주를‘감염주술’이라하는데,이는머리카락,손톱,이빨등신체일부가사람과분리된이후에도그사람과관계가지속된다는믿음에서기반한다.‘염매厭魅’는염승과귀매가합쳐진말로,‘염’은인형과화상을만들어저주하는흑주술,‘매’는죽은영혼을유도하여해를끼치는저주다.상대를상징하는인형을만들어눈과심장등을뾰족한것으로찌르거나그림을그려해를가하는것으로,‘동종주술’이라부른다.조선시대에무고나귀매등의저주행위는극악무도한짓으로처벌받았다.『대명률직해』는“고독을하여타인을살인하거나이를사주하는자는참형에처한다”고했으며,그실정을모르는처자및가족들까지멀리유배보냈다.저주사건을획책한이들도저주가참형에해당되는죄라는걸모르지않았다.그럼에도저주의유혹에빠지는이유는아무도모르게상대를해칠수있는좋은방법이라고생각했기때문이다.때로저주는자신의발등을찍는일로업보가되어돌아오기도했고,피해자와가해자가명확히구분되지않을때도많았다.오히려가해자가손해를보고피해자는어떠한해도입지않는경우도있었다.저주사건의근원에는항상‘권력’이존재한다.궐내권력을차지하기위한투쟁,왕비와후궁간의암투,왕에대한반역등이‘무고’나‘염’과같은방식의저주로모습을드러낸것이이책에서다루는아홉건의저주사건이다.
조선궁궐의저주사건을들여다보다
·성종대저주상자배달사건
왕이여러명의후궁을두었던조선궁궐에서왕비와후궁간의암투가끊이지않았음은널리알려진사실이다.왕에게총애를받아야궁궐내에서권력을차지하고,자신의아들이왕위에오를수있었기때문이다.성종대에는유달리왕비와후궁들간에시기와질투로인한다툼이많았다.성종은후궁을9명두었고,그자식만해도28명에달했다.1477년,덕종(성종의부친)의후궁이었던권숙의의집에의문의상자가하나배달되었다.상자에는엄숙의와정소용이꾀를내어중궁(왕비윤씨)과원자(훗날의연산군)를해치려한다는내용의편지와비상砒霜,방양서方禳書가들어있었다.비상은치명적인맹독성약품으로사약을제조하는데쓰였다.정희왕후(성종의할머니)는이사건의배후로후궁가운데특히질투가심했던정소용을의심했다.게다가정소용은임신중이었다.궁궐사람들도정소용이왕비를몰아내기위해가장한일이라고생각했다.하지만윤씨가스스로꾸민일이란게들통났다.신하들은윤씨의죄를용서해줄것을청했으나,성종은윤씨를빈으로강등시키고자수궁에머무르게함으로써사건을종결시켰다.그러나윤씨의행실은점점나빠졌으며결국궁궐에서쫓겨나기에이르렀다.윤씨에대한앙금이풀리지않던차에신하들이윤씨를감싸고돌자,성종은화근을없애버려야겠다고결심하고윤씨에게사약을내렸다.비상으로저주를계획하다가도리어비상으로만든사약을먹고자신이죽게된것이다.윤씨의죽음은‘갑자사화’를일으키는발단이되었다.어미의죽음에대해알게된연산군은윤씨의죽음에조금이라도연루된사람들을싹쓸이하여잡아죽였다.저주가잉태한거대한폭력이었다.
·숙종대장희빈의저주사건
왕비와후궁간의암투에서비롯된궁궐내저주사건에서‘장희빈’이라는이름을빼놓을수없다.숙종대갑술환국(1694)이단행되어남인이실각하고서인이등용되는바람에왕비가되었던장씨는다시희빈으로강등되었고인현왕후가복위했다.그러나인현왕후의삶은순조롭지못했다.서른다섯의젊은나이에숨지고말았다.숙종은장희빈이신당을차려놓고저주한탓에인현왕후가숨졌다며장씨세력을국문했다.무녀오례가저주의화살을쏘았다는진술이확보됐다.“굿을할때마다오례가활과화살을차고풍악을울리며‘내가장차민중전을잡아서쇠그물에넣겠다’고했습니다.”(『숙종실록』)장희빈과인현왕후는드라마의단골소재로,인현왕후는늘어질고착한왕비,장희빈은표독스러운악녀로등장한다.그렇다면장희빈은실제로악독한패륜녀였을까?『인현왕후전』은인현왕후의측근이그녀의생애를소설로풀어쓴궁중서사문학이다.인현왕후의생애를집중조명함으로써그녀를가장어진왕후로받들고이상화하는『인현왕후전』의내용을그대로역사적사실로받아들이기에는무리가있다.『인현왕후전』은장희빈이신당을차려놓고갖가지저주를내린끝에인현왕후가병에걸려사망했다고못박고있지만,인현왕후의사망과장희빈의저주는시기적으로맞지않는다.그러므로저주때문이라기보다는장기간앓았던종기로인해사망한것으로봐야한다.또한기사환국의여파로서인은쫓겨난반면,장희빈은원자를출산하고숙종의총애를얻어왕비가되는것을본인현왕후가받았을스트레스도영향을주지않았나여겨진다.그렇다고장희빈이정말아무짓도하지않았느냐하면그렇지는않다.장희빈은궁궐저주의관습에따라인현왕후의거처에저주물을묻는방식으로인현왕후를저주했고,이는모두사실로밝혀졌다.
