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의 정원 (동양의 에피쿠로스, 이어의 한정우기 | 양장본 Hardcover)

쾌락의 정원 (동양의 에피쿠로스, 이어의 한정우기 | 양장본 Hardcover)

$42.40
Description
『쾌락의 정원』의 제목은 분명 《한정우기(閑情偶寄)》인데 전통적으로 ‘한정閑情’이란 공적인 일에서 벗어났을 때 느끼는 한가로운 감정이며, 그에 더해 말할 수 없이 미묘한 슬픔과 여운까지 묻어나는 단어다. 이어가 자신의 책에서 ‘한정’을 표방한 것은 이 글이 업무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의 취미나 편안한 휴식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또 ‘우기偶寄’라는 것은 어쩌다 기록하다는 것으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서술이 아닌, 즉흥적 감정의 자유로운 기록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제목과는 반대로 이어의 ‘우기偶寄’는 겸사일 뿐이며, 그는 아마도 이 책을 필생의 업적으로 남기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 같다. 글의 도처에서 묻어나는 득의와 과장, 더 잘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의 한가한 그 어느 때를 대비해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각종 취미생활을 세세하게 기록했는데, 이런 그의 필치를 따라가다보면 과연 이어 본인은 어느 때 한가하고 자적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자신의 필법을 따르자면, 어쩌면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하여 세상 모든 이의 ‘한가함’을 위해 끝없이 분주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저자

이어

저자 이어(李漁)(1611~1685)
명말ㆍ청초의 희곡작가이자 산문가, 출판인. 이어李漁는 원래 이름이 선려仙侶이고 나중에 어漁로 개명했다. 자字가 적범謫凡이고 호號가 천도天徒 또는 입옹笠翁이라 한다. 절강성 금화부金華府 난계현蘭溪縣 하리촌夏李村 사람으로 명말 청초의 저명한 희곡 이론가이며 희곡작품과 백화소설을 다수 창작했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오늘날의 직업군으로 보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분야에 몸담았는데, 극작가이자 연출가 겸 극단 경영자였고, 책의 기획과 편집에서 출판과 판매를 총괄하는 전문 출판인이었다. 또한 소설과 희곡을 쓴 작가이자 비평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 『한정우기閑情偶寄』의 면면에 드러나듯이 건축ㆍ가구제작ㆍ의복ㆍ장신구ㆍ화훼ㆍ음식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전 영역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했던 예술가였다.
19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생계가 곤란해지자 가족과 함께 난계로 돌아와 결혼했다. 꿋꿋이 학업을 계속하여 숭정崇禎 8년(1635), 금화金華의 동자시童子試에 합격하고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과연 청나라의 침입으로 명 왕조는 사라졌다. 이후 고향 하리촌 이산伊山에 별장을 마련하고 이원伊園이라 지었다. 자신의 원림 철학에 따라 직접 설계했다.
1651년, 이어는 분쟁에 휘말려 가산을 정리하고 항주로 이사했다. 이때부터가 이어의 인생 제2기인데, 그는 전과 다른 삶의 길을 결심했으며 글을 팔아 생활을 시작했다. 『풍쟁오風箏誤』 『의중연意中緣』 등의 희곡과 『무성희無聲戱』 『십이루十二樓』 등의 백화소설집이 이 시기의 대표적 성과다. 항주에 거주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이어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몇 년 후 그는 이곳에 자신이 설계한 개자원芥子園을 지었다. 문인들의 서신 모음집과 관리들의 판결 모음집을 출판했고, 유명한 그림 교본 『개자원화보芥子園?譜』도 이곳에서 나왔다.

목차

해제
제1부 목소리와 용모에 관하여聲容部
제2부 거실에 관하여居室部
제3부 완상하는 기물에 관하여器玩部
제4부 음식에 관하여飮饌部
제5부 재배에 관하여種植部
제6부 양생에 관하여頤養部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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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동양의 에피쿠로스 이어의 『한정우기』 국내 초역
동양 문화의 총수가 담긴 지식백과사전이자 양생기
“삶을 건강하게 즐기는 법”에 대한 지식 총 망라

청나라 초기에 쓰인 지식백과사전이자 양생서,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온갖 지혜와 철학, 실용적 지식을 담은 『한정우기閑情偶寄』가 국내 초역되었다. 이 시기와 분야 연구를 꾸준히 해온 김의정 교수가 번역을 맡았다. 한국어판 제목을 ‘쾌락의 정원’이라 붙이고, 부제에 ‘동양의 에피쿠로스’라는 구절을 넣은 것은 이 책이 독자에게 안겨줄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한 사람이 삶을 가꾸고 즐기는 데 있어서 이 정도의 열정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이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이어李漁’라는 인물에 대하여

명말 청초 시기에 활동한 이어李漁는 원래 이름이 선려仙侶이고 나중에 어漁로 개명했다. 자字는 적범謫凡이고 호號는 천도天徒 또는 입옹笠翁이라 한다. 절강성 금화부金華府 난계현蘭溪縣 하리촌夏李村 사람으로 명말 청초의 저명한 희곡 이론가이며 희곡작품과 백화소설을 다수 창작했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오늘날의 직업군으로 보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분야에 몸담았는데, 극작가이자 연출가 겸 극단 경영자였고, 책의 기획과 편집에서 출판과 판매를 총괄하는 전문 출판인이었다. 또한 소설과 희곡을 쓴 작가이자 비평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 『한정우기閑情偶寄』의 면면에 드러나듯이 건축·가구제작·의복·장신구·화훼·음식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전 영역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했던 예술가였다.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이어의 출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어의 모친이 열 달이 넘었는데도 해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백발노인은 큰 인물이 태어날 예정이나 이곳의 지세가 출산을 막고 있다고 하여, 마을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옮겼더니 순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힘들게 얻은 아이였고 비범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어 ‘신선의 벗(선려仙侶)’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속세에 유배 오다(적범謫凡)’라는 자를 가졌으며, ‘하늘의 무리天徒’라는 호를 받았다. 그리고 과연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명을 보여 가족 뿐 아니라 온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이어는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공부하던 중, 19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생계가 곤란해지자 가족과 함께 난계로 돌아와 결혼했다. 꿋꿋이 학업을 계속하여 숭정崇禎 8년(1635), 금화金華의 동자시童子試에 합격하고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29세가 되던 숭정 12년(1639) 항주杭州에서의 향시에서는 합격하지 못하고 금화에서 2년간 막부의 막료생활을 했다. 숭정 15년(1642) 명 왕조의 마지막 향시가 있던 해, 항주로 응시하러 가던 중에 정국의 위험을 느끼고 난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과연 청나라의 침입으로 명 왕조는 사라졌다. 국가 멸망과 함께 오랫동안 꿈꾸었던 과거시험을 통한 성공의 꿈도 사라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관리가 되려는 길을 포기하고, 고향 하리촌 이산伊山에 별장을 마련했다. 별장의 이름은 이원伊園으로, 자신의 원림 철학에 따라 직접 설계했다. 또한 이 시기에 고향마을에 주민을 위한 정자를 짓고 하천의 준설공사도 벌였다.
1651년, 이어는 분쟁에 휘말려 가산을 정리하고 항주로 이사했다. 이때부터가 이어의 인생 제2기인데, 그는 전과 다른 삶의 길을 결심했으며 글을 팔아 생활을 시작했다. 『풍쟁오風箏誤』 『의중연意中緣』 등의 희곡과 『무성희無聲戱』 『십이루十二樓』 등의 백화소설집이 이 시기의 대표적 성과다. 항주에 거주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이어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당시 항주杭州, 소주蘇州, 남경南京 등지에서는 불법복제가 심해졌는데, 이어 본인도 모르는 작품이 ‘호상입옹湖上笠翁’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1662년 항주를 떠나 남경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때부터 문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항주 시기의 이어가 전업 작가에 가까웠다면, 남경 시기의 이어는 극단주와 출판인을 겸한 다각적 문화 사업가였다. 몇 년 후 그는 이곳에 자신이 설계한 개자원芥子園을 지었다. 문인들의 서신 모음집과 관리들의 판결 모음집을 출판했고, 유명한 그림 교본 『개자원화보芥子園?譜』도 이곳에서 나왔다. 당시 이어의 집안에는 노복까지 합치면 수십 명에 달하는 식솔이 있었다. 이들을 부양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으므로, 그는 늘 외출하여 관리들과 사귀며 그들의 사례를 받았다. 글을 파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후원금을 받았으며 팔리지 않는 글은 쓰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불륜과 엽기로 가득한 그의 소설과 희극은 정통 문인들의 눈에는 천박하고 조잡한 것일 뿐이어서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1666년부터 이어는 섬서陝西, 감숙甘肅, 북경北京 등지를 돌아다니며 후원자를 알아보았다. 이 와중에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교희喬姬와 왕희王姬를 발굴하여 가반家班(가정 내 연극단)을 꾸려 전국 각지를 돌면서 공연 활동을 했다. 아마도 이 시기가 힘들었지만 이어의 후반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득의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일생의 경험을 총괄한 야심작 『한정우기』도 이때 나왔다.(1671, 강희 10년) 그러나 몇 년 후 교희와 왕희가 병사하고 심리적 타격을 입었으며, 사업도 잘 되지 않아 만년의 이어는 상당히 곤궁하게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년의 이어는 고향 난계로 돌아왔다가 1677년, 늦게 얻은 아들의 과거시험 응시를 위해 67세의 나이에 다시 항주로 이사했다. 이 시기 거주지는 산기슭에 있어 이곳에 작은 원림을 짓고 이름을 층원層園이라 했다. 힘든 이사 끝에 가난과 질병이 겹쳐 고통스런 시기를 보냈으나, 대련對聯에서 “호수와 난이 나를 부르니 온 집안이 그림 속으로 이사왔다”라고 쓰며 기뻐했다. 그리고 1680년(강희 19) 일생을 여러 직업을 가지고 여러 지역을 떠돌며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이어는 항주에서 눈을 감았다.
이어는 수시로 후원자 물색 여행을 떠났던 만큼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 일화를 기록했으며,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별도의 출판물로 묶어내기도 했다. 이어가 만난 인물은 전겸익錢謙益과 오위업吳偉業 등 저명한 문인에서 공예품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 수가 8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전국의 17개 성省, 200개 현縣을 방문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은 늘 그를 깨어 있게 했고 작품의 풍부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한정우기閑情偶寄』에 대하여