·인조의후궁조귀인의뼈저주사건
인조는맏며느리인세자빈강씨를미워했다.남편인소현세자가숨지자강씨는더욱고립되었다.게다가인조의총애를받던후궁조귀인이강씨를모함하고이간질했다.누군가인조의수라상에올라온전복구이에독을넣은사건과궁궐에서더러운저주물이발견되는등저주사건이연이어일어나자용의자로강씨가지목됐다.조귀인은별다른증거도없이강씨가꾸민일이라모함했고,결국강씨집안은멸문지화를당했다.인조가세상을뜨고효종이왕위에오르자정국에는변화가생겼다.효종과발맞춘산림세력이등용된반면,조귀인과김자점은궁지에몰렸다.이과정에서누군가효종과대비를뼈로저주한일이발각되었다.이에국문하니조귀인이저주를위해무당을두었고,안으로는여종들과결탁하고밖으로는승려들과왕래하며왕을해치려처소에저주를했다는사실이드러났다.조귀인의수법은엽기적이었다.“종들을시켜죽은사람의두골,수족,치아,손톱,발톱,머리카락과벼락맞은나무,무덤위의나무등을몰래구해오게했습니다.또무덤을파헤쳐시체의살점을떼어오고,관의나무조각을찾아오게했습니다.시체에서흘러나온물을적신솜,마른뼈를갈아만든가루,심지어는햇볕에바짝말린닭,개,고양이,쥐등저주하는데필요한물건이라면모아서들이지않은것이없었습니다.”『효종실록』에기록된이와같은방식은영조대세자빈강씨가저질렀다던수법과일치한다.즉조귀인이강씨에게누명을뒤집어씌웠을가능성이크다.그런데이사건은시작에불과했다.산림의등용으로위기에몰린김자점일파는다시정권을잡으려고역모를꾀하고있었다.조귀인과김자점은함께나라를뒤집고자안에서는조귀인이저주를벌여효종과대비를죽이고,밖으로는김자점이군사를일으켜정권을잡고자했다.그러나그들의계획은무산되고모두사형에처해졌다.범인들에대한처벌은이루어졌지만궁궐에는여전히저주의뼛가루가남아있었다.효종대에는저주물을치우기위해수리도감이설치되고2000여명의승려가3개월간동원되어조귀인의저주물을비롯한궐내각종오물과흉물들의대대적인색출작업이이루어졌다.조선시대의부끄러운역사가아닐수없다.
궁궐내저주사건은끊임없이발생했다.특이하게도인조는궁궐에서저주물이발견되자이를치료하고자번침에의존하기도했다.또한조선은유교사회였지만문화저변에는고대로부터이어져온불교와무속이자리잡고있었고,내적으로무속의힘이아주셌다.저주사건역시무당이개입되는경우가많았다.특히궁궐여성들은무속을통해심리적안정감을찾았다.국가적차원에서는국가의례를치르는나랏무당을두기도했고,전염병치료를위해무당들을배치하기도했다.궁궐여성들은평안을기원하고저주를벌이기위해궁중안까지무당을불러들였다.사정이이러하니저주사건이발각되기라도하면무당들도함께환란을겪었다.대표적으로광해군대에는유릉저주사건을밝히기위해무당한명을붙잡아와심한고문을하자,장안의무당을전부고발했고,이로인해죄없는무당들까지끌려나와죽임을당하거나옥고를치르는대대적인무당숙청이이루어지기도했다.이외에도영조대에는이인좌의난을일으켰다가살아남은잔당들이궁궐에서저주를하고방화를일으키려했으며,정조대에는정조의즉위로위기를맞은외척세력들이존현각에자객을보내고홍국영과정조를저주하는굿을하며반정을모의하는등왕에대한반역을시도하는궁궐저주사건은끊이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