16~17세기 강남의 지식인들은 풍부한 물질문화를 문인의 관점에서 담론화했다. 고렴高濂의 『준생팔전遵生八?』, 진계유陳繼儒의 『암서유사巖棲幽事』, 도륭屠隆의 『고반여사考盤餘事』, 문진형文震亨의 『장물지長物志』가 대표적 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정우기』는 이러한 책들과 노선을 달리하는데,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던 비주류 문인답게 대중화의 길로 나아갔다. 한마디로 『한정우기』는 전통적 문인의 삶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문화시장에 뛰어들었던 그의 고민과 열정이 담겨 있는 일종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주로 희곡 창작과 무대 연출을 위한 전문서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의식주衣食住 전반을 다룬 실용서적에 가깝다. 사곡부詞曲部·연습부演習部·성용부聲容部·거실부居室部·기완부器玩部·음찬부?饌部·종식부種植部·이양부?養部의 8부로 구성되어 있는 가운데, 사곡부와 연습부는 희곡 연출로 특화된 부분이고, 국내에 따로 번역 소개가 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일상생활의 미학이라 할 수 있는 나머지 여섯 부문에 대하여 번역했다. 각각을 소개하면 ‘성용부’는 여인의 용모, 화장법, 옷 입기 등에 관해 기술한 것이다. 세수하기, 눈썹 그리기, 자신을 돋보일 수 있는 신발 고르기, 몸매가 날씬하게 보이는 조끼와 벨트 이용하기 등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신선한 점이 있다. 검은 색 재킷은 안에 여러 가지를 바꿔 입을 수 있으므로 활용도가 높다거나, 신발을 선택할 때는 양말과 신발 그리고 발이 닿는 땅의 색깔까지 고려해서 각각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거실부’는 거실, 벽, 창문, 천정, 화장실, 수납공간, 액자 걸기 등 주거 공간의 활용에 대해 서술했다. ‘기완부’는 집에서 사용하는 각종 기물에 대해 서술했다. 당시 수많은 문인 애호가의 골동품 수집 열풍이 있었고, 서화와 수석에 이르기까지 전문 서적이 많았는데, 이어의 경우는 실용적 측면을 고려하여 평범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기물 활용을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침대, 의자, 책상, 서랍 등의 활용법을 소개했다. 등불, 접시, 편지지 등의 작은 소품도 빼놓지 않고 다뤘다. ‘음찬부’는 음식, 즉 먹거리를 다룬 부분으로 재료와 조리법을 소개했다. 이어는 육식보다 채식을 권장했으며 버섯, 죽순, 각종 나물의 이로운 점 등을 소개하고, 매일 먹는 밥, 죽, 떡, 국수 등을 종류별로 자세히 다뤘다. 이어서 육류에서 어류로 넘어가며 각각의 특징을 차례로 다루었다. ‘종식부’는 식물의 품종과 재배에 관한 것이다. 주로 꽃을 다루고 있지만 목본(나무), 등본(덩굴식물), 초본(풀)으로 구분하고 토양, 바람, 햇빛 등 재배 조건까지 세밀하게 논하고 있어 16~17세기 식물학 발전의 한 수준을 보여준다. 또한 갖가지 꽃에 얽힌 자신의 일화, 여러 가지 별칭, 꽃과 관련된 자신의 특별한 애호 등에 대해서도 흥미진진하게 늘어놓아 읽을거리로서의 가치도 풍부하다. ‘이양부’는 건강하고 쾌적한 삶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는 인생은 한번뿐이니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철학관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다만 이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몸을 망칠 수 있으므로 적절한 절제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제철에 맞는 음식 먹기, 올바른 수면법과 휴식법은 절제하며 즐기는 삶의 기본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나아가 올바른 성생활 등 은밀한 부분까지 하나의 실용적 지식 차원에서 제공하고 있어 놀라움을 준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과연 이어가 입만 열면 주장해온 “나는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정우기